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1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7-12 02:27:00

 

  © 세종타임즈


가난을 뚫고 졸업은 했으나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숙명여학교를 8년이나 다니고도 진로가 막막해 지자 최승희는 견디기 어려웠다. 물론 그는 최선을 다했다. 도쿄의 음악학교에도 진학하려고 했고,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도 응시했다. 둘 다 실패했지만 그것은 최승희의 동기가 약했거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주 변하는 학교 제도와 어려웠던 가정환경 탓이었다.

 

우선 최승희의 숙명여고보 졸업이 그 학교에 입학했던 것 못지않게 대단한 일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넉넉하던 그의 집안이 여고보 1학년 시절에 몰락했기 때문이다. 부재지주였던 아버지 최준현은 지방의 농지를 모두 잃었고 수창동 134번지의 기와집마저 빼앗겨 체부동 137번지의 초가집으로 이사했다. 넉넉한 살림으로 네 자녀에게 신교육을 시킬 수 있었던 최준현은 갑자기 끼니 걱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7)>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집에는 승일이 오빠가 밤을 새워가며 써서 받는 원고료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수입이 없었다. 그 원고료라는 것도 불과 몇 푼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아침밥 때가 되면 부모님과 우리형제들은 서로 밥을 사양하면서 먹지 아니하였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학교 걸상에 걸터앉아서 어머니는 아무 것도 드시지 않고 내게 밥을 먹이시던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부유하게 살다가 가난해진 사람이 가난을 견디기 더 어려운 법이다. “소학교를 다닐 때에는 아무런 부족함과 궁색함이 없이 따뜻한 비단 이불과 요위에서 세상의 괴롭고 마음 아픈 불행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면서 지냈”던 최승희가 “하루에 두 끼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가난을 어떻게 견디면서 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왜 몰락했던 것일까? 대부분의 평전들은 최준현의 경제적 몰락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설명했다. 최준현이 일제 당국에 농토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1912년 8월 토지조사령 발표되면서 시작되어 1918년 5월의 조선임야조사령으로 마무리되면서 그해 말까지 모두 끝났다.

 

최준현이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몰락했다면 1918년이나 그 이전에 타격을 받았을 것이고, 최승희는 보통학교에도 입학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준현은 1922년까지 최승희를 사립 숙명여학교에 보냈을 뿐 아니라 도쿄 니혼대학에서 유학하던 장남 최승일에게도 학비와 생활비를 보낼 수 있었다.

 

일부 평전 저자는 최준현의 몰락을 개인적인 이유에서 찾았다. 다카시마 유자부로(1959:14)는 최준현이 “다른 사람들의 모략에 걸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모두 잃었다”고 했고, 정병호(1995:23)는 “아버지의 무능과 방탕”이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도 그것이 어떤 ‘모략’이었고 최준현이 어떻게 ‘무능’하거나 ‘방탕’했는지 서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는 최승희가 그의 일어판 <나의 자서전(1936)>에서 밝힌 바 있었다.

 

“도련님으로 자라셨고 사람만 좋으셨던 아버지는 남의 모략에 걸려 빚보증을 서시거나 토지 매매에서 계략에 말리시는 바람에,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셨다.”

 

최준현이 몰락한 이유는 ‘빚보증’과 ‘토지사기’였다. 사람 좋은 최준현은 친척과 지인들의 ‘빚보증’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대 보증을 선 채무자가 돈을 갚지 못하면 보증을 선 최준현이 갚아야 했다. 다른 재산이 없던 최준현은 남의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땅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식 계약에 서툴렀을 최준현이 토지매매 과정에서도 형식적 절차를 챙기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일임했다가 사기를 당해서 토지를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친 집안의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한 것, 그리고 결국 숙명여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한 것만 보더라도 최승희가 의지력이 굳었던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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