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 NEWS
-
프로야구 관중 입장재개가 던져주는 의미
© 세종타임즈
정부는 주말인 26일부터 프로 스포츠 관중 입장 재개 관중 입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무관중 프로야구 경기가 시작된 지 2개월만이다. 프로축구는 다음달 1일부터이다. 물론 전면 개방이 아니고 수용 가능 인원의 10% 이내 입장으로 제한적 조치지만 경기장 입장 재개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프로 스포츠 관중 입장 재개 방안을 오늘 회의에서 논의한다"고 밝힌데 이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경기장 내외 방역수칙이 철저히 준수된다는 전체 하에 최소 인원부터 입장할 것"임을 밝혔다. 곧 이어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안에 따라 26일부터 관중 입장을 허용하겠다는 발표했다. 아쉽게도 5개 구장에서 치르는 경기 가운데 현재 거리두기 2단계 조치가 내려져 있는 대전과 광주는 제외됐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되고 있는 대전은 27일 이후로 미루어 졌다. 그렇지만 사상 처음으로 무관중 경기를 TV로 지켜보던 팬들에게는 청량제가 되고 있다.
사실 코로나19가 지역감염확산이란 우려감 속에 대전과 광주는 고강도의 거리두기를 통해 확산을 차단하는 노력을 펼쳐 왔다. 대전의 경우 다행히 방문판매업체를 중심으로 퍼지던 감염 상황이 다소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언제 어디서 전파가 또다시 이뤄질지 지역민들의 걱정은 여전한 상황이다. 일부지역에서는 동선도 공개되지 않은 채 현장을 조용히 방역처리 하는 경우마저 생기고 있다. 뒤늦게 감염자가 방문했던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례도 접하게 된다. 26일부터는 종교단체도 소모임이 허용되는 등 규제가 완화되어 다소나마 불편을 덜게 되었다. 장애인들의 직업시설과 일부 작업장들도 규제가 풀어져 다시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규제의 완화조건들은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나름대로 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려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고강도만 빠질 뿐이지 거리두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사회적 규범처럼 되어가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 습관처럼 자리 잡을 전망이다.
생활 속에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은 이제 일상에서 기본이 되고 있다. 공적 마스크 공급체계도 마무리되어 자율화되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마스크 대란을 겪었는데 그 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마스크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여름철 비말마스크도 대중화되었다. 가격도 오히려 내려갔다. 그동안 공적 마스크가 너무 비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마스크는 이제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용에 따른 지혜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마스크를 형식적으로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에서부터 아예 벗어던지고 다니는 사람에 이르기 까지 공중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삼가야 해야 할 대화도 다른 탑승자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목적 승강장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하는 사례도 있다. 심지어 기침까지 하면서 탑승자들을 불안케 하는 경우도 왕왕 보게 된다. 이른바 공적 예절이 중요한 시점에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대중교통 이용이 겁날 정도의 장면들이 자주 목격이 되는 것은 아쉬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긴장감만 갖고 살 수는 없다. 일상이 그야말로 숨 막히는 것만 같은 순간순간들이지만 그래도 정신건강을 위해 돌파구는 찾아야 한다. 요즘에는 코로나 감염염려증이 너무 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결벽증일 정도로 세심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지키지 위한 자구노력으로 코로나19 시대에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걱정만 하고 살 수도 없다. 그동안 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규제가 너무 일방적인 정도라며 불만을 토로해 왔다. 고강도 규제가 집중하는 경향 때문이다. 기도회나 성가대연습도 하지 못하고 식사도 같이 못하고 소모임 자체도 금지되자 마치 손발이 묶인 것처럼 답답함을 호소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지난 24일 오후 6시를 기해 이런 교회 방역수칙 의무화 조치를 해제했다. 이제 그동안의 규제가 풀려 다소나마 일상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두기는 여전해 진행된다. 아직도 진행형인 코로나19 사태에는 방심은 금물이다. 그동안 터득한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유비무환의 자세이자 감염병을 예방하는 지혜임은 분명하다.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무관중 경기가 풀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일상의 피로감을 덜어가자는 의미인 것 같다. 너무나 삭막하고 피폐해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가 지금 프로야구 등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긴장감도 풀어보는 것은 이 시기에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이 넘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긍정과 희망의 불씨를 키워나가는 공동체의 노력도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진 자영업자들에서부터 폐업 위기를 맞고 있는 사업장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한 대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프로야구경기가 무관중이라는 폐쇄적인 상황에서 관중입장재개라는 숨통을 찾았듯이 우리네 일상도 이런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거리두기를 한다고 마음까지 거리를 두는 사회가 되어서도 안 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코로나 19 사태 생활 속 거리두기는 지속하지만 마음만은 멀지 않게 늘 가까이 함께 하며 희망과 긍정의 꽃이 피어나길 바란다. 이런 함축의미를 프로야구 관중 입장재개가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2020-07-26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2
© 세종타임즈
도쿄의 음악학교 입시를 포기
졸업을 앞둔 최승희는 이제 집안에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하며,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힘을 보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여학교를 나온다고 나왔지만 앞으로 어찌할지 내겐 전혀 방향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겠다, 그리고 일가의 생계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승희, 1936, , 12)
그도 다른 동창들처럼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다른 우등 졸업생들처럼 일본 유학도 가고 싶었다. 때마침 숙명여고보의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에게 일본 유학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 모교의 교원회의의 결정으로 나를 학교 급비생(給웰生)으로 동경 음악학교에 입학시키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어린까닭에 하는 수없이 열여섯 살의 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일 년 동안 놀고서 동경에 가라고 하셨다. 음악 교사인 김영환 선생은 그중에도 나의 음악가 될 소질이 있다고 보시고 ‘너는 꼭 음악가가 되어라’ 하셨다.” (최승희, 1937, , 12)
최승희는 숙명여고보 재학시절 ‘창가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노래 솜씨가 좋았다는 말이다. 가 최승희에 대한 첫 보도를 내면서 “승희씨는 학교시절부터 성악을 잘해서 학우들부터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보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최승희 자신은 성악가가 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학교의 졸업 성적은 우등이었고, 그 중에서도 창가를 꽤 잘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에는 으레 내가 독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가를 꽤 잘한다고 해서 장래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최승희, 1937, , 32)
그렇지만 음악교사 김영환의 강력한 권고와 숙명여고보 교원회의의 유학 제안, 그리고 집안에 더 이상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최승희는 도쿄의 음악학교 유학을 고려해 본 것 같다. 그러나 고려는 고려로 끝났다. 연령 미달로 응시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하지만 그 기쁨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빨리 여학교를 졸업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나이의 부족으로 도쿄 음악학교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최승희, 1936, , 33)
최승희가 도쿄의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지원했다가 ‘연령 미달’로 낙방했다고 서술한 평전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우에노 음악학교의 학칙에는 연령을 제한하는 규정이 없었다. 다만 입학 응시 자격을 5년제 중학교(여성은 고등여학교) 졸업자 또는 그에 준하는 학력을 가진 학생으로 제한했는데 이것이 간접적으로 연령을 제한할 수는 있었다.
일본의 ‘구제중학교령’에는 5년제 중학교와 고등여학교 입학을 12세 이상으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고등여학교를 졸업하면 17세가 되었고 이것이 간접적으로 음악학교의 연령기준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숙명여고보 졸업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연령 제한 때문이었다면 ‘집에서 일 년 동안 놀고서’도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일본 여학교에 편입해서 1년을 더 수학했다면 음악학교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나이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이와 연동된 조선과 일본의 학교 제도의 문제였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학교 연한을 일본보다 낮게 정한 것은 그 자체로도 교육상의 차별이었지만 조선 학생들이 일본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 대학에 가려면 먼저 일본의 중학교나 고등여학교에 편입해 1-2년의 수업연한을 채워야했던 것이다.
결국 최승희는 모교에서 대학 진학 장학금을 얻고도 도쿄의 음악학교에 응시조차 하지 못한 것인데, 그것은 연령 미달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학교의 제도상의 간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2020-07-19
-
국민공감을 생각한다
© 세종타임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이지만 어떤 사실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둘러대서 하는 말로 쓰인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임기웅변식이다. 오죽하면 이 말이 등장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이 언어를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가는 살펴보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른바 궤변(詭辯)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얼핏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며 허위적인 변론을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있다. 온당한 이치도 살피지 않고 가당치도 않는 말을 끌어다가 자기주장이나 조건에 맞도록 합리화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더 나아가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아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얼토당토않은 것을 우겨서 남을 속이려하고 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는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대는 황당한 말을 일컫는다.
요즘 대한민국은 이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지난 16일 개최되었던 '이재명 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공판에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건' 관련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를 제외한 3건에 대해서는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벌금 300만원인 원심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환송 조치했다. 고등법원으로 원심 파기•환송 조치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관련 허위사실 유포 건'의 심리 결과는 무죄 7명, 유죄 5명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6대5로 유•무죄 관련 의견이 맞섰다. 대법원이 일률적인 법적 책임 묻고 이에 대해 수사권이 작동하면 수사기관 중립성 훼손우려와 자유로운 토론에 장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논리이다. 일방적으로 적극적인 허위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한 처벌하기 어렵다며 무죄취지로 파기환송을 한 것이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지만 사실 이날 생중계까지 하며 진행된 선고공판은 범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TV 토론에서의 거짓답변도 '표현의 자유' 범주에 포함시키고, 공개되는 TV 토론에서의 답변을 공개적인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공표'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며 공직선거법상 TV토론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아주 좋지 않은 판례를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대법원의 선고이후 국민적인 신뢰가 많이 무너져 내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판결이지 법적인 판결로 공감을 얻기에는 어딘가 1인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반기는 측은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사필귀정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환영하고 있지만 이는 역사의 평가로 남게 되었다.
요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2차 가해가 극성인 가운데 피해자를 매도하는 발언이 방송을 버젓이 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 피해자를 조롱하고 매도하는 발언이 등장하는지 그 심리상태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충남에 이어 부산, 서울까지 이어지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고 언어폭력으로 2차 가해에 편승하는 것을 보며 상당수 국민들이 공분하고 있다. 이들 은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로서 또는 검사로서 변호사로서 쏟아놓는 언어들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심각성이 매우 크다.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사고를 갖춘 사람들이 편파성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 공적인 방송인이나 공인의 자세이다. 방송의 경우 편견과 사견이 지배하면 이는 공적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회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불공정한 언론임에 다름 아니다. 그 누구든지 궤변이나 지록위마식의 언어구사로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거짓을 진실인양 포장한다고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지났고 국민들의 수준도 그게 아니다. 언어와 사고에 있어 상식이 통하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품격 있는 노력은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특히 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 법이 권력 앞에 무력해지면 그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법의 잣대가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이 되어서는 결코 정의가 바로 설 수 없다. 법과 양심이 존재하는 사회와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민들은 사소한 도로교통법만 어겨도 과태료를 문다.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은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 기타 각종 법을 크게 어겨도 법망을 벗어나고 감옥에 가도 훗날 사면복권을 통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느냐 하는 볼멘소리도 들리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적용도 그동안 성토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다. 법위에 군림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이는 정의가 아니다. 사회지도층에서 국민들의 등불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함에도 변칙과 반칙의 사회를 조장한다면 이는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며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작금에 대한민국 사회의 크고 작은 많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처럼 정치와 이념이 대립하는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분법적 분열과 반목의 악순환이 멈추질 않고 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과연 이대로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조차 의아해 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치관과 정체성 혼돈의 시대이다. 이현령비현령, 궤변, 견강부회가 판을 치고 있다. 심지어 지록위마의 거짓도 난무하고 있다. 어딘가 숨어서 음험한 작당과 권모술책을 꾸미지는 않는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인다. 집단이기주의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민심도 흉흉하다. 마스크는 쓰고 다니지만 복불복(福不福)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잠재적 장소가 식당과 대형마트, 관광지, 지하철, 대중교통 등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위난의 시기일수록 카멜레온의 탈을 벗어버리고 법과 질서, 양심을 가다듬고 정도를 걸어가고자 하는 사회지도층의 각성과 사회대통합의 거대한 용트림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국민 공감의 길이자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 길이 아닌가 싶다.
2020-07-19
-
자살은 안 된다
© 세종타임즈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전 세계의 독보적인 1위이다. 2020년 복지부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2018년 26.6명으로 2017년보다 2.3명 늘어났다. 그것도 2003년 이후 OECD 국가 중 12년 연속 자살률 1위이다. 2018년 자살자수는 하루 평균 자살자 수는 38명이나 된다. 노인자살률도 1위이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자살률도 심각하다. 연령대별로 보면 자살자 수는 50대(2812명)가 가장 많고, 자살률은 전반적으로 연령대가 높을수록 증가하여 80세 이상(69.8명)이 가장 높다. 연령대별 자살률은 OECD 회원국 중 30대와 70대 이상 연령층에서 가장 높다. 청소년(10~24세) 자살률은 8.2명(2016년)으로 열 번째로 OECD평균(5.9명)보다 1.4배나 높다.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은 53.3명(2016년)으로 OECD회원국 중 가장 높고, OECD평균(18.4명) 보다도 2.9배 높다. 자살의 이유로는 10~30세는 정신적 어려움, 31~60세는 경제적 어려움, 61세 이상은 육체적 어려움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자살률이 세계에서 최고로 높게 나타나는 나라이다. 이런 불명예를 무려 10년 넘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안고 산다. 자살예방이라는 처방을 내놓고도 엄청난 국가적 사회적 손실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사회 지도층의 자살은 엄청난 사회적 충격파를 던져왔다.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거명하지 않더라도 인기연예인부터 기업인,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최근에는 경주시청의 철인3종 경기 선수가 상습구타와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목불인견이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인기연예인들의 자살도 때로는 SNS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무엇보다 유명 정치인들의 자살은 그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유명 정치인의 자살은 그동안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왔다. 이는 역사에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동경의 대상이 되는 화려한 삶과 명예를 갖고 있는 공인들의 자살은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직격탄을 던지게 된다. 자살의 이유가 그 무엇이든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천륜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다. 참으로 허망함을 던져준다.
사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늘 행복하거나 즐거울 수만은 없다. 희로애락이 늘 상존하며 인생을 고해와 같다고도 했다. 솔로몬 왕은 잘 먹고 잘 살았던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던진 말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토로했다. 그야말로 인생무생이다. 그 헛된 삶 속에도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이 내재한다. 비록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결코 헛되지 않은 삶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돈과 명예, 권력 모든 것을 쥐고 흔들며 최고의 순간을 누리는 것 같지만 무가치하게 이를 활용한다면 그 헛됨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하지만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모든 이들의 등불이 된다면 이는 기쁨과 보람이 배가될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절망 속에서도 오늘의 희망을 잃지 않고자 하는 깊은 뜻과 가치가 담겨있다. 생로병사의 길은 인간이면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해가 뜨고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황혼을 맞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잘났던 못났던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좌절과 자포자기, 절망의 순간들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나 잘잘못이 있을 수 있다. 인생의 시행착오와 실수, 오류는 늘 있을 수 있다. 고뇌도 있을 수 있다. 막다른 골목이나 벼랑 끝에 서 있을 수 있다. 주변의 질시와 비난도 있을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싶다. 잘하면 칭찬도 받지만 잘못을 하면 꾸중도 들을 수 있다. 늘 칭찬만 받을 수는 없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고통스런 환경에 처하더라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솔로몬의 말처럼 극복하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어느 영화의 한 구절에 ‘절망보다는 차라리 분노가 낫다’라는 말이 있다. 자살이라는 절망은 결코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추구해야할 가치가 아닌 것이다.
오늘날 코로나19의 암울한 사태가 젊은이들의 취업대란 물론 기존 직장인들의 실직대란까지 불러오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긴급재난지원금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 장사가 불황을 겪고 있다. 그나마 생활 속 거리두기라고는 하지만 지역감염이 확산되는 요즘 모두가 불안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야말로 혹독한 환경에서 삶을 지탱해 나가고 있다. WHO는 현재 상황에서 코로나 19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된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그 어떤 것 하나 희망적인 요소들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부동산정책에 이르기까지 서민들은 숨 막힐 정도이다. 취업을 통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정을 책임지는 서민들은 경제난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이른바 ‘투잡·쓰리잡’이 유행이다. 몸이 부서져라 뛰고 또 뛰는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이 난국을 견뎌내고 있다. 절망보다는 차라리 분노를 택하고 있다. 비록 30대의 자살률이 높고 50대의 자살자수가 많은 나라이지만 말이다.
자살은 생명체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위를 일컫는다.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을 끊는 행위, 영원한 이별을 쉽게 선택하는 것은 안 된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이번 서울 시장의 자살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이처럼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국민들을 ‘멘붕’에 빠져들게 하는 자살은 공인이건 개인이건 그 어떤 이유로든 정말 안 된다. 심각해져가는 자살률 1위 국가의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금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긍정적 사회분위기 조성과 삶의 질 향상 등 특단의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2020-07-12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1
© 세종타임즈
가난을 뚫고 졸업은 했으나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숙명여학교를 8년이나 다니고도 진로가 막막해 지자 최승희는 견디기 어려웠다. 물론 그는 최선을 다했다. 도쿄의 음악학교에도 진학하려고 했고,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도 응시했다. 둘 다 실패했지만 그것은 최승희의 동기가 약했거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주 변하는 학교 제도와 어려웠던 가정환경 탓이었다.
우선 최승희의 숙명여고보 졸업이 그 학교에 입학했던 것 못지않게 대단한 일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넉넉하던 그의 집안이 여고보 1학년 시절에 몰락했기 때문이다. 부재지주였던 아버지 최준현은 지방의 농지를 모두 잃었고 수창동 134번지의 기와집마저 빼앗겨 체부동 137번지의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넉넉한 살림으로 네 자녀에게 신교육을 시킬 수 있었던 최준현은 갑자기 끼니 걱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최승희는 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집에는 승일이 오빠가 밤을 새워가며 써서 받는 원고료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수입이 없었다. 그 원고료라는 것도 불과 몇 푼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침밥 때가 되면 부모님과 우리형제들은 서로 밥을 사양하면서 먹지 아니하였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학교 걸상에 걸터앉아서 어머니는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내게 밥을 먹이시던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부유하게 살다가 가난해진 사람이 가난을 견디기 더 어려운 법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에는 아무런 부족함과 궁색함이 없이 따뜻한 비단 이불과 요위에서 세상의 괴롭고 마음 아픈 불행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면서 지냈”던 최승희가 “하루에 두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을 어떻게 견디면서 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왜 몰락했던 것일까? 대부분의 평전들은 최준현의 경제적 몰락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설명했다. 최준현이 일제 당국에 농토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1912년 8월 토지조사령 발표되면서 시작되어 1918년 5월의 조선임야조사령으로 마무리되면서 그해 말까지 모두 끝났다.
최준현이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몰락했다면 1918년이나 그 이전에 타격을 받았을 것이고, 최승희는 보통학교에도 입학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준현은 1922년까지 최승희를 사립 숙명여학교에 보냈을 뿐 아니라 도쿄 니혼대학에서 유학하던 장남 최승일에게도 학비와 생활비를 보낼 수 있었다.
일부 평전 저자는 최준현의 몰락을 개인적인 이유에서 찾았다. 다카시마 유자부로(1959:14)는 최준현이 “다른 사람들의 모략에 걸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모두 잃었다”고 했고, 정병호(1995:23)는 “아버지의 무능과 방탕”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도 그것이 어떤 ‘모략’이었고 최준현이 어떻게 ‘무능’하거나 ‘방탕’했는지 서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는 최승희가 그의 일어판 에서 밝힌 바 있었다.
“도련님으로 자라셨고 사람만 좋으셨던 아버지는 남의 모략에 걸려 빚보증을 서시거나 토지 매매에서 계략에 말리시는 바람에,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셨다.”
최준현이 몰락한 이유는 ‘빚보증’과 ‘토지사기’였다. 사람 좋은 최준현은 친척과 지인들의 ‘빚보증’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대 보증을 선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보증을 선 최준현이 갚아야 했다. 다른 재산이 없던 최준현은 남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땅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식 계약에 서툴렀을 최준현이 토지매매 과정에서도 형식적 절차를 챙기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일임했다가 사기를 당해서 토지를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친 집안의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한 것, 그리고 결국 숙명여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한 것만 보더라도 최승희가 의지력이 굳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0-07-12
-
성대한 졸업식 우울한 졸업생 4
© 세종타임즈
최영희의 혼인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신여성으로서 구습에 얽매인 시가에서 현모양처로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혼하고 친가로 돌아왔는데, 부친 최준현이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보면 그가 신시대의 새 조류를 이해할 만큼 마음이 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준현은 막내딸 최승희가 취학연령에 이르자 숙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시켰고, 그대로 고등과에 진학하도록 했다. 최승희는 부모와 형제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린나이와 작은 몸집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학교생활도 원만했다. 최승희는 영민한 모범생이었다.
제17회 졸업식이 최승희의 첫 숙명 졸업식은 아니었다. 그는 1922년 3월23일의 숙명 13회 졸업식에도 참석했었다. 그때는 숙명 여자‘보통학교’ 졸업생 23명 중의 한명이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때에 학교 제도의 변화로 약간의 문제가 생겼었다.
1922년 총독부는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와 같은 6년으로 늘렸다. 따라서 4년제 보통학교 졸업자들은 2년의 학력을 보충하고 나서 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하도록 제도가 변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2년의 보습(補習)기간을 건너뛰고 숙명여고보에 바로 진학했다. 최승희의 보통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보습과를 이수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해 4월5일과 6일에 치른 숙명여고보 입학시험에 합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승희는 1922년 4월15일 80명의 동기들과 숙명여고보에 입학했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26년 3월23일, 76명의 동기들과 이 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눈앞에서 진행되는 엄숙하면서도 성대한 졸업식에도 불구하고 졸업생석에 앉은 최승희의 마음은 무거웠다. 졸업 후에 할 일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숙명여고보 졸업생 76명의 진로는 그해 3월7일의 와 에 보도되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진학하는 졸업생이 39명, 일본 유학이 13명, 각종 국내 전문학교에 진학자가 5명, 교원 취업자가 2명, 그리고 졸업과 함께 혼인하는 학생이 16명이었다. 두 신문에 발표된 명단이 완전히 같은 것을 보면 아마도 숙명여고보에서 직접 배포한 명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로가 결정된 학생들의 수를 합해 보면 75명밖에 되지 않는다. 76명의 졸업생중에서 졸업 후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졸업생이 딱 1명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최승희였다.
그는 졸업과 함께 혼인할 계획이 없었고 학교나 회사나 관공서에 취업할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응시했고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다. 숙명여고보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가 성악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도쿄의 음악학교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보류했다고 한다.
최승희는 제17회 숙명여고보 졸업생 중에서 앞길이 막막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다행히도 답답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최승희의 운명을 결정할 만남이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20-07-05
-
코로나 전파속도가 빨라진다는데
© 세종타임즈
코로나19 전파속도가 빨라지는 모습이라는 방역당국의 발표가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외유입확진자와 지역감염, 집단 감염의 확산 정도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생활 속 거리두기라는 이름으로 사회활동자체를 막지는 않았지만 이마저도 장기간에 걸친 피로감에 젖어들고 있다. 이런 때문인지 이 틈을 타고 수도권에 이어 대전 그리고 광주, 대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2차 감염확산의 우려가 높아가고 있다. 여기에다 미주와 유럽,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지역 등지로부터 들어오는 해외유입 확진자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안팎으로 난리가 아니다. 이러다가는 이른바 n차 감염의 연결고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실제 이런 현상들이 대전과 전주, 광주, 대구 등지에서 발현하고 있다. 확진자들이 계속 추가되어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예전 대구 신천지 상황과는 또 다른 양상이다. 학생들조차 감염이 이루어져 대전은 물론 충남북, 대구, 서울, 부산 등 곳곳이 난리가 아니다. 발생지를 중심으로 부랴부랴 역학조사가 펼쳐지고 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정말 답이 없다. 이달 들어 국내 신규확진자는 하루 50명을 초과하고 있고 4일 0시 기준 63명이나 증가했다. 누적확진자가 1만3천명을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다 확진자가 나온 기업들은 사옥마저 폐쇄조치하고 나섰다. KT는 지난 2일 확진자가 근무한 서울광화문 사옥을 폐쇄했다. 역시 LG유플러스도 지난 2일 확진자가 나온 대전오류사옥을 폐쇄했다. 삼성SDS도 지난 2일 확진자가 나온 잠실 사옥을 폐쇄했다. 전 직원이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최근들어 대기업 중심의 확진자가 이어지고 재확산 조짐까지 보이면서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대전에서는 감염자 역학조사 도중에 모 의원에서 6명의 확진자가 추가되었고 광주 모 교회에서도 신규확진자가 6명이 추가되었다. 이들 신규확진자들은 다른 발생지역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관련 조사가 진행 중이다. 연쇄 고리 형태를 보이면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는 코로나19는 공식발표만 있을 뿐 사실상 확산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매우 크다. 그야말로 재수 없으면 전염된다는 식이다. 알아서 조심하라는 식이다. 식당이나 대중교통에서도 여전히 안하무인의 무책임한 모습들이 자주 목도되고 있다.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추태가 자주 목격된다. 제주도 관광객을 포함해 확진자들의 상당수가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뒤늦게 판정이 나고 그동안에는 이곳저곳에 마구 퍼트리고 다니는 형국이다. 확진자들의 동선을 보면 그렇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때문인지 코로나 전파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눈만 뜨면 코로나 확진자 추가 소식을 접하고 있다. 재난문자로도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 철도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다. 주변에서 기침소리만 나오더라도 금방 자리를 피해버린다. 도무지 주변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여기에다 무더위에 마스크착용도 보통 답답한 것이 아니니 시민들의 피로감이나 짜증도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선 현장의 의료진들이다. 방호복을 입고 그야말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연일 확진자들이 찾아오고 있으니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무더위와 싸워야 하고 감염자나 접촉자들을 대상으로 한 진단검사에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건소 선별진료소도 의료진들의 여름철 환경을 개선하며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이지만 코로나 확산세 속에 의료진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사회 전반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막연하지만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만용이나 방심은 그야말로 금물이다. 코로나의 일상은 마스크착용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어린이까지 생활화되어 있다. 무더위에 어른들도 답답한데 어린이들은 얼마나 답답할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도 일부 식당들은 여전히 거리두기는커녕 마치 코로나가 끝난 것처럼 무질서하기 그지없다. 좌석을 정리해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과 비교해도 아주 대조적인 모습들을 보게 된다. 보는 사람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곳에 확진자 한명이라도 다녀가면 그 식당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초토화되고 있다. 대전지역에서도 한 지역의 주변 식당들을 확진자가 누비고 다니는 바람에 일대 식당들이 폐쇄조치하고 난리가 아니다. 이런 현상은 전국 각 시도에서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일단 확진자들이 발생하면 그 사업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폐쇄된다. KT, LG, 삼성SDS 등 대기업들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학교도 한 두 명이라도 발생하면 전교생이 비상이다. 제대로 수업이 진행되지 못한다. 대전의 경우 초등학교에서 첫 감염사례가 발행해 비상이다. 특히 대전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 15일 다단계 방문판매업소를 중심으로 재확산된 이후 누적 확진자가 계속 늘고 있는 것이다. 학교 안팎의 감염가능성이 커지면서 선별적 등교중지가 아니라 모든 학교 등교중지를 단행해야 한다는 학부모들의 목소리도 거세지고 있다. 교내 감염사례가 발생에 대한 불안감 때문으로 당연한 반응이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코로나로 인해 무더운 여름철을 맞아서도 불안감이 날로 증폭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당국은 국민들을 위한 방역수칙 준수를 외치면서도 정작 해외유입자 차단이나 지역 확산 방지를 위한 선결조치 내지는 후속조치에는 왜 미온적이냐는 비난도 거세지고 있다. 해외유입 확진자들을 왜 그토록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른다는 것이다. 먼저 감염원을 차단하고 나서 확산을 방지해야 하는 것이지 감염원을 계속 증가시키면서 확산세가 줄어들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작금의 확산세는 자칫 2차 대유행으로 번지면서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이다. 전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방역이라고 자화자찬하던 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장기간에 걸쳐 코로나와의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의 지친 모습만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이다. 국민들도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방문판매업계는 물론 종교시설이나 체육시설, 콜센터, 학교 등 코로나가 거치지 않는 곳이 없다. 지역감염 확산 속도마저 빨라지면서 불안감도 더욱 증폭되고 있다. 재난문자가 전달되면 오늘은 또 어느 곳에서 확진자가 몇 명이나 더 발생했는지 그들의 동선은 어느 곳인지를 확인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마냥 불안하다. 혹시나 자신들의 동선과 겹치지 않았는지 살핀다. 이런 코로나19 사태로부터의 해방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코로나가 변종이 발생하고 속도마저 빨라진다고 하니 무엇보다 방역수칙을 더욱 철저히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모두가 더욱 조심하고 더욱 자중하며 집단감염의 우려가 높은 다중집합장소를 가급적 피하는 길이 최선의 방책이 아닐까 싶다. 전파속도가 빨라진 코로나의 감염과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방심과 무모한 만용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2020-07-05
-
성대한 졸업식 우울한 졸업생 3
© 세종타임즈
최승희(崔承喜, 1911-1969)도 졸업식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9명의 우등 졸업생 중에서 8등이었다. 그의 4학년 평점이 90.5점이었기 때문에 우등생 대열에 낀 것이다. 박화성처럼 발군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수재들이 모인 숙명여고보에서 우등으로 졸업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졸업식에 참석한 최승희의 표정은 어두웠고,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승희는 1918년 4월, 여덟 살의 나이로 숙명여고보 보통과(=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8년 동안 이 학교에 다녔다. 이 기간에는 수창동 집과 수송동의 학교, 그리고 이 두 곳을 잇는 동선이 최승희가 살던 세계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가 등하교길에 목격한 세계는 아름답지 않았다.
최승희는 일제강점 직후에서 태어났으므로 한 순간도 조선이나 대한제국의 신민인 적이 없었다. 나면서부터 일제 식민지 백성이었다. 하지만 망국의 격동을 겪은 부모와 형제들을 통해서 자신의 조국이 조선이라는 점과 그 조국이 지금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집에서는 조선어를 쓰면서도 학교에 가면 일본어를 ‘국어’로 써야하는 생활이 그런 현실을 단적으로 각인시켜 주었다.
식민지 현실은 가정이나 학교의 울타리 밖에서도 일상적으로 목격되었다. 경복궁 앞을 지나 광화문통을 가로지르며 경성의 중심부를 걸어서 통학했던 최승희는 조선의 왕궁, 경복궁의 숱한 전각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는 것을 보았고 그 자리에 웅장하면서도 차가운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는 것도 보았다.
보통학교 1학년 때에는 고종 황제가 승하해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는 것을 경험했고 조선인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독립을 주장하던 삼일만세 운동과 그것이 일경과 헌병들에게 진압되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했다.
다행히도 잔혹했던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가 최승희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에는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는 이 시기에 조선 양반 출신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화목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최승희가 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1918년 4월이니 그의 학창생활은 대부분 기미 만세운동 이후의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였다. 총독부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나마 ‘조선인의 조선인 됨’을 허용했으므로 최승희는 조선어 신문과 잡지를 읽을 수 있었고 조선 황실이 세운 숙명여고보에서 조선인 교사로부터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최승희가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당시 조선 아동 취학률은 3.8퍼센트였다. 그나마 남학생 취학률이 6.4퍼센트였고 여학생 취학률은 1.0퍼센트 남짓이었다.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 1백 명 중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1명에 불과했다.
고등보통학교(=중학교)는 더 심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에 입학했던 1922년의 남녀 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은 28개교에 9천18명이었다. 또래 1천 명 중 4명꼴이었다. 여학생 수는 남학생의 절반 이하였다고 하니 여자의 여고보 취학률은 0.2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이는 일제의 조선인 교육 억제와 차별 정책, 그리고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조선 사회의 관행이 중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차별 정책과 관행 때문에 1920년대의 조선 여성은 보통학교만 졸업해도 식자층에 들었고, 여고보를 졸업하면 최고 인텔리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최승희가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 최고의 여학교에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집안이 넉넉했고 부모가 관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최준현은 2남2녀의 자녀들에게 모두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큰 오빠 최승일은 배재고보에 다녔고, 언니 최영희는 진명여고보를 졸업했다. 작은 오빠 최승오도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관립학교인 경성사범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립학교였으므로 네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에는 적지 않은 액수의 학비가 필요했다. 다행히 최준현은 그럴 여유가 있었다. 양반 출신으로 지방에 넓은 농지를 소유한 부재지주였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그의 형제들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이 넉넉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 최준현의 각성과 관대함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세상이 바뀌고 있으며 이제는 신교육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최준현 자신은 조선의 구학문을 공부하고 말직이나마 조선의 관리로 근무한 적이 있지만, 하늘같이 여기던 왕조가 맥없이 일제에 굴복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일본을 강국으로 만든 것이 신학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녀들에게 그 학문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주목했다. 장남 최승일을 배재고보에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양식 학교에 실망한 것 같다. 최승일이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는 것을 허락하고 후원한 것을 보면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첫딸 최영희를 서양인이 만든 이화여고보가 아니라 진명여고보에 입학시켰다. 진명은 숙명여학교와 함께 대한제국의 황후 엄귀비가 설립한 학교였다. 최영희는 진명여자보통학교와 여고보를 졸업했지만 전문인이나 직업인의 길을 가지 않고 바로 혼인했다.
2020-06-27
-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 세종타임즈
코로나19 사태가 취업대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실업자 127.8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 대기업들도 취업방식을 바꾸고 있다. 필요할 때 그때그때 뽑겠다는 것이다. 취업준비생들의 불확실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취업현장이 되고 있다.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아예 별다른 이유 없이 쉬고 있는 20대와 30대가 무려 65만2천명에 달하고 있다. 지난 6월 13일 8급, 9급 지방직공무원과 교육행정직 공채시험에는 전국에서 동시에 치러졌다. 접수자는 지방공무원 24만531명으로 10.4대1, 지방교육청공무원 5만5천338명으로 13.6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실제 응시생은 19만2천여 명이지만 두 시험 접수자가 무려 30만 명에 육박한다. 얼마나 치열한 경쟁률인지를 살펴보면 그 답은 금방 나온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만 1차 합격을 한다 해도 면접과 인성검사에서 탈락자가 나오고 최종 합격자가 가려진다. 한마디로 바늘구멍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9급 공무원 합격하기가 하버드대학에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까 10년을 넘게 공부해 가까스로 합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공시생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 사회이다. 이런 현상은 취업난이 심각하자 오랜 전부터 빚어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자기 전공과 관계없이 이 길을 많은 젊은이들이 걷고 있다. 올해도 수많은 탈락자들이 나오지만 또다시 기약 없이 각종 공무원 시험에 문을 두드릴 것이다. 탈락자가 나와도 바로 이런 경쟁사회를 우리는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고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 인천국제공항공사가 1,902명의 보안검색요원인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정규직으로 직고용하겠다고 하자 이를 둘러싸고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누구보다 당장 정규직 노조와 취준생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화 그만해주십시오’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하루 만에 무려 20만 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이는 역차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스펙을 쌓고 공부하는 취준생들과 현직자들에게 불평등한 처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력하는 이들의 자리를 뺏게 해주는 게 평등이냐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다른 공기업에까지 확대될 경우를 더욱 우려하는 대목이다. 당연히 비정규직의 정규직 추진은 기존에 막강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직원들이나 이를 준비하는 취준생들에게는 불평등이자 불공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모순된 고용형태는 어찌 보면 혜택을 보는 당사자들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일지 모르지만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객관성과 공정성의 상실의 문제를 크게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공무원은 물론 공기업의 직원 채용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자칫 특혜시비를 불러올 수도 있다. 앞서 밝혔듯이 올해 8,9급 공무원 시험에 왜 30만 명이나 몰렸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탈락을 하게 되지만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통하여 그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직자들의 자부심이 강한 것이다. 얼마나 당당하고 떳떳한 방식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 누가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달려든다면 그 사람이 우스운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시험과 공기업 입사시험, 일반 기업체 입사시험에 이르기까지 그 해당분야에 적합한 형태로 자기 선택에 의해 지원을 하고 합격을 하면 그 길에서 근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건 정규직이건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자신들의 실력과 처지에 맞게 지원한 것이다. 처음부터 가야할 길은 나누어져 있다. 서울 명문대에 모두가 다 갈 수는 없다. 대기업에 모두가 취업할 수는 없다. 심지어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다 갑부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그 길을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문제는 재원의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공기업은 사기업이 아니다. 어찌 보면 국민의 기업이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누를 끼치는 불공정한 취업특혜형태를 통해 마치 평등이라는 이유로 강행한다면 이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다.
요즘 프로야구가 무관중 경기로 치러지고 있다. 국민들의 인기 스포츠이지만 코로나19사태로 역대 보지 못하던 무관중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무관중 경기이지만 그래도 경기내용만큼은 박진감 넘치고 치열하다. 여기에 보면 심판들이 등장하고 있다. 주심과 1루, 2루, 3루 심판들이 공정한 경기를 위해 매의 눈을 갖고 판정을 내리고 있다. 그렇다고 늘 이들의 판정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2루 도루를 하는데 아웃이나 세잎을 선언하였다고 해당 선수나 감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비디오 판독이다. 심판의 판단이 옳은 지 여부를 더욱 정밀하게 가린다. 원래의 판정이 아웃이거나 세잎이라고 해도 판정이 번복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비디오 판독이 최종 판정이다. 이는 불공정과 오류를 범하지 않고 올바른 경기가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정당한 경기운영의 방식으로 불평불만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변칙과 반칙으로 승리를 챙길 수 없다. 과거 이 제도가 없을 때는 심판의 오판이 경기를 뒤집어 분루(憤淚)를 삼키는 팀들이 많았다. 모든 스포츠가 이런 제도가 도입되어 있다. 그만큼 정정당당한 승부를 가리자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즘 무관중이지만 프로야구에 열광하는 것은 승부도 승부지만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감독과 선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디에도 변칙과 반칙으로 승부를 가리자는 모습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정정당당함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기량이 부족하면 사전에 연습을 더욱 철저히 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경기에 임하는 것이다. 훌륭한 기량 뒤에는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잘하던 선수라도 제 기량을 다하지 못하면 2군으로 내려가 다시 기량을 닦아야 한다. 그래도 미덥지 못한 선수들은 과감히 방출해 버린다. 여기에는 감독도 예외가 없다. 성적이 부진하면 감독직을 계속 수행하기 어렵다. 어떨 때는 알아서 물러간다. 그만큼 승부의 세계가 냉혹하다. 더 내용을 들여다보면 프로야구에서는 4번 타자가 강타자이다. 1번 타자부터 4번 타자까지 강타자를 안배해 선수들의 라인업을 꾸린다. 라인업을 보면 선수들의 위상을 쉽게 알게 되고 사실상 기량과 컨디션을 보게 된다. 이런 냉엄한 승부의 세계에도 질서와 기본적인 룰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패색이 짙던 경기가 역전승으로 마감하는 것을 보면 인생의 역전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정당당함이라는 큰 가치가 함께 하고 있다. 그런 멋진 교훈을 프로야구는 우리에게 늘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프로야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 불평등을 개선하고 차별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연한 질서와 정정당당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공동체가 모두가 공감하고 합리적인 모델이 되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찬반양론이 존재하지만 여기에도 비디오 판독처럼 정확해야 하며 억지논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객관적으로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아집과 편견으로 반대세력을 만들어 올바른 주장과 제안조차도 부정하는 우(愚)를 범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갑론을박하며 소모적인 논쟁으로 국민들을 몰아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만성화되고 있는 청년실업은커녕 자칫 공정한 취업기회조차도 박탈하는 양상으로 치달을 수 있다. 취업대란 속에 그나마 한줄기 빛이었던 취업시험기회 조차 사라진다면 우리 젊은이들의 내일의 희망은 있을 수 없다. 한쪽에서는 심각한 청년실업대책을 부르짖으면서 아이러니하게 다른 한쪽에서는 취업문을 막아버리는 것은 취준생들의 억장을 무너트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인보다 취직하기 더 힘든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 되어가고 있다. 청년들의 분노는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며 취업문을 막아설수록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 가득이나 코로나19 사태로 위축된 취업시장이다. 실업자가 늘고 있고 청년채용도 줄고 있다. 이른바 ‘인국공사태’를 과연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우리 청년실업 해결을 보게 되는 바로미터로서 프로야구 비디오 판독의 최종 판정결과는 기다리는 형국이 되고 있다. 자칫 청년들의 거대한 저항에 부닥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황당한 고통보다는 꿈과 희망을 북돋아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소중한 꿈과 희망을 빼앗아서는 대한민국의 내일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2020-06-27
-
코로나19 지역감염 확산을 크게 우려한다
© 세종타임즈
20일 전국 9곳에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67명이 발생했다. 이는 지난 5월 28일 78명 이후 23일 만에 최대치를 기록하는 것이다. 신규확진자의 감염경로를 보면 지역발생이 38명이고 해외유입이 31명이다. 지역발생 36명은 서울 13명, 경기 10명, 인천 4명 등 27명이 수도권이다. 집단감염이 발생한 대전이 5명(대전시발표는 7명)이 추가된데 이어 대구와 충남에서 2명이 발생했다. 해외유입감염사례까지 늘면서 급증하고 있다. 수도권과 대전에서는 방문판매업체와 종교시설 등을 매개로 집단감염이 주변으로 퍼지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서울, 경기도, 대전 순으로 발생하고 있는데 그 감염속도가 걱정이다. 방역당국에서 말하는 폭발적 증가에 따른 대유행이 우려된다. 방문판매업체와 교회 등을 매개로한 지역감염이라는데 더욱 걱정이 앞선다. 그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상황을 보여 왔던 점을 감안할 때 작금의 상황이 간단치 않다. 특히 각급 학교의 등교수업이 실시되고 있어서 더욱 이런 우려의 시각이 커지고 있다. 수도권에 이어 한동안 잠잠하던 대전과 세종, 계룡시, 공주시 등지에서 코로나19가 잇달아 발생하자 지역민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마스크 쓰기가 생활화되고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어느 정도 일상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점점 코로나19에 대한 초기 자세와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다. 식당, 커피숍 할 것 없이 마스크만 갖고 다니지 실제는 거리두기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중집합장소나 대중교통이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도 이제는 코로나 19에 대한 타성이 젖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마치 나는 별일이 없겠지 하는 막연한 방심의 모습들이다. 그동안의 피로감도 누적되어 있다. 여름철로 접어들면서 무더위에 마스크 착용이 불편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보편적으로 마스크는 일상화되어 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스크만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요즘의 상황이다. 서울의 방문판매업체에서 다수의 확진자가 발생한데 이어 대전에서도 역시 방문판매업체를 통하여 지역감염사례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대유행으로 번질 경우 그동안 벌여왔던 방역활동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확진자들의 동선도 일부 공개가 되고는 있지만 무증상감염의 확산우려도 커지고 있다. 최근 제주관광을 하면서 곳곳을 누비고 다닌 확진자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접촉이 이뤄진다면 아무리 주의를 한다 해도 언제 어디서 감염될 수 있을지 모를 상황이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이후 식당 4곳, 주점 6곳 등 음식점 10곳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손님이 동행자나 다른 손님, 음식점 종사자를 감염시킨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음식점 종사자가 손님을 감염시킨 일도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았기 때문이다. 방문판매업체 관련 감염과 확진사례를 포함한다.
최근 유흥시설과 실내운동, 작은 공간 소모임, 방문판매업체 및 교회 등에서 감염이 지속되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는 끝난 것이 아닌데도 점점 타성에 젖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참으로 걱정이다. 특히 방문판매업체를 통한 감염이나 교회를 통한 감염이 지역감염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대구의 악몽이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발생하지 않던 대전지역과 세종, 계룡시, 공주시 등 주변지역에서 다수가 발생했다는 것은 지역감염의 확산세가 수도권을 넘어서 지방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폭발적 증가에 따른 대유행의 상황이 도래할 경우 그 사태의 심각성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벌써 각급 학교도 비상이다. 전국적으로도 확진자가 발생한 학교들은 또다시 전면 휴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동안 허세를 부리던 중국도 베이징에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감염증이 확산되자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고 한다. 학교 감염사태로 이어질 경우 사태가 악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서울과 경기도에 이어 대전 등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지역감염사례가 잇따르면서 갖가지 우려의 목소리가 더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름철 무더위와 함께 의료진들과 관련 종사자들의 피로도와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끝이 보이질 않는 여정에 지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지금까지 누적 확진자수만도 20일 현재 무려 1만2,373명이나 되고 있고 연일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그동안 이들을 관리하느라 얼마나 사투를 벌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대한민국 경제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그래서 지역감염확산이 더욱 걱정되는 것이다. 127만 명의 대량실업시대를 맞고 있다고 한다. 이 뿐만이 아니라 나라 빚도 날로 급증하고 있다. 3차 추경에 나라 빚이 111조가 늘어 재정건전성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자동차 하청업체들은 부품생산을 더 이상 못하겠다며 폐업을 선언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는 자동차생산에 직격탄을 던지고 있어 업체들이 비상이다. 재난지원금에 의존하던 시장경제가 다시 주저앉고 있다. 빠른 속도로 재난지원금을 다 써버린 탓이다. 반짝하던 경기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시중 상인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심지어 서울의 유명호텔들이 호텔숙박료 세일까지 벌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항공사들도 마찬가지이다. 해외여행업체들은 아예 속수무책이다. 물론 세계적인 현상이다. 혹자는 IMF체제보다 더 험악한 경제상황이라고 푸념하고 있다. 이젠 곳곳이 마스크 없이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이다. 이 현상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참으로 기약 없는 현실이다. 해외에서 봉사하던 분들도 코로나19에 따른 극심한 통제를 견디다 못해 귀국길을 서두르는 경우까지 생겼다. 선의의 봉사조차 힘든 그런 시대를 맞고 있다. 전 세계가 비상사태이다. 국내외적으로 코로나19 펜데믹은 모든 일상을 바꾸어버렸다. 지역감염확산은 악화된 지역경제에 직격탄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모든 공동체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코로나19 방역수칙도 철저히 준수하고 서로가 조심해야 한다. 방문판매업체는 물론 교회, 다중집합시설을 통해 퍼지는 지역감염은 아무리 무증상감염이라고 할지라고 분명히 감염 당사자는 어느 정도 증상을 감지하고 있으리라 본다. 물론 유증상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선의의 피해자를 낳는 무모한 행동과 영업행위는 자제되어야 한다. 지금도 곳곳에서 체온을 특정하고 이상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21대 총선에서도 감염사례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지역감염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소리 없는 전파 우려가 커지는 대목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비상인 작금의 상황에서 코로나19가 마치 일회성인양 치부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고령층이나 취약계층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에도 무수히 보아왔다. 코로나19의 지역감염 확산을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장기간 피로감에 당장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싶지만 아직도 백신이나 치료제는 없다. 아직은 기약없는 상황이지만 혹시 모를 만용과 타성에 젖어 방심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서 다시 한 번 경각심을 한층 강화하고 철저히 대비하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요즘 지역감염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모두가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
2020-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