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선택한 스승 1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8-09 06:43:00

 

  © 세종타임즈

큰 오빠가 준 여학교 졸업선물

 

숙명여고보 졸업식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서도 우등 졸업생 최승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동기 들과 학창시절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도 그들이 마냥 부러웠고, 졸업 후에 어떡하느냐는 질 문을 받으면 대답이 궁색했다. 동창생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졸업 후의 갈 길이 정해져 있었지만 자신의 앞날만은 아직 짙 은 안개 속이었다. 도쿄음악대학에는 원서조차 내지 못했고, 경성사범학교는 필기시험에 합격 하고도 구두시험에서 낙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교복을 갈아입으면서도 최승희는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배운 사람 구실을 할 것인지 막막했다. 유일하게 남은 길은 이틀 전날 밤 큰오빠 최승일이 넌지시 말했던 무용이었다. 물론 최승희는 탐탁하지 않았다. 일본에 갈 수 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다소 끌리지만 숙명여학교 졸업생이 춤 을 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기생이나 하는 일이 아닌가. 무용에 관해서는 최승 희의 인식도 당시의 일반인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오빠는 무용이 원래 천한 일이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것은 인류 최고(最古)의 예술이고 기생들의 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도 했다. 최승희는 열 살이나 연상이며 인생의 고 비마다 자신을 이끌어준 존경하는 오빠의 설명을 귀담아 듣기는 했지만 그다지 설득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최승희는 예술 무용은커녕 기생 무용조차 제대로 구경해 본적이 없었다. 마침내 오빠는 ‘직접 보고 결정하자’면서 무용 공연을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3월23일 저녁6 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는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바로 졸업식 날 저녁 이었으므로 최승일이 동생을 위해 준비한 값비싼 졸업선물이기도 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은 21일부터 3일간 계속되었고, 최승일 남매가 예매한 23일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공연 장소 경성 공회당은 소공동의 조선호텔 건너편이었으므로 체부동 집에서는 천천히 걸어도 20분, 전차를 타면 10분 이내의 거리였다. 당시에는 소공동을 장곡천정(長谷川町, 하세가와초)이라고 불다. 일제의 초대 조선군사령관 과 초대 통감을 지낸 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난 다음에는 2대 조선총독으로 재직하면서 무단통치를 일삼았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의 성을 붙인 것이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이 경성공회당을 ‘하세가와초 공회당’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조선인들의 기미만세운동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해 총독에서 해임된 후 실의 속에 사망한 하세가와의 이름을 경성 중심가에 붙인 것이 다소 역설적이었다.

 

1920년 7월10일에 낙성된 경성공회당은 경성상업회의소의 건물이었으나 상업회의소는 1층만 사용했고 천정을 높게 올린 2층은 연회나 공연을 위한 극장으로 사용되었다. 경성공회당의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1963)였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1921년)과 중앙고등학교 동관과 서관(1921-23년), 그리고 덕수궁 석조전(1935년) 등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경성공회당 건축계획을 설명하면서 “길 건너의 조선호텔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 않게 하 려고 천정을 한껏 높였고, 반자층을 따로 만들지 않기로 했으므로 중간에 기둥을 세울 수 없 어 돔 지붕으로 덮”었다고 했다. 경성공회당의 면적은 2백평으로 1천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공동 주최했으므로 공연 3주일 전부 터 대대적인 언론 홍보작업에 돌입했으나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최승희가

 
이 공회당에서 공연했을 때 ‘이시이 바쿠의 공연 때와 달리 공회당이 만원이었다’는 신문보도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공동 주최했으므로 공연 3주일 전부 터 대대적인 언론 홍보작업에 돌입했으나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최승희가 이 공회당에서 공연했을 때 ‘이시이 바쿠의 공연 때와 달리 공회당이 만원이었다’는 신문보도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최승일과 최승희 남매는 공연 시간에 늦지 않도록 집을 나섰다.

 

최승일은 양복 정장, 최승희 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의 소박하지만 단정하고 맵시있는 차림이었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설 때 가족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최승일의 아내 마현경조차 남편과 그렇게 동반으로 극장 나 들이를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4남매의 둘째 최영희와 셋째 최승오도 가정형편 때문에라 도 오빠와 막내처럼 공연 구경을 갈 생각조차 못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의 부러움을 등 뒤에 받으며 집을 나서는 오누이의 모습은 데이트에 나선 한쌍의 남녀 처럼 보였을 것이다. 귀공자 타입의 스물여섯 살 청년 최승일과 열여섯 살로 이미 숙녀티가 나는 막내 누이 최승희의 극장 데이트는 거의 1백 년 전의 일이지만 마치 눈앞에 보는 것처 럼 멋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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