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2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7-19 02:57:00

 

  © 세종타임즈


도쿄의 음악학교 입시를 포기

 

졸업을 앞둔 최승희는 이제 집안에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하며,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힘을 보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여학교를 나온다고 나왔지만 앞으로 어찌할지 내겐 전혀 방향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겠다, 그리고 일가의 생계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승희, 1936, <나의 자서전>, 12)

 

그도 다른 동창들처럼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다른 우등 졸업생들처럼 일본 유학도 가고 싶었다. 때마침 숙명여고보의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에게 일본 유학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 모교의 교원회의의 결정으로 나를 학교 급비생(給웰生)으로 동경 음악학교에 입학시키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어린까닭에 하는 수없이 열여섯 살의 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일 년 동안 놀고서 동경에 가라고 하셨다. 음악 교사인 김영환 선생은 그중에도 나의 음악가 될 소질이 있다고 보시고 ‘너는 꼭 음악가가 되어라’ 하셨다.” (최승희, 1937, <나의 자서전>, 12)

 

최승희는 숙명여고보 재학시절 ‘창가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노래 솜씨가 좋았다는 말이다. <경성일보>가 최승희에 대한 첫 보도를 내면서 “승희씨는 학교시절부터 성악을 잘해서 학우들부터 <카나리아 누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보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최승희 자신은 성악가가 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학교의 졸업 성적은 우등이었고, 그 중에서도 창가를 꽤 잘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에는 으레 내가 독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가를 꽤 잘한다고 해서 장래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최승희, 1937, <나의 자서전>, 32)

 

그렇지만 음악교사 김영환의 강력한 권고와 숙명여고보 교원회의의 유학 제안, 그리고 집안에 더 이상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최승희는 도쿄의 음악학교 유학을 고려해 본 것 같다. 그러나 고려는 고려로 끝났다. 연령 미달로 응시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하지만 그 기쁨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빨리 여학교를 졸업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나이의 부족으로 도쿄 음악학교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최승희, 1936, <나의 자서전>, 33)

 

최승희가 도쿄의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지원했다가 ‘연령 미달’로 낙방했다고 서술한 평전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우에노 음악학교의 학칙에는 연령을 제한하는 규정이 없었다. 다만 입학 응시 자격을 5년제 중학교(여성은 고등여학교) 졸업자 또는 그에 준하는 학력을 가진 학생으로 제한했는데 이것이 간접적으로 연령을 제한할 수는 있었다.

 

일본의 ‘구제중학교령’에는 5년제 중학교와 고등여학교 입학을 12세 이상으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고등여학교를 졸업하면 17세가 되었고 이것이 간접적으로 음악학교의 연령기준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숙명여고보 졸업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연령 제한 때문이었다면 ‘집에서 일 년 동안 놀고서’도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일본 여학교에 편입해서 1년을 더 수학했다면 음악학교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나이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이와 연동된 조선과 일본의 학교 제도의 문제였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학교 연한을 일본보다 낮게 정한 것은 그 자체로도 교육상의 차별이었지만 조선 학생들이 일본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 대학에 가려면 먼저 일본의 중학교나 고등여학교에 편입해 1-2년의 수업연한을 채워야했던 것이다.

 

결국 최승희는 모교에서 대학 진학 장학금을 얻고도 도쿄의 음악학교에 응시조차 하지 못한 것인데, 그것은 연령 미달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학교의 제도상의 간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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