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3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7-26 11:17:00

 

  © 세종타임즈


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원서도 접수해 보지 못한 채 음악학교 진학은 무산되었지만 최승희는 실망하지 않았다. 곧바로 경성사범학교 진학 계획을 세웠는데 아마도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작은오빠 최승오의 조언을 받았을 것이다. 굳이 가족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당시 경성사범학교는 ‘취업이 보장된 떠오르는 명문’으로 세간의 평판이 높았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했던 학교였다.

 

1922년에 개교한 경성사범학교는 들불처럼 번진 조선의 교육열을 배경으로 탄생한 학교였다.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의 저조한 취학률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민족지들은 교육개선을 시급한 과제로 부각시켰다. 총독부의 교육억제와 차별정책이 전방위적으로 비판됐고 학교 증설과 교사 충원의 요구가 빗발쳤다.

 

여론에 밀린 조선총독부도 교육 개선에 나섰지만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학교 증설 문제는 그로부터 10년이나 지난 1929년에야 ‘한 면에 적어도 하나의 보통학교를 설립한다’는 1면1교 정책을 수립했고 그나마 그것이 달성된 것은 1936년이 되어서였다. 교원 양성 문제에는 총독부가 즉각 움직였고 경성사범학교를 설립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다.

 

일제 강점 직전까지 조선 정부는 한성사범학교(1895)를 운영했고, 서울의 국민사범학교(1905)과 서우사범학교(1907), 대구의 대구사범학교(1906) 등이 설립되었다. 뒤이어 평양과 원산과 개천, 진주와 광주와 평택 등에도 민간 사범학교들이 설립되어 교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일제는 강점이후 한성사범학교를 포함해 모든 사립사범학교를 폐지하고, 사범학교 기능을 관립고등보통학교에 복속시켰다. 즉 관립고보에 사범과 1년 과정을 따로 두어서 교원이 되려는 학생들이 이를 이수하게 했다. 이로써 교원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사람만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삼일운동 직후부터 시작된 학교 증설과 교원 충원 요구에 압력을 받은 총독부는 1921년 5월부터 경성사범학교를 시범 운영했고, 1922년 2월 사범학교 규정을 제정한 뒤 4월에는 남학생 1백명을 선발해 경성사범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했다. 이 학교는 중등학교였으므로 소학교를 졸업한 일본인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모두 지원할 수 있었고, 5년의 수업연한을 이수한 뒤에 조선 각지의 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경성사범학교는 관립학교였으므로 학비가 없었고, 특히 ‘관비’학생으로 선발되면 매월 15원의 생활비까지 지급받았다. 학비가 면제된 대신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의무적으로 교원에 복무해야 했다. 의무 복무연한은 관비학생이 5년, 사비학생은 2년이었다.

 

경성사범학교의 인기는 대폭발했다. 학비가 무료인데다가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개교 2년만인 1924년에는 1백명 모집에 4천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지원자 중에는 보통학교 졸업생보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더 많았다. 이에 경성사범학교는 1923년부터 교과과정을 보통과와 연습과로 나누었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지원하는 연습과의 학생들은 1년의 연수기간만 이수하면 바로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이 때문에 연습과 지원자는 더욱 늘었다.

 

1925년부터는 여자연습과가 신설되어 여고보를 졸업한 여학생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최승희가 지원한 것이 바로 경성사범 여자연습과였다. 1926년 2월18일의 <경성일보>에 따르면 80명을 선발하는 여자연습과에 3백94명이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이미 5대1의 경쟁률이었다.

 

당시 <경성일보>는 여자연습과 지원자들을 출신학교별로 분류했는데 고등여학교 출신인 일본학생이 1백28명, 여고보 출신인 조선학생이 1백25명이었다. 조선학생들 중에서는 경성여고보와 평양여고보 졸업생이 42명과 45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경성의 숙명(19명)과 진명(11명)과 동덕(3명)과 이화(1명), 개성의 호수돈(3명), 평양의 정의(1명)여학교 등의 순서였다.

 

최승희는 19명의 숙명여고보 출신 지원자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3월7일 <조선일보>와 <시대일보>에 발표된 숙명여고보 졸업자의 진로 명단에는 경성사범 입학예정자가 18명으로 되어 있었다. 19명중 1명이 낙방한 것이다. 그 유일한 낙방자가 바로 최승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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