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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을 넘어 행복사회로 가자
▲ © 행복세종타임즈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구조는 늘 있어 왔다. 건전한 사회를 향한 사회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에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있으며 이를 법적으로 보호한다. 이익집단이나 단체들이 집회를 갖고 시위를 하는 것은 비단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행동은 집단행동이라고 한다. 이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용어로서 국민들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집단행동으로 부당한 처사에 대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법한 절차와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고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마스크는 그동안 집단행동 현장에서 침묵시위의 상징이자 평화적인 시위로 표방되어 왔다. 그래서 마스크에 ‘X자’를 넣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장면들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어찌 보면 백 마디 말보다도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녀왔다고 생각한다. 갈등 속에서도 평화를 그려내는 지혜가 엿보이는 시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얼굴을 감춘 폭력 집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정부도 단호해졌다. 엄단하겠다고 공표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집회 시위문화는 언제부터인가 정치적인 색깔이나 이념적인 색깔이 드러나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상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순식간에 폭력이 난무하고 무슨 불상사가 생기면 본질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비방전이 전개된다. 또 다른 사회갈등만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시민들과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철도파업이 그랬고 지금의 민주노총 등의 대규모 집회가 그렇다. 반민주와 정권퇴진을 외치며 살벌한 폭력행위가 등장한다. 국민들도 깜짝 놀랐다. 물 폭탄을 쏟아 붓는 공권력의 과잉진압 때문에 경찰차를 때려 부수고 대응을 했다고 주장하며 불법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아전인수’격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경찰도 정보력을 갖고 대응을 준비한 모양새이고 집회 주체 측들도 폭력 행위를 할 수 있는 쇠파이프 등을 사전에 준비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물 폭탄으로 과잉진압하기 때문에 폭력행위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경찰버스를 끌어내는 밧줄을 준비했단 말인가. 사전 모의가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과연 공권력의 과잉진압인가도 살펴볼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어찌하여 이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국회는 무엇을 했고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정부는 이들이 내세우는 부당한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면서 대화를 통한 민주적인 노력을 펼쳐왔으며 대한민국 민의의 장인 국회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무슨 대책을 세워왔는지 정말 궁금하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주역이 되어야 할 정부나 국회가 이들이 길거리로 나와 극단적인 의사표출을 해야 할 정도로 ‘나 몰라라’ 했다면 이는 참으로 엄청난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특히 국회와 정당들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엉뚱한 일에는 동작도 빠르니 맨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회의원 세비를 올리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슬그머니 없던 일로 했다. 여기에다 예산 나눠먹기 행태를 음성적으로 벌이다가 들통이 나 종편방송의 뭇매를 맞았다. 내년에 이들이 또 국회로 들어오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해야 할 우선순위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이런 사태의 중재와 해결에 솔선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툭하면 국민, 서민, 시민, 행복, 민생, 청년, 장애인, 꿈과 희망 등 온갖 좋은 용어를 다 갖다 붙여 대기는 정말 잘한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이지만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만큼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건건이 대립이다. 그러니 사회갈등을 봉합하고 중재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통하여 오히려 반사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다. 여당은 ‘불법폭력집회’라고 하고 야당은 ‘공권력의 과잉진압’이라고 옹호하는 세력으로 둔갑하여 논쟁을 벌여대고 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참으로 모순된 민주주의가 아닐 수 없다. 회고해 보면 과거 민주화 열기에 편승하여 무수한 택시들이 길거리에서 파괴되고 무질서의 부작용이 터져 나온 것도 1987년의 또 다른 사회상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그래도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전 국민적인 대의가 함께 했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통령 직선제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은 민주투쟁승리의 개가도 올렸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지금 불법폭력으로 얼룩진 집회를 민주적인 집회와 시위라고 칭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지금이 과거와 같은 반민주, 반독재 군사정권 시대라고 한다면 오히려 우리 5천만 국민들이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인 자신들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하여 반민주를 외쳐대니 시대착오적인 사오정 같은 구호가 아닐 수 없다. 반민주적인 행동인 폭력과 무질서 불법으로 난장판을 만들고 대립과 반목을 부축이며 우리 사회를 갈등구조로 몰고 가는 세력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런 세력들이 기득권 노동계층에 자리하고 귀족노조로 우리 사회를 재단하는 자들이 되어 마치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양 매화타령을 한다면 이는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한 공장 파업사례를 소개해 본다. 신발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는 파업이 아니라 파업기간 내내 한 켤레의 신발 중에 한 짝만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상품성이 없어 판매를 할 수는 없었지만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후에 노사가 서로 합의가 되어 파업을 마치고 나서는 나머지 한 짝을 제조하였다. 이 일화는 소모적인 파업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노사가 공히 상생하였다는 ‘지혜로운 파업’의 일화이다.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지기’식으로 파업이나 집회를 한다면 그것은 서로가 피해자만 낳게 되고 대화의 여지가 없다. 상생하는 길이 아니다. 그런 시행착오는 그동안 여러 파업을 통하여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 막가파식의 파업으로 서비스업종인 식당이 문을 닫고, 택시회사가 파탄이 나고, 호텔이 문을 닫았던 그런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이제는 지혜를 가질 때다. 비민주적인 방법으로는 그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갈등을 조장해서도 안 된다. 국민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분명 모든 일에 있어 꿈과 희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실현해나가는 과정은 생각처럼 그다지 쉽지 않지만 작은 데에서부터 이를 차분하고 지혜롭게 성취해나간다면 그 과정도 더욱 값지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꿈과 희망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좌절과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새로운 내일과 미래를 탄생시키는 산고(産苦)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기쁨은 더욱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갈등사회를 딛고 일어선 행복사회, 희망사회이며 이것이 바로 통합과 화합의 정신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강한 대한민국의 사회상이다.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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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JP!
▲ © 행복세종타임즈
雲庭김종필(金鍾泌, 1926년 1월 7일 ~ )은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중령으로 정변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조카딸 박영옥과 결혼했으며 35세에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9선 국회의원으로 최다선 국회의원 출신이며 제11대, 31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으며, 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 등의 총재를 지냈던 분이다. JP김종필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 내내 흥미롭게 읽었다. 더구나 한국현대 정치사의 살아있는 증인의 증언을 듣자니 많은 감회가 있었다. 가난한 우리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고향인 충청도를 애향심으로 끌어안았다. 정치에 있어서 때로는 지혜를 때로는 뚝심으로 한 길을 가셨던 큰 어른이셨다. 살펴보면 말머리에 민주주의는 피가 아닌 빵을 먹고 자란다는 그 한마디가 바로 민심이요 천심이라는 것을 아셨던 분이다.
노자의 도덕경 70장에 보면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知我者希, 則我者貴, 是以聖人被褐懷玉이라 했는바 이는 내 말은 알아듣기 아주 쉽고 행하기도 아주 쉬운데 천하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구나. 말에는 근본 종지가 있고 일에는 중심이 있는데 오직 모르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자가 드물고 그럴수록 나는 귀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겉으로 베옷을 입고 있지만 안으로는 보배로운 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노자의 본문이 때로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도의 우주론적 법칙 같은 형이상학적 측면을 말하고 있기는 이 글을 따지고 보면 무위자연의 법칙으로서 물과 같이 자연스럽게 혹은 겸허하게 살라는 소박한 충고로서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운정 김종필의 그랬다. 쉬운 말이지만 그 안에는 천둥번개가 있고 따뜻한 햇살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있었다. 정치사가 어찌 영광만 있었겠는가. 하지만 자갈길은 자갈길대로 흙길은 흙길대로 마다않고 묵묵히 소이부답하며 걸어온 대인의 길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그랬다. 무위에 입각한 노자의 삶의 방식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했듯이 세상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명리(名利)만을 추구하거나 화려한 외모나 형식에 더욱 치중을 하고 있다고 한탄만 했다. 왜 그가 산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게 되었는지 영국의 불세출의 정객 처칠을 왜 존경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무리 장삼이사의 삶이라하더라도 우리가 너무 무심했다. 고향의 어른을 너무 오래 모른 채했다.
인간사 잘산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 ‘비고 고요한 마음(虛靜)’으로 하늘의 이치와 자연에 부응하는 간단한 삶의 원리인데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니 노자는 그것을 비유하여 “성인은 거친 베옷을 입고 있지만 속으로는 보배를 품고 산다.”고 한 것이다. 그야말로 ‘피갈회옥(被褐懷玉)’이다. JP의 회한은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태양이 되고 싶었다”지만 한일협정에 큰 보람을 갖는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가진 로맨티스트로서의 마지막 정객이다. 하는 말마다 지혜를 담고 그림을 그리며 예술인을 사랑하고 도와주었으며 행동을 하는데 절도와 절제를 알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한(無限)에 무한을 보탠다고 증가(增加)가 일어나지 않는다. 무한은 무한일 따름이다. 유한(有限)은 무한 앞에 소멸하는 순연(純然)한 허무다.
프랑스 사상가 파스칼의 말인데 JP가 특별한건 유한에도 그에 적합한 가치를 부여하고 긍정했다는 점이다. 유한은 그저 허무하지만은 않다. 완성과 충족 속에서 무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JP는 우리에게 그걸 남겼다. 일의 성취 속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 말이다.
“내 정치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62년)과 DJP 후보단일화 결단(97년)을 들고 싶어요. 그 일엔 비난과 욕이 쏟아졌지만 역사의 전면에 서는 도전과 성취의 보람이 있었다”고 하면서 말을 마쳤다.
이제 자기의 갈 길을 알고 자기의 설자리를 알며 마칠 줄 아는 운정 김종필에게 우리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자. 한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자. 부디 행복하고 안락한 노후를 빌어마지 않는다. 문득 미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귀가 떠오른다.
“눈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이게 누구네 숲인지 알듯하다
그 사람 집은 마을에 있지
그는 모르리라
내가 여기 서서 숲에 눈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내 조랑말은 기이하게 여기리라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인가라곤 가까운 데 없는데
연중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 길을 멈췄으니
말은 방울을 흔들어 댄다
뭐가 잘못됐느냐고 묻기라도 하듯
그 밖엔 오직 가볍게 스쳐 가는
바람소리, 부드러운 눈송이 뿐
숲은 아릅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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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뜻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 © 행복세종타임즈
터키의 러시아전투기의 격추로 인하여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뉴스들이 나오는 가운데 동해에서는 北 SLBM(잠수함 탄도미사일) 파편 발견되었다. 다행히 시험 발사는 실패한 듯이라는 CNN의 보도가 있었지만 매우 심상치 않은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가는 오늘이다.
어느 경우에도 전쟁은 느닷없이 터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경우도 전쟁 이전에 이미 38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조되었던 위기감이 매번 반복이 되는 충돌로 인해 점차 무뎌지고, 비상경계 태세가 해제되는 순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임진왜란도 그랬다. 부산에 있던 대마도 사람들을 일본막부의 명령으로 철수시킨 것이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지만, 조선 조정은 이를 무심하게 넘겼다.
언제나 전쟁은 징후를 동반하지만 조선의 경우는 그것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견해가 엇갈려서 대비를 안 한 것뿐만 아니었다. 당파가 갈려서 전쟁을 무시하려고 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들은 전쟁을 대비할 때 올 정치적 부담이 두려워 전쟁을 애써 외면했다는 기록들이 엄연하게 존재한다.
국제정세가 이런 가운데 미국의 CNN이 국제 정세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CNN은 국제적으로 이슬람국가(IS)와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터키와 러시아 전투기 격추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심각성을 조명하기도 했다. CNN은 25일(현지시간) “이것이 제3차 세계대전이 아니면 무엇인가(How is this not World War III?)”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것은 마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과 유사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북한과 155마일의 전선을 가지고 있으며 호전적인 전쟁을 평소에도 입에 달고 사는 그들이기에 우리로서는 등골이 오싹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정부가 할 수 있는 제반조치들을 점검하고 강구해야할 것이다. 또한 내달 5일 민중총궐기대회를 열겠다는 전국농민회총연맹에 대해 경찰은 '집회 불허'하고 전농'측은 다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국내정세도 불안하다. 불교계의 화쟁위원회가 나서 중재를 서는 모양이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종교계 전체가 나서 평화롭게 마칠 수 있도록 중재하고 주최 측도 자제해줄 것을 촉구한다.
더구나 마땅한 전쟁억지력을 갖지 못한 우리로서는 외교라인의 점검도 필수적인 것이다.
사실상 전쟁억지력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우리를 침범했을 때 우리의 보복공격으로 인한 타격이 상대방 국가에게 있어서 치명적일 수준의 데미지를 안기는 수준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선제공격을 받지 않을 국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의 핵우산아래 있으므로 한미의 공조라인도 살펴 만약의 사태에 철저하게 대비해야할 것이다.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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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 © 행복세종타임즈
미국사회가 민주주의의 꽃이고 모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유와 질서의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미국사회의 아이덴티티(identity)는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켜온 민주사회의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질서를 바탕으로 자유를 구가하며 오늘의 미국사회가 성장해 왔다. 물론 미국사회도 인종차별이나 노예제도 등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극복하며 오늘의 민주사회를 이룩해왔다. 아직도 완벽한 사회라고는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법과 원칙, 자유와 질서, 인권을 존중하며 세계평화를 주도해 왔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반미감정을 골을 들러내는 반대세력들을 제외하고는 미국사회의 평화와 질서는 모든 국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돌출하여 민주가 정착되고 자유가 넘치는 나라가 된 것은 아니다. 1776년 독립선언이 실질적 의미의 미국 역사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들도 파란만장한 격동의 200년 세월을 보낸다. 그래서 탄생한 중요한 슬로건이 하나 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Free is not freedom.). 자유에는 분명히 민주질서가 내재되어 있으며 내 생각대로 혹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캠페인이 방송자막을 통해 늘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되 법과 원칙에 따른 민주질서를 중시하며 사회적 방종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는 그런 사회구조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의 기본에 충실하자는 사회적 콘셉트다.
우리나라 초등학교사회 그림 책명에 이런 것이 있다. ‘마음대로가 자유는 아니야‘란 만화그림책이다. 정치에 속한 민주생활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이 그림책은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민주적인 태도를 배우게 구성되어 있다. 알기 쉽고 참으로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초등학교 6학년생을 대상으로 한 책인데도 우리 생활과 정치, 국민의 권리와 의무 등의 챕터로 나뉘어 성인들이 보아도 흥미롭고 자못 감동도 주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표현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향하여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기본적으로 ’민주적으로‘,’공평하게‘라는 개념을 등장시키되 여기에는 분명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있다. 이를테면 집안에 형제나 자매 오누이가 있는데 서로 의견이 달라 싸우는 스토리이다. 첫 시작은 원하는 놀이가 달라서 서로 싸우게 되는 그야말로 ’서로의 생각만 고집하고 싸우는 모습‘이다. 그러나 결과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들의 이야기와 민주적인 사고를 통하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소개하며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하고 있다. 결론은 ’민주적으로 공평하게 정하여 놀기로 한 아이들‘이다. 여기에는 ’민주적으로‘,’공평하게’ 정하자는 슬로건이 등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참으로 흥미롭고 시사를 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를테면 ‘공평하려면 다함께 쉬고 다함께 일해요’,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멀쩡한 물건을 망가뜨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어린이는 마음껏 놀 권리는 있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내가 어지른 것은 치우고 숙제는 미리 한다’, ‘조금씩 양보하고 즐겁게 먹는 방법으로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좋지만 다수결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실도 적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 내가 누군가의 입장에서 특별히 살펴주는 것이 바로 배려‘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것은 주인인 ’국민이 다스린다‘는 것인데 누구나 누려야할 권리가 있지만 국민의 한사람으로 지켜야 할 의무도 있다는 사실을 만화로 서술하고 있고 이를 어린이들이 배우고 있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헌법 제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과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즉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질서는 민주주의 이념이지 폭력과 무질서 불법 무법천지를 용인하다는 구절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폭력을 쓰고 법을 무시하고 사회질서를 해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민주질서를 해치고 나라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세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이런 행위는 그 이유가 무엇이던 민주주의를 짓밟는 폭력 테러집단에 불과한 것이다. 적법한 절차와 적법한 행동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 내 맘에 안 든다고, 내 생각대로 안한다고, 쇠파이프로 경찰차를 때려 부수는 살벌한 폭력행동이 과연 올바른 민주적인 행동인지 묻고 싶다.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로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성토할 수 있는데 이런 전근대적인 행동까지 동원하며 대한민국 사회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가 민주주의를 그만두라는 말인지 공산주의 내지는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는 것인지 그 정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다중을 이용한 군중심리를 이용하고 도망자의 길을 가는 비겁한 행동으로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를 교란하는 자는 그 실체가 무엇이며 진정 대한민국의 정의와 올바른 역사를 위한 자인지도 분명 밝혀야 한다. 누구를 위하여 국민을 팔고 누구의 재산을 함부로 망가뜨리는지도 밝혀야 한다. 이들이 집회에 쓰는 돈은 과연 누가 대는지도 알고 싶다. 민주주의가 아직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앞서 소개한 초등학교 그림책을 사서 보라.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제대로 알고 민주를 외치고 정의를 외치고 독재를 외쳐야지 도대체가 설득력이 없는 언행으로 무슨 민주와 정의사회,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아우성인가.
종교가 자비와 사랑을 가르치고 있지만 범법자들의 도피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 조계사에 민주노총위원장이 숨어들어 나오질 않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스토리인지 참으로 어안이 벙벙하다. 지난 번 철도파업 때도 그러고 이번 광화문 집회의 범법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나라의 범법자들의 도피처가 조계사인가 묻고 싶다. 그렇다고 한다면 앞으로 모든 범죄자들과 수배범들이 조계사로 숨어들면 이들 모두 신변을 보호해 주겠다는 말인지도 묻고 싶다. 아니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으며 대한민국의 국법을 어긴 자를 신변보호라는 용어로 보호한다고 하면 이 나라의 법과 질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인지도 또 묻고 싶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한다면 도망갈 일이 아니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국민 앞에 나서야지 절로 도망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참으로 궁금하다. 중재를 하면 법을 어겼어도 봐주라는 것인지 또 무엇을 중재하겠다는 것인지 또 누구를 위한 중재인지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신변보호라는 이유로 비겁한 도망자인 범법자를 자비를 내세워 보호하는 조계사의 처사에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금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미국사회가 강조하는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초등학교 그림책에서도 아이들에게 ‘내 마음대로가 자유는 아니야’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조차 모르면서 정의를 부르짖고 독재를 외치는 비민주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이율배반의 모순과 자가당착에서 벗어나 막말로 ‘너부터 잘해’고 ‘너부터 똑바로 해’라는 대상이 아닐 수 없으며 뼈를 깎는 자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이다. 민주사회의 자유는 책임과 의무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를 혼동하며 민주사회 질서를 교란하고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민주주의를 초등학교교과서에서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불법과 탈법, 폭력 등 비민주적인 투쟁으로 문제의 해법을 찾으려 한다는 이는 역사와 국민 앞에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한다. 우리나라 3.1독립정신과 이에 영향을 받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정신을 배우고 타산지석으로 삼아라.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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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보일러 배관-‘수족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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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차서 다른 사람 손잡기가 두려워요’, ‘발끝이 시려서 밤에도 양말을 신고자요’ 우리는 주변에서 사계절 내내 손발이 차가워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수족냉증’이라는 병이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진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추위, 스트레스와 같은 과도한 정서적 긴장 및 호르몬 분비 변화 등이 수족냉증을 일으키는 원인들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원인 질환으로는 레이노병, 추간판 탈출증, 손목터널 증후근, 류마티스성 질환, 갑상샘 저하증 등이 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한 수족냉증은 정확한 의학적 판단으로 받고 원인에 따른 치료를 받는 경우 예후가 좋다.
수족냉증은 평소 생활 관리를 통해서도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첫째, 항상 손발이 추위나 차가운 물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 수욕, 족욕을 통해 말초혈관 순환을 개선할 수 있다. 방법은 양손 또는 양발을 각각 40℃ 물에 굵은 소금이나 생강 반쪽 넣고 15분간 담가주면 된다.
둘째, 정서적 긴장이 심한 사람은 자율신경의 조절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깊은 잠을 못자거나, 깜작깜작 놀란다거나, 급체증상이 있거나, 극도의 긴장상태에 노출 되면 손발이 싸늘해지는 사람에 해당된다, 항상 기분 좋게 즐거운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도한 긴장은 교감신경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자극시켜 말초혈관을 과도하게 수축시킨다. 적당한 휴식 및 유산소 운동을 통해 정서적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충분한 수면시간과 양질의 수면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 호르몬의 분비변화로 인해 수족냉증이 심한 경우는 가까운 병의원에 찾아가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좋다. 특히 갱년기 여성 및 월경통이 심한 젊은 여성들에 해당한다. 난소-뇌하수체-시상하부를 축으로 하는 호르몬 조절 시스템이 고장 났을 때 수족냉증에 걸리기 쉽다.
마지막으로 수족냉증에 좋은 차는 대추, 생강, 계피, 약쑥, 부추, 말린 무 등이 있다.
이상으로 추운 겨울을 더 힘들게 만드는 수족냉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201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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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정치와 길거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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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의 정통성과 국민의 기본권과 의무를 적시한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지향하는 지를 보여주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함축하는 소중한 가치이다. 그 토대위에 우리 사회가 지탱하고 있으며 남북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고 있고 고귀한 생명들이 산화하였다. 나라,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한때 월남이 망하고 보트피플들이 국제미아가 되어 피눈물 나는 형극의 길을 걷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런 나라가 아니지만 일제 36년의 나라 잃은 고통을 안고 살아왔던 민족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연 우리는 그동안의 역사의 아픔을 교훈삼아 오늘의 대한민국을 올바로 지키고 있는 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희망의 정치, 행복의 정치, 비전의 정치, 상생의 정치가 국민들을 위하여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살펴보아야 한다.
좌우,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나라의 대립과 반목이 끊이질 않고 있다. 건건이 대립이다. 정치권에 내재해 있는 여야대립의 묘한 행보들은 어떨 때는 이들이 진정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사사건건 초가삼간 다 태우는 식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언행을 서슴지 않으며 국민들의 시선이나 비판을 아랑곳도 하지 않고 돈키호테식의 행동과 사오정 같은 언행으로 정신감정을 해보아야 할 정도의 모습들이 다반사로 나타난다. 국민을 위한다는 지도자들이 국민을 우습게 알고 있다. 서민들의 대변자인 듯 포장된 지도자들이 약자를 짓밟고도 매화타령을 하는 웃기지도 않는 행태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일부 지도자층에서조차 자행되고 있다. 국민비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불감증까지 생겨 “짖을라면 짖어라 나는 간다.“ 식이다. 그러니 불쌍한 것은 국민들뿐이다. 선거구획정도 여당과 야당의 먹거리 쟁탈전을 방불케 한다. 숫자놀음에 그치며 국민이나 대한민국의 민주발전, 국회의 발전을 위하여 고심하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준법정신이 투철해야 하는 자들이 오히려 법정시한도 버젓이 어기고도 반성은커녕 예의 그럴 수 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다. 국회의원수를 늘리자니 국민들의 쏟아지는 비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비례대표를 줄이자니 자기편이 줄어들어 손해라며 각자 다른 셈법으로 마주 앉으니 주판알을 튕기고 있으니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 늘 무엇하나 속 시원하게 해법을 찾아 국민들 앞에 내놓는 것을 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역사교과서 문제만 해도 그렇다. 2008년 쇠고기 파동 때가 그리운지 또다시 광화문행이다. 10만 명, 20만 명이 모여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무엇하느라고 민주적인 절차와 협의를 거치며 총의를 모으는 일을 내팽겨 치고 어쩌다 정치판을 넘어서서 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논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말이다. 대한민국의 대의민주주주의가 이 정도라면 참으로 안타깝다. 지난해에도 세월호 문제로 광화문이 시끄러웠고 온통 난리가 아니었는데 이제는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또다시 대립과 반목의 악순환을 거듭하니 이를 지켜보는 힘겨운 삶에 지친 국민들은 억장이 또 무너진다. 길거리로 나와 소리치는 이들이 옳다며 박수를 쳐주길 바란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오직 정치권이 못났으면 반대급부의 단체들이 끼리끼리 모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말이다. 이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위한 애국어린 집회라기보다는 대한민국 사회의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편 갈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에 다름 아니다. 만만치 않은 집회비용은 과연 누가 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어딘가 세 결집의 냄새도 풍긴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를 빙자해서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세력들은 훗날 역사교과서에 실리는 역사의 심판을 거꾸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정 역사교과서의 바른길을 찾고자 원한다면 국민들의 폭넓은 의견수렴과 대화, 문제점 진단 등을 통하여 역사 정의에 입각하여 거를 건 거르고 취할 것 취하는 취사선택을 하면 된다. 다시 말해 친일좌경을 없애면 되는 것이지 친일은 안 되고 좌경을 용인하고 좌경은 안 되고 친일은 용인하는 이런 어리석은 교과서를 누가 감히 만들어 누구 앞에 감히 내놓을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학부모들이나 국민들이 그렇게 수준이하로 어리석다고 보면 그것은 착각 중에 착각이다.
길거리 정치로 희망을 키우고 행복을 키우는 대한민국이 될 수 없다. 사회반목과 불안을 조장하여 득을 보는 세력들이 과연 누구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사회불안에 앞장서는 세력들이 과연 누구이며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들이 진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나선 사람들인지도 알아야 한다. 대의민주주의의 장인 국회를 내팽겨 치고 길거리 정치에 나선 제도권 정치인들도 이들과 부화뇌동하며 어리석은 행보로 대한민국 국법질서를 문란케 한다면 단호하게 처벌하여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게 해야 한다. 법을 어기면서 역사교과서를 올바르게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논리의 모순이며 어불성설이며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 민주주의를 지키는 바로미터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지키고자 한다면 역사 앞에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으며 모두에게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희망과 행복의 대한민국 정치는 분명 길거리정치가 아니요 애국을 가장한 투쟁도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시점이다.
201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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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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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초입에 들어서면 우리네 가정들은 김장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겨우내 양식으로 김장도 중요하지만, 이 시기에 우리가 챙겨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우리 몸의 면역력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폐 건강입니다. 우리의 폐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가을철 큰 일교차, 미세먼지 증가, 추워질수록 증가하는 실내외 온도차 등이 있습니다. 이시기에 우리 몸은 급성감기, 비염, 기관지 천식, 만성기침 등 호흡기와 관련된 질환에 노출되기 쉽습니다.
위에 언급한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기 위한 방법에는 적절한 습도조절, 손 씻기와 관련된 청결문제, 유산소 운동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음식섭취를 통해 폐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 있는데요, 여기에서는 호흡기에 좋은 음식들이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도라지입니다. 도라지의 효능은 폐 기운을 열어주면서 기침, 가래 및 인후부 종통이 있을 때 3~6그람 넣고 물에 끓여 차로 마십니다. 또한 겨울철에는 배와 도라지를 함께 끓여서 먹는 것도 좋습니다.
두 번째는 무와 호박입니다. 무는 만성폐질환, 기관지 질환, 폐렴과 천식에 탁원한 효능이 있습니다. 호박에 있는 베타카로틴이라는 성분이 비염, 편도선염, 인후염과 같은 점막염증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줍니다. 무는 평소에 날것으로 간식으로 먹어도 좋고, 호박은 죽을 쑤어서 드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오미자입니다. 오미자의 효능은 무엇보다 오래도록 낫지 않는 기침(만성 해수)을 치료하는데 좋습니다. 오미자는 차가운 물에 24시간 우려내어 하루에 2~3잔 마십니다. 오미자와 도라지를 끓인 물에 꿀을 타서 마시면 기침, 가래에 좋습니다.
네 번째는 살구 씨입니다. 살구 씨 속의 시안화수소산이 함유되어 있어 기침이 심할 때 기침을 멎게 도와주고 가래를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어 기침 가래 등의 기관지염에 도움이 됩니다. 차로 마실 때에는 독성이 있는 꼭지부분을 떼어내서 끓이는 것이 좋습니다.
호흡기 질환은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건강수칙을 철저히 지키고, 폐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충분이 섭취하면서 겨울철 호흡기 질환을 이겨내길 바랍니다.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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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국회를 설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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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세종시로 내려왔지만 국회가 있는 서울 여의도에서 오래 살았기에 그곳은 내게 제2의 고향 같아 그리워질 때도 있다. 그런데 요즈음 언론계 후배들에게 들은 여의도 정가 이야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해외 순방의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박근혜대통령은 24일 국무회의에서 “만날 앉아서 립서비스만 하고, 민생이 어렵다고 하면서 자기 할 일은 하지 않는다. 위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국회가 다른 이유를 들어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국민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도 했다. 대통령의 입장으로는 경제활성화 법안과 노동개혁 법안,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발목 잡는 국회, 특히 야당이 얼마나 미웠을까?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미울 만도하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이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로 정국은 얼어붙고 협상의 정치가 길을 잃게 된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언급한 국회 심판론에도 치명적 약점이 있다. 3권 분립의 원칙상 입법은 국회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전해들은 바로는 한중 FTA 비준안 처리를 호소하러 간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야당 간사를 만나지 못해 5시간이나 국회 주변만 맴돌다 발걸음을 돌렸다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 입법부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첫째가 국민의 여론이 압력이 되어야하고, 둘째는 대통령의 앞장서는 설득의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웹사이트 방송에 출연해 건강보험 개혁안, 일명 오바마케어를 홍보하고 시리아 정책에 반대 의견을 피력해 온 공화당 의원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설득하는 것은 좋 정치의 본보기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정쟁의 정치가 아니라 타협과 설득의 통해 정국을 이끌어가야 한다. 불의와도 타협을 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인데 왜 그런 장을 마련하지 못하는가? 정무수석이나 장관에게 일정부분의 전권을 주어 조정하고 설득하는 통로를 가동해야 한다.
벌써부터 정가에서는 내년 총선에서 제기될 야당의 ‘정권 심판론’이 먹혀들지 않도록 대통령이 ‘역(逆)심판론’ ‘국회심판론’을 펴는 것은 아닌지 의심어린 말도 나오고 있다. 얼마 전 6월에 있었던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 심판’발언과 11월에 있었던 ‘진실한 사람 선택’해 달라는 ‘국회 심판론’으로 여당의 의석을 180석 이상을 확보하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얘기도 떠돌고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본인이 옳다고만 생각하는 독선적 리더십으로 나라를 망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국가장으로 예를 다한 김영삼 전대통령은 설득의 리더십으로 칼국수정치를 한 사람이다. 이렇게 모두가 설득과 타협의 정신으로 한자리에 모여 자꾸 의견을 조율하고 조정해야 정치가 산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오히려 예전보다 못한 퇴행수준으로 가고 있다.
정치의 퇴행은 정치인 수준 저하와 동전의 앞뒷면 관계다. 정치가들이 욕을 먹으면 유능한 사람들이 정치 참여를 주저하고, 그 자리를 얄미운 생계형 정치인들이 들어서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흔히 말하는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생업으로서의 정치다. 이런 정치인들은 절대로 스스로 나가지 않는다. 왜야하면 생계 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생업으로서의 정치는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그러나 희망은 있다. 내년에 치러지는 총선에서 단합된 국민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언론과 시민단체가 만들어내는 대한민국 의회 의정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멋진 투표권을 행사하자. 그 길만이 나라를 구하고 애국하는 길임은 분명하다.
201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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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는 승리한자들만의 기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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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한창 세상의 이슈인 역사논쟁은 역사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사전적 의미로서 역사(歷史, 문화어: 력사, 영어: history)는 오랜 역사,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 인간이 거쳐 온 모습이나 인간이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그리고 역사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들 중 후대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의 ‘역(歷)’은 지나간 것, 경과한 것을 뜻하며, ‘사(史)’는 그것을 기록하는 일을 맡은 관리를 뜻했다. 하나의 단어로서 ‘역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역사책 ‘삼국지’에 대해서 배송지(裴松之)가 달았던 주에서라고 알려져 있다. 글자의 형태상으로만 본다면 역(歷)의 최초 의미는 울창한 숲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공간적 경과의 의미에 시간적 경과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다. 시간적 경과의 의미는 달력이나 역법에서의 역(曆)자를 낳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역(歷)과 역(曆)은 서로 통하는 글자였다. 중국의 사관 사마천은 그 자신이 명언하고 있듯이 역사는 "과거의 행위를 궁구하고 그 성공과 실패, 흥기와 쇠망의 배후에 가로놓인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양에서는 헤르도토스라는 이야기꾼이 기원전 5세기에 쓴 ‘역사(histories apodexis)’라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 있다. 그는 이것으로 서양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영어로 직역한다면 ‘history on display’가 된다. 헤로도토스의 시절에는 historia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탐구를 뜻했다. 어원적으로 ‘탐구하다’ ‘증인’ ‘알다’ 등에서 파생된 그리스어 historia는 탐구 자체는 물론이고 또 그 결과로서 얻은 지식이나 저작을 뜻하기도 한다. apodexis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거나 해명하거나 전시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엄밀한 사료 비판(史料批判)에 기초를 둔 근대 사학을 확립한 독일의 사학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여 지기 마련이다.
이탈리아의 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는 실천적 요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된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오늘 우리 정치사회의 문제도 그러하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므로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에는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역사란 "사실로서의 객관적 측면의 역사와 "주관적 측면으로 기록된 사실"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역사를 뜻하는 용어의 어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독일어로 역사를 뜻하는 Geschichte라는 단어는 geschehen이라는 동사가 명사화한 것으로 "일어난 일"을 뜻 하는 말이다. 한편, 영어의 history는 "찾아서 안다."라는 그리스 어 historia에 연유한다. 즉, 전자는 "과거의 사실(객관적 측면)"을, 후자는 "기록된 사실(주관적 측면)"을 나타내는 어원을 가진 말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역사논쟁의 역사란 용어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와 이를 토대로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의 두 측면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역사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LANKE 1795-1886)는 역사란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며 "역사가는 자신을 숨기고 역사적 사실만 말해야 한다."고 하여 역사의 객관적 측면을 강조한바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는 지금 역사논쟁이 일고 있는 이때에 더욱 역사가의 임무에 큰 중요성은 부여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고립된 개인 행위자의 동기에 관한 사실이 아닌, 사회 내에서의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힘에 관한 사실임을 역사가는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역사가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 그 자체에서 방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용"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선가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믿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역사가는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고 한나라의 정체성과도 중요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월13일 ‘정치인과 교과서’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도 박 대통령의 역사교과서 개정 시도를 우려한 바 있다. 당시 신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A급 전범이라는 점과 박 대통령의 아버지가 일제에 협력한 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박 대통령은 일본 식민통치와 독재 시기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역사교과서를 고치려는 두 나라의 위험한 시도는 역사의 교훈을 위협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사학 이론서인 에드워드 핼릿 카(1892년~1982년)는 영국의 정치학자. 역사가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역사를 그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정의하면 막연하다. 역사에 대한 카의 정의는 보다 구체적이다. 역사라는 대화에서 그 주체는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fact)이다. 카는 ‘과거의 사실(facts of the past)’과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을 구분한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자의적이다.
‘역사가들 마음대로’인 것이다.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보면 ‘역사적 사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사실’이다. 이 구분은 『역사란 무엇인가』가 상대주의(relativism)를 표방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상대주의 앞에서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진리를 독점할 수 있는 절대성을 상실한다. 역사 서술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를 서술하는 사학자에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카에 의하면 사실을 많이 모은다고 역사가 되는 게 아니다. 무수한 사실 중에서 역사를 기술할 사실을 선정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학자의 주관이 개입된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 교과서에 나온 사실이 사실은 상대적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에 사회의 차원을 부여한다. 카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 미래의 대화는 추상적이고 고립된 개인 간의 대화가 아니다. 역사란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라고 했듯이 어제와 오늘은 우리들의 미래이고 이긴 자들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역사학자들의 뜻있는 논쟁을 펼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늘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우리들의 새로운 역사를 써보자.
그것이 남은 자들의 책임이고 양식 있는 자들의 책무이다.
201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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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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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신입생을 뽑기 위한 ‘수시’가 한창 진행 중이다. 학교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배우 되기>를 향한 열기는 여전하다. 매년 배우가 되겠다는 학생들이 3000명 이상 입학하고 또 졸업한다. 대한민국 뿐 아니라 세계 어디든 배우가 되겠다는 인구는 매년 늘고 있다. 그러나 ‘좋은 배우’가 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자신의 재주 하나 달랑 믿고 곧잘 힘든 도전을 감행하지만 부르지 않아도 다가오는 친구처럼 오만의 늪은 늘 속삭인다.
“배우는 예쁘고 연기만 잘 하면 되지” 혹은 “남에게 없는 장기를 많이 갖고 있으면 다른 배우들 보다 먼저 출세할 수 있지.” 그럴까, 과연?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배우가 되려면 아름다운 몸과 끝없는 자기 계발은 물론, 전통과 습관, 삶을 바라보는 자세,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진리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짜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걸 고민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의 리 스트라스버그는 배우이자 연출가로 유명한 아메리칸 메소드의 선두 주자였다. 그의 연기학교를 찾았던 안젤리나 졸리는 “실제처럼 연기하려면 배우가 과거의 기억, 경험, 감정을 이끌어내 연기해야 한다.”는 스트라스버그의 말을 듣고 끝내 2년 만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극중 인물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경험이 충분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 평생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맡은 역할이 에이즈 환자라면 그 경험이 없어도 연기는 정녕 가능한 걸까? 배우들 대부분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비슷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적극적인 배우라면 에이즈 환자를 직접 만나 얘기도 해보고 그들을 면밀히 조사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진짜 에이즈 환자처럼 보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연기를 하려면 상상력, 경험, 과거의 기억, 감정 조절 등 모두가 중요하다. 게다가 새로운 경험을 위해 ‘여행을 하는 것’도 배우에겐 일용할 양식과 같다. 지친 도심을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하는 건 많은 걸 새로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듣고 얻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국도 변의 산하가 울긋불긋 색칠을 시작했다. 어느 화가인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그릴 수 있으랴. 그 아름다움일랑 멀리서만 보지 말자. 직접 땅을 딛고 산 기운, 하늘 기운마저 온몸으로 마셔 보자. 몸 안의 온갖 미움과 두려움 날려버리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배우로서 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버리고 다시 채우는 힘과 필요하다면 이내 그걸 비울 수 있는 지혜가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천연덕’과 기막히게 만나는 날, 배우 지망생들의 꿈도 어느덧 저 산과 하늘색으로 물들리라.
2015-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