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4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8-02 01:45:00

 

  © 세종타임즈

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1926년 3월6일부터 3일간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치러진 필기시험에서 최승희는 탁월한 성적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3월19일의 면접시험에서 최승희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는데 이유는 또다시 ‘연령 미달’이었다고 했다.

 

“... 당장 준비를 해서 사범학교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은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남몰래 자신도 있었고 예상대로 합격했습니다. ... 이 기쁨도 헛된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불합격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음악학교에 가려고 했을 때와 같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가슴 아픈 이유로 구두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최승희, 1936, <나의자서전>, 34-35)

 

최승희의 필기시험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그의 조선어판 <나의 자서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1백명 모집에 8백60명의 응모자 중에서 일곱 번째로 합격이 되었다. 그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중에 우등생이 아홉 명인데 내가 여덟 번째로 우등 졸업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 사범학교의 시험성적이 나은 편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울어?’ 오빠가 다그쳐 물었다. ‘나이가 적으니 일 년만 놀다가 내년에 오래.’”

 

최승희의 기억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해 경성사범학교 여자연습과의 정원은 80명이었고, 응시자는 3백94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경성사범학교 지원상황은 1926년 2월18일의 <경성일보>에 자세히 보도되어 있었다.

 

“경성사범학교에서는 올해 보통과 1백명, 남자연습과 갑조 80명, 을조 50명, 여자연습과 80명의 예정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는데, 16일까지 지원자 수는 보통과 1천5백명, 남자연습과 갑을조를 합하여 1천2백명, 여자연습과 3백94명에 달하여, 작년도의 보통과 1천8백명, 남자연습과 8백50명, 여자연습과 2백70명으로부터 보통과에서는 감소하였으나 남녀 연습과에서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반적 지원 상황에는 기억에 착오가 있었더라도 자기 성적에 대한 기억은 정확했을 것이다. 필기시험 성적이 3백94명 중에서 7등이었다면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다. 관비학생(60명)이든 사비학생(20명)이든 넉넉히 합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불합격처리 되었다.

 

‘연령 미달’이라는 낙방 이유는 합당했을까? 여기에도 의문의 여지는 있다. 경성사범학교의 교칙에는 보통과의 연령 규칙은 있지만(12세, 제64조) 연습과에는 명시적인 연령 제한(65조)이 없었다. 다만 연습과 지원자는 5년제 소학교(일본인)나 4년제 보통학교(조선인) 졸업자여야 했으므로 소학교와 보통학교에 연령제한(12세)을 둔 조선교육령 16조와 10조를 적용하면 조선인은 16세, 일본인은 17세가 되어야 사범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도쿄 음악대학 지원할 때와 똑같은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지원자 평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최승희를 입학시키는 것이 학교에게는 부담일 수 있었을 것이다. 1년의 연습과를 마치고 교원으로 부임해도 만15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화성(朴花城, 1903-1998)은 1918년 3월에 숙명여고보를 졸업(9회)한 직후, 15세의 나이로 천안과 아산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 근무를 시작했었다.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아기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경성사범학교가 필기시험 7등의 지원자를 낙방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교칙에 명시된 것도 아니고 선례까지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승희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는 최승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경성사범학교에 합격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했더라면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린 ‘조선의 무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해 3월19일 최승희가 구술시험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큰오빠 최승일은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 그만 두어라, 승희야, 그리고 내 이야기나 좀 들어 보아라.” 진학에 거듭 실패한 최승희의 앞날은 이제 오빠의 그 “이야기”에 온통 매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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