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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받는 평화를 지키는 길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발발한 이후 벌써 8개월이 다 되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처음에 쉽게 끝날 것처럼 보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군사 대국이라는 러시아가 오히려 패색이 짙어가고 있다. 급기야 핵무기 사용 카드를 들이밀고 있다. 필사즉생이라는 각오로 임하는 우크라이나군의 전투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러시아 군인들의 모습은 마치 오합지졸이란 말이 어울릴 듯싶을 정도다. 러시아 본토에서는 징집령이 내려진 가운데 30만 명을 차출했다고는 하지만 자원입대가 아닌 차출이다. 심지어 징집령을 피해 러시아 대탈출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여기에는 푸틴의 무모한 전쟁 놀음도 함께 하고 있다. 세계평화를 비웃는 안하무인의 모습이 세계인을 분노를 사고 있다. 푸틴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있다. 과거 크림반도를 빼앗아 재미를 붙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우습게 알고 벌인 전쟁이다. 금방 잡아먹을 줄 알고 벌인 한마디로 명분 없는 전쟁이다. 이번 전쟁은 그동안 러시아가 세계 제2위의 군사 대국인 줄 알았지만, 종이호랑이고 허풍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기에 점령한 땅에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러시아 군대의 탐욕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절박감을 가진 우크라이나 군대의 애국심을 이기지 못하는 형국이다. 다시 탈환한 땅에서는 민간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비극의 현장이 드러나고 있다. 민간인들에게조차 참혹한 살상이 자행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에게는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6.25전쟁을 일깨우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괴군의 느닷없는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고 전국이 초토화되었다. 6.25의 인명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3년간의 전쟁으로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 1,000만 이산가족, 10만 명의 전쟁고아를 낳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통계로 본 6·25전쟁을 보면 한국군과 유엔군의 인명피해는 전사 17만5,801명, 부상 55만4,202명, 실종 및 포로 4만2,605명 등 모두 계 77만2,608명이다. 한국군은 전사 13만7,899명 부상 45만742명 실종 및 포로 3만2,838명 등 모두 62만1,479명이다. 유엔군은 전사 3만7,902명 부상 10만 3,460명, 실종 및 포로 9,767명 등 모두 15만1,129명이다. 한마디로 어마어마하다. 여기에다 교량과 항만 및 산업시설이 크게 파손되었다.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및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 생활의 터전과 사회·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해졌다. 산림도 역시 황폐해져 민둥산으로 변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바로 육탄용사들이자 호국영웅인 6.25참전용사들의 애국심과 희생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일부는 아직도 구순을 넘기고 생존해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정전상태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채 전쟁 발발 73년째를 맞고 있다.
작금의 남북상황은 마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평화행진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한동안 평화공존을 부르짖으며 비핵화의 대형 쇼가 펼쳐졌지만, 이것은 금방 그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문제는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 핵의 위험성을 간과하며 국방과 안보를 우습게 아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는 점이다. 북은 계속 미사일을 쏘아대고 있는데 시대착오적인 친일 논쟁이 등장하고 있다. 북은 9일 새벽 탄도미사일 2발을 쐈다. 최근 보름 사이 7차례다. 폭격기와 전투기 12대로 공중위협도 벌였다. 북은 핵 선제공격을 법제화하고 7차 핵실험도 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일 합동훈련을 놓고 시대착오적인 친일 논쟁이나 벌일 때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민의 평화를 볼모로 정쟁이나 일삼고 국가 안위를 도외시하는 행태를 벌인다면 이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우리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북을 이롭게 하는 발상이라고 한다면 이는 여적죄일 뿐이다. 안보를 무시하고 내부분열을 조장하여 나라의 위험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태는 지양해야 한다. 전쟁을 무슨 아이들 장난감 놀이 정도로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들이 있다면 나라의 안위를 위해 퇴출당해야 마땅하다. 국가안보에는 여야나 너와 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젤렌스키대통령의 지도력을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를 보면 답이 나온다. 뭉쳐야 한다. 미사일을 펑펑 쏘아대고 있는데도 폭죽놀이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는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6.25전쟁의 비극을 경험한 민족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비극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목도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종북좌파들이 득세하고 있다. 나라의 안위는커녕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마치 남한 속의 북한이 또 있나 싶을 정도다.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아대도 아무런 말도 없다. 핵으로 무장하여 우리를 위협한다고 해도 마이동풍이다. 핵전쟁의 위협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이를 수수방관하며 오히려 우리 측의 한미 군사훈련을 멈추라고 하고 있다. 이제는 한미일 합동훈련도 시대착오적인 친일 논쟁으로 몰고 가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안보협력을 강화해야 할 시점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저항하기는커녕 딴전을 피우는 것은 본질을 벗어났다는 지적이 거세다. 말장난으로 국민을 지킬 수 없다. 안보태세를 강화하는 일이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작금에 보여주는 북의 행태는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틈만 나면 북의 미사일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상황에서 국가 분열을 초래하고 배부른 매화타령이라 하고 있다면 이는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행태다. 작금의 상황이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비정상적 상황이다. 말로만 안보니 하면서 마냥 평화 타령을 할 시기가 아니다. 안보 위협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위기감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6.25전쟁 세대들이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여야정치지도자들은 현충원을 달려가 참배를 한다.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참배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6.25를 경험한 세대들과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엊그제 전쟁을 치른 것 같은 마음으로 참배를 한다. 전쟁은 두 번 다시 이 땅에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국영웅들의 위대한 정신이 지켜온 대한민국에 비극적 상황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들이다. 서울 용산 삼각지의 육탄용사호국선양회에는 매주 수요일 6,25전쟁으로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을 추모하는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이 자리에는 94세의 참전용사, 학도병, 퇴역 장성, 예비역, 회원들이 참석해 호국영령의 넋을 달래며 그 참뜻을 기리고 있다. 전국에 기념탑도 세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지난달 29일 강릉에서는 영천전투를 승리로 이끈 8사단 호국영웅들을 기리는 추도식이 거행되어 그 숭고한 뜻을 되새겼다. 6.25의 전쟁이 끝나 70년을 지나고 있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같은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다가 이제는 미사일과 핵으로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사태까지 빚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6.25전쟁을 잊은 채 종북을 일삼고 있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육탄용사호국정신선양회가 매주 또는 추도 일에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의 뜻을 기리며 자유대한을 지키고자 하는 뜻을 드높이고 있는 것과 너무나 대조를 이룬다. 지금 대한민국은 북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것은 물론 내부로부터 총질하는 종북세력으로부터 평화를 위협받고 있는 형국이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보듯이 평화는 자신의 힘으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오늘의 평화는 6.25전쟁 참전 영웅들이 지켜온 위대한 업적이다. 이런 소중한 평화를 지키는 길은 말로만이 아닌 유비무환의 안보태세를 행동으로 보여주며 굳건히 갖추는 것이다. 참혹한 전쟁과 평화는 너무나 극명한 세계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6.25전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경험한 우리에게 북은 물론 종북세력의 망상을 경계하고 작금의 북핵과 미사일로 위협받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더욱 정신을 차리라는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202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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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세종시 축제여 영원하라
뉴욕필하모닉 센트럴파크 공연이 3년 만에 이루어져 성황리에 마쳤다. 지난 5월 15일 맨해튼 센트럴파크에서 3년 만에 열린 뉴욕필하모닉 ‘콘서트 인 더 파크’ 공연을 찾은 5만여 명의 뉴요커들이 초여름 밤의 그레이트론을 가득 메웠었다. 특히 이날 공연엔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뉴욕필과 협연을 펼쳐 뉴요커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김 바이올리니스트는 센트럴파크에서 얍 반 츠베덴이 지휘한 뉴욕필하모닉과 협연했다. 막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모습에 관람객들은 환호했다. 김봄소리는 뮌헨 ARD 국제 콩쿨로 시작해 줄리어드 스쿨 콩쿨,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쿨 등에서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갖은 우리 대한민국의 보배같은 연주자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1873년 16년의 공사 끝에 완공된 미국 최초의 대형 도시공원이다. 150년의 역사를 가지며 현대 도시공원의 시발점이자 대명사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곳은 평지처럼 보이지만 작은 구릉지대와 나무 숲길로 이어지는 이곳은 베데스타 테라스와 ‘더몰(The Mall)이 있어 이름모를 연주자들이 공원관리사무소에 신고만 하면 얼마든지 공연을 할 수 있다. 우리 예술가들이 부러운 이유가 된다. 여하튼 센트럴파크에는 인공 호수와 연못, 여러 개의 산책로, 2개의 빙상장, 동물원, 정원, 야생동물 보호구역, 넓은 자연림이 있다. 더구나 외부 노천극장과 델라코트 극장이 있어 여름마다 ’햄릿‘ ’리어왕‘ ’한여름 밤의 꿈‘을 공연하는 셰익스피어 축제가 열린다.
그렇다면 세종시 호수공원에서 시작된 축제는 어떨까? 우리도 예술의 전당과 호수공원이 있고 중앙공원이 멋지게 자리하고 있다. 더구나 국립수목원과 박물관, 이응교가 있어 이것을 연결하면 센트럴파크 못지않은 멋진 문화 벨트로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비단강(금강)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소리이다. 호수공원 수상섬에서 개막된 축제의 대부분은 음악이 주를 이룬다. 음악은 소리의 높낮이·장단·강약 등의 특성을 소재로 하여 목소리나 악기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예술이다. 아무리 야외무대라 해도 들리는 연주 소리가 귀를 거슬리니 너무 아쉬웠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관객이나 오케스트라, 그리고 합창단까지 한 곳을 향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관객은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아름다운 합창을 귓등으로 듣게 된다는 것이다. 뭐랄까, 이건 마치 호수에 사는 물고기를 위한 연주회처럼 보인다.
우리 귀에 들리는 음악에는 어떠한 규칙이 있다. ‘수는 만물을 지배한다’라고 말한 피타고라스의 말을 빌리면. 길이가 다른 두 줄을 튕길 때, 그 두 줄의 길이의 비가 간단한 분수로 표현될 때 듣기 좋은 화음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줄의 길이가 2:3이면 이 간격을 ‘완전 5도’라 하여 듣기에 가장 편안한 화음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피타고라스의 발견은 기하학이 아닌 수를 기본으로 하는 규칙이 자연에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밝힌 최초의 사건이 소리과학의 발전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귀는 매초 고막이 흔들리는 횟수를 듣고 파동의 음높이를 인식한다.
한 대의 악기 연주에서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지만, 두 대의 악기는 연주할 때는 두 악기가 만들어 내는 위, 아래, 위, 아래 압력의 파동이 정확하게 서로 맞아 떨어져야 두 배의 파동을 만든다. 이것은 곧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는 특성상 관객과의 친밀도, 음의 풍부성, 객석에서의 균일한 음질 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계단계부터 객석의 음향성능을 예측하고 그 문제점을 파악한 후 최적화된 음악당의 설계가 필요했다. 따라서 세종축제같은 규모의 개막식공연은 여기에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다. 차라리 중앙공원의 무대를 보완해 개막식 공연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세종축제 공연을 훌륭하게 기획하고 비가 오는 날에도 행사를 소화해내는 문화재단 관계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박수를 보낸다.
202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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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을 새롭게
10월은 결실의 계절이다. 코로나의 악몽과 태풍의 위협에서도 변함이 없이 올 10월의 가을은 위대한 결실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산과 들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천고마비의 풍요로움과 평화로움이 넘친다. 가을이 안겨주는 모든 정취를 느끼고 삶을 되돌아보는 시기가 바로 10월인 것 같다. 올해도 어김없이 10월이 다가왔다. 올 10월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코로나에 대한 인식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지난해와 2020년 가을과는 달리 올 10월은 다소 숨통이 트였다. 코로나19 신규환자가 2만 명대로 줄어 감소세로 돌아서고 있다. 코로나 감염에 대한 공포나 불안감이 사라지고 이제는 감기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동안 2,480여만 명의 누적 확진자가 발생했으니 참으로 엄청나다. 한 가정에서 한 명만 감염되면 전 가족이 모두 코로나에 감염될 정도다. 쉽게 말해 대부분이 코로나에 감염돼 치료했거나 지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방역 당국의 조사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 국민의 항체 양성률이 97.38%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국민 거의 다 자연 감염 생성 항체든 백신으로 유도된 항체든 코로나 항체를 가졌다는 뜻이다. 햇수로 3년 만에 얻은 코로나19 사태 성적표다.
정부도 입국 관련 추가 방역 완화조치를 발표하고 1일 0시 입국자부터 입국 후 하루 이내에 받아야 했던 PCR 검사 의무를 해제했다. 앞서 입국자 격리 의무 해제와 입국 전 검사 해제가 시행된 데 이어 이번 조치로 국내 입국 관련 코로나19 방역 조치는 모두 사라지게 됐다. 코로나19 재유행확산으로 제한됐던 요양병원과 요양시설에서의 대면 접촉 면회도 4일부터 두 달 만에 재개되고 백신 4차 접종을 마친 어르신 등은 외출과 외박이 허용된다. 지난 9월 26일부터는 실외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자율로 전환되어 사실상 제재가 풀렸다. 올 10월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주어졌다. 이를 반영하듯 연휴 기간 지난 태풍 고난을 잊은 듯한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 관광지마다 숙박업소가 동이 나고 곳곳에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해방감이 넘치는 가을 분위기는 그동안의 피로감을 덜어주기에 충분했다. 모처럼 이런 10월 분위기가 코로나의 일상을 잊게 했다.
올 10월은 이런 일상을 되찾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새롭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각종 축제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금산의 인삼축제, 백제문화제, 계룡시의 세계문화엑스포 등등 전국 곳곳에서 봇물 터지듯 축제가 펼쳐지고 있거나 펼쳐질 예정이다. 사실 잃어버린 10월을 되찾는 느낌이다. 지방 연예인들도 분주해졌다. 10월은 의미 있는 날들이 참으로 많다. 국군의 날에 이어 노인의 날, 개천절, 한글날, 경찰의 날, 교정의 날, 여기에다 지방자치의 날도 이달에 있다. 여기에다 연휴까지 이어지면서 코로나의 일상을 벗어나 모처럼 10월의 아름다운 정취를 자유롭게 만끽하고 있다. 얼마나 기다린 일상인가 싶다. 그래서인지 가족 나들이가 부쩍 늘었다. 어린이들의 모습에도 활기가 차 있다. 어린이 놀이터에도 마음껏 뛰노는 어린이들의 활짝 웃는 얼굴이 드러나고 있다.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모습이다. 올 10월은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들이 다시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나날이 이어질 듯하다. 사실 요즘 실내에서도 그다지 큰 제약을 받고 있지는 않다. 카페나 식당들도 일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물가 폭등과 달러 강세, 금리 인상, 부동산값 폭락, 치졸한 정쟁에 이르기까지 탐탁지 않은 상황이 국민 생활을 짓누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심상치 않다. 10월과 전쟁은 마치 평화와 전쟁과 같은 상반된 용어임이 틀림없다. 모처럼 평화로운 계절을 맞았는데 때아닌 삭풍이 몰아치니 10월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잡치고 있다. 작금에 어렵고 힘든 시기에 정치인들은 치졸한 싸움에 혈안이 되어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 무슨 셈법이 그리 복잡한지 갖은 잔머리를 다 쓰면서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하느라 소모적인 정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정치가 이런 것인지 국민은 신물이 날 정도다. 여기에다 국민을 이분법으로 편 갈이를 하며 좌우 진영논리로 몰고 가고 있으니 나라가 편할 날이 없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달려가도 힘든 국내외적인 난관의 시대에 집안싸움에만 몰입하는 정치 세력들의 모습은 추하기 이를 데 없다. 국회는 열렸다 하면 고성과 트집과 몽니로 얼룩지고 있다. 이런 모습은 민주적인 국회의 모습이 아니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달라진 것이 없다. 정치의 선진화, 국회의 선진화는커녕 술수와 꼼수가 난무하니 어느 국민이 이를 공감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조건 없는 추종 세력이나 집단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본질을 외면하고 헛다리만 긁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역사의 준엄함을 모르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억압된 일상이 다소나마 풀렸지만, 10월은 마냥 평화롭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다. 10월의 시작부터 진영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좌우 진영에서의 대규모 집회는 향후 대한민국의 행보가 순탄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집회의 성격이 무엇이든 정의와 진실, 대한민국의 정상성을 되찾는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허상의 모습으로 본질을 호도하는 행태는 반드시 척결되어야 한다. 법과 질서가 존중되고 상식이 통하는 집회가 되어야 한다. 선동과 허풍으로는 올바른 나라를 이끌 수 없다. 평화로움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10월이 투쟁과 비방으로 얼룩진다면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10월의 시작이 자유로운 것이 바로 대립과 반목이 시작이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로부터의 자유로움이 투쟁의 자유로움이어서도 그렇다. 한 해의 결실을 수확하고 내년의 계획을 수립하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소모적인 싸움에만 혈안이 된다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모든 것이 위기로 치닫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만용을 부리며 이를 호도하는 세력이 있다면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 코로나로에서 벗어나 모처럼 다소나마 찾은 10월의 평화와 자유로움을 해치는 자들은 공공의 적이다. 2022년의 10월은 우리가 모두 새롭게 받아들이고 새롭게 느끼며 새롭게 가꾸는 달이 되어야 한다. 10월에 서서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보며 자유롭고 평화로운 가을을 마음껏 느끼고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도 또 다른 의미를 던져주리라 본다.
202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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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반목의 대한민국 어디로 가는가
대한민국 사회가 갈등과 반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를 부추기는 세력은 다름 아닌 정치 세력들이다. 좌우로 갈려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으로 국민 분열을 일삼고 있다. 틈만 나면 흠집을 찾아 상대를 물고 뜯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콧잔등이 아물 날이 없는 나날이다. 무엇인가 꼬투리를 잡으면 놓지를 않는다. 심지어 국회에서조차 그렇다. 군인들의 팬티 예산을 두고 삭감과 감액의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난리를 피웠다. 국회의원의 자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국민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의 5박 7일의 해외순방에도 역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말을 만들다가 개망신을 당했다. 영국 조문과 검은 망토 문제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다가 역시 망신을 당했다. 영국대사까지 나서서 해명하는 촌극까지 빚어졌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엄청난 잘못이나 실수를 한 것처럼 허위사실을 퍼트리다가 꼬랑지를 내렸다. 그러다가 뉴욕에서 대통령의 은밀한 사적 발언을 카메라로 당겨 잡아 막말 표현을 했다고 방송과 신문에서 요란을 떨었다. 여기에다 캐나다에서는 우산을 받고 비행기 트랩을 올라가는 묘한 장면을 찍어 부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언론까지 등장했다. 틈만 나면 일부 색깔 있는 언론이나 야당은 대통령과 부인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있다. 해외순방도 이렇게 막을 내렸다. 국격이나 외교적 공적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 사회는 좌우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정치가 국민을 두 갈래로 갈라놓고 있다. 중도 성향도 있지만, 중도는 말이 없고 좌우만 보인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기찻길과 같다. 과거에는 민주와 독재를 놓고 투쟁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던 이른바 민주투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국민이 성원하며 지지했던 시절도 있다. 박해를 받던 민주투사들의 명예도 회복되고 그 토대 위에서 정치지도자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런 세월을 거친 대한민국 정치이고 사회다. 정치적인 후진성과 진통 속에서도 국민의 성실성과 근면성으로 인해 세계적인 경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좌우를 가르는 리트머스시험지는 어느덧 색깔이 분명해졌다. 이른바 종북세력들이 좌에 몰려 있고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우의 색깔을 더욱 짙게 하는 형국이다. 핵과 미사일을 가지고 남한을 협박하는 북한에게 정권은 바뀌었어도 9.19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관인 것은 내부적인 싸움이 남북의 싸움 못지않게 극한을 치닫고 있는 것이다. 증오와 질시가 차고 넘친다. 이를 국민에게 여과 없이 투영시키며 갈등과 반목의 사회를 조장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 국회의원들은 청문회나 대정부질문을 통해 수준 이하의 자질이 드러나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인물로서 국민의 조소를 받고 있을 정도다. 까놓고 보면 수준 이하의 민낯을 드러내는 자들이 대한민국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으니 참으로 비감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여당의 정치세력도 다 긍정적인 인물들은 아니다. 정당의 대표까지 한 젊은 정치인은 미꾸라지처럼 흙탕물을 만들며 이전투구를 일삼고 있다. 참으로 추한 모습이다. 성 상납 의혹 등으로 국민에게 식상함을 던져주고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핍박을 받는 정치인 것처럼 돈키호테식 행보를 일삼고 있다. 국민피로감을 더하고 있다. 이것도 좋다고 하는 인물들이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한민국 정치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자신이 몸담은 당을 분열시키고 해코지하는 행태가 볼썽사납다. 추가 징계를 한다고 하면 법원으로 쪼르르 달려가 무슨 가처분신청을 남발해 대고 있다. 목불인견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다 어떤 인물은 평소 가만히 있다가 대통령과 관련된 뉴욕 사적 발언이 논쟁거리가 되니 이때다 싶어 진위 확인도 없이 독설을 퍼부어대고 있다. 같은 편인지 아니면 남의 편인지 헷갈린다는 평을 듣고 있다. 참으로 기회주의적이다. 좌충우돌하는 이런 여당의 모습에서도 갈등과 반목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수준이 떨어진다. 진중함이 없고 가벼움을 보게 된다.
건전한 비판과 견제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언론의 기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기 잡는다고 망치를 휘두르고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돈키호테처럼 날뛰면서 이른바 가짜뉴스로 국민을 오도하고 분열시키는 행태도 사라져야 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아니라 수백 마리가 대한민국을 흙탕물로 만드는 행태도 과감히 척결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면서 무엇을 얻고자 함인지 그 불순한 의도를 분명히 알고 대처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건전성을 해치고 권력 쟁취와 탐욕에만 혈안이 되어 으르렁거리는 무리를 경계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갈등과 반목은 위험수위에 올라와 있다. 이들 세력이 정치세력이든 사회단체든 노동단체든 언론이든 과감한 개혁으로 대한민국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작금의 사회상에서 여실히 보게 된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지켜보고 있다. 현충원에서 참배하며 정치인들과 사회지도층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떨어트리고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는 소모적인 정치세력들은 이젠 국민의 이름으로 척결해야 한다. 지금 국민은 묻고 있다. 갈등과 반목의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는지를 말이다. 매국노가 따로 없다.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는 자들이 정상 모리배들이자 매국노다. 이들은 척결해야 할 절박한 시점이다. 부정부패와 불법, 탈법을 일삼는 코로나와 같은 정치세력과 반사회적인 무리를 퇴치해야 한다.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는 자들이야말로 대한민국 공공의 적이기 때문이다.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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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언제부터인가 ‘6.25의 노래’를 잊고 있다. 부르지도 않고 있다. 72년 전 6.25전쟁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노래다. 6.25전쟁은 북한 공산군이 암호명‘폭풍’이란 이름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불법 남침한 것이다. 부끄럽게도 사흘 만에 서울을 뺏겼다. 물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았지만 정전협정이 이뤄진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무려 1,129일 동안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72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전 중이다. 다시 말해 아직도 진행형이다. 전쟁이 끝난 것처럼 착각하고 살 뿐이다. 엄연히 38선을 두고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다. 이제는 핵전쟁의 위협까지 받고 사는 험악하고 살벌한 대치 상황이 끝나지 않고 있다. 틈만 나면 위화감을 조장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에 이르러 남침을 북침이라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이니 황당하기 짝이 없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파죽지세처럼 쳐들어오는 북한군의 기세에 밀려 남한 땅을 다 뺏길 위기에 처했었다. 유엔군이 참전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세를 뒤집었지만, 6.25전쟁의 악몽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엄연한 역사다. 북을 아군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이 모든 것을 ‘6.25의 노래’는 함축하고 있다.
지난 어느 정권 시절 ‘6.25의 노래’가 국민이 부를 수 없는 금지곡으로 지정된 적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10년간 금지곡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이 노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심지어 가사까지 바뀌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6.25의 노래’ 원곡은 박두진 시, 김동진 곡이다. 내용을 보면 이렇다. 1절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절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3절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다시 오지 않게 하리 :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이 노래는 기성세대들이라면 어린 시절부터 입이 닿도록 부른 노래다. 6.25전쟁이 북침이라는 황당한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들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을 부르며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란 표찰도 학창시절 가슴에 달고 살았다.
그렇다고 하면 이른바 ’신 6.25의 노래(심재방 지음)‘를 보자.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조국의 산하가 두 동강 나던 날을 동포의 가슴에다 총칼을 들이대어 핏물 강이 되고 주검 산이 된 날을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동포 형제를 원수로 만든 그들을 겨레의 이름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 선열의 흘린 피 헛되지 않게 시리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 위해 민족의 공적과 싸우고 또 싸워서 통일의 그날이 기어이 오게 시리 (후렴) 이제야 이루리 그날의 숙원을 동포의 힘 모아 하나의 나라로 피의 원한 풀어 하나의 겨레로 이제야 이루리 한나라 한겨레‘이렇게 되어 있다. 6.25전쟁을 치른 세대들이 이를 보면 소름이 돋고 지하에서 호국영령들이 분통을 터트릴 참으로 황당한 노래다. 6.25전쟁의 민족 최대 비극사를 왜곡하고 전쟁책임이 있는 김일성에게 면죄부를 씌어주는 이런 황당한 ’신 6.25의 노래‘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어떻게 이런 노래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비난이 거세다. 이는 종북좌파들의 노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1절에는 북괴군이 남침했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남북한이 총칼을 들이댔다는 정황만 나열했다. 2절에는 6.25전쟁의 책임이 북한이 아니라 ’외세‘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엔군의 참전이 누구 때문인지를 왜곡하고 있다. 3절은 민족의 공적과 싸워서 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민족의 공적이 과연 어디를 말하고 있으며 왜 이런 내용을 담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왜곡된 가사 내용을 갖고 6.25전쟁을 제대로 설명하고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반공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지 짚어보면 불문가지다. 이런 교육이 전교조를 통해 세뇌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도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할 일인지조차 의아할 정도이다. 역사를 잊는 것을 넘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세력들이 과연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이 땅의 공산화인지 말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가 담긴 ’6.25의 노래‘를 금지곡으로 만들어놓다가 ’신 6.25의 노래‘라는 황당한 노래로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이 과연 대한민국의 미래를 논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6·25전쟁의 인명피해는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이다. 피해 규모를 보면 군인 17만 927명 전사, 3만 2,585명 실종, 56만 6,434명 부상, 민간인 100만여 명 사상 추정된다. 군인과 민간인이 250여만 명이 사망했다.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호남지역의 학살피해자는 8만4,003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학살피해자 12만8,936명의 65%에 이른다.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 학살을 말한다. 참전국의 피해도 크다. 참여 유엔국가는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미국, 캐나다, 필리핀, 태국, 뉴질랜드, 호주, 콜롬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그리스 등 16개국이다. 특히 미국의 참전 규모가 참전국의 80% 정도로 차지할 정도로 매우 컸다. 유엔군 전사자만도 3만3,700여 명에 이른다, 국군 전사자 13만7,900여 명을 생각하면 남의 나라 자유와 평화를 위해 엄청난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산화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고 헤어져 이산가족의 아픔이 지속되고 있는 비극의 역사가 6.25전쟁이다. 이를 잊는다고 잊을 수 있으며 왜곡한다고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 중의 착각이고 망상일 뿐이다. 72년이 지난 지금 역사를 왜곡하는 종북좌파들이 날뛸 때 현충원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의 묘비가 그날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요즘 아쉬운 것은 젊은이들이 의식 수준이다. 역사를 잊은 것인지 아니면 외면하는 것인지 참으로 아리송하다. 17일 오전 서울 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형산강 전투의 영웅 연제근상사와 12인의 특공대원 추모식에서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 60대 이상의 고령자 참석자들이었다. 구순은 넘긴 수훈의 참전용사들과 유관 기관단체 원로들이 노구를 이끌고 추모식을 참석해 6,25전쟁을 회상하고 추모하는 모습은 시대적 아픔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과 아직도 살아 계신 90대 영웅들이 오늘의 이 나라를 지킨 진정한 애국자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자라나는 세대와 젊은 세대들을 왜곡된 역사로부터 보호할 절박한 시점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포장하여 살아있는 전쟁 세대들을 우롱하는 역사적 경거망동은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되는 사안이다.
김일성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예비역 이진삼대장이 살아계신다. 남침 땅굴까지 찾아내어 엄청난 공적을 이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도 육탄용사호국정신선양회와 UN한국전참전국친선협회, 대한항일순국열사회 총재로 젊은 세대들과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이진삼 총재와 함께 하는 유법안 스님은 전국에 100여 곳에 달하는 6.25전쟁 관련 기념탑을 사비까지 투자해 건립하고 호국영웅의 참뜻을 기리고 있다. 조만간 미육군 싱그러브장군 공적탑 제막식도 거행한다. 무엇보다 6.25 전쟁사를 정립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로 알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유법안 스님은 용산전쟁기념관의 명칭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비극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참뜻이 담겨야 한다는 의미가 공감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역사는 왜곡이나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인 듯하다. 역사를 잊지 않도록 오래 간직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애국애족의 마음이자 우국충정이다. 6.25전쟁의 격렬했던 전국의 전투 현장에는 유법안 스님의 애국애족 정신이 서린 기념탑이 우뚝 서고 있다. 유법안 스님의 애국애족 정신과 6.25전쟁사의 올바른 기술에 대한 헌신적인 열정이 이 시대에 빛을 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남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유법안 스님의 위대한 행보가 왜곡된 역사관이 판을 치는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2022-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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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오패스를 말한다
각종 사회 문제를 야기하는 흉악 범죄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정신질환 유형에 소시오패스(sociopath)라는 것이 있다. 가끔 언론에 회자되면서 비정상적인 인물들에 대해 이를 적용시키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인성문제와 더불어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그 대상이다. 흉악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인면수심의 범죄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사실 같은 듯 다른 두 가지가 바로 소시오패스(sociopath)와 사이코패스(Psychopath)이다. 쉽게 말하면 전자는 후천적이고 후자는 선천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는 둘 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닮은 듯 다른 질환인 것이다. 또 소시오패스는 환경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졌고 사이코패스는 뇌의 이상이나 유전이 원인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를 뜻하는 소시오패스(sociopath)란 사회를 뜻하는 소시오(socio)와 병리 상태를 의미하는 패시(pathy)의 합성어이다. 특히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사이코패스는 역시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이 없고 타인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다만,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으로 충동적이고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기질로 태어나 공감 능력의 결여로 범죄나 잘못된 행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반면 소시오패스는 잘못된 행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반사회적 행위를 한다.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소시오패스다. 소시오패스는 정상인의 기질로 태어나지만 유년기 시절이나 사회생활 중 결핍요인에 의해 성격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다. 이들은 계산이 빠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에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감정 조절이 뛰어나 평소 일상생활에서는 평범한 얼굴로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긴다. 소시오패스는 전 인구의 4%라고 알려져 있다. 주변 25명 중에 1명은 소시오패스인 것이다. 소시오패스 중에는 상류층 인사와 유능한 직업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히틀러다.
소시오패스(sociopath)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쁜 짓을 저지르며 이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특히 소시오패스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라 호감을 쉽게 얻는다. 하지만 이들의 공감은 정서적 공감이 아니라 인지적 공감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쓰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이에 주변 사람을 조종하며 착취하는 기생적 인간관계를 맺곤 한다. 또한 거짓말을 하는데 능숙하다. 일반인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들통날까봐 긴장하지만, 소시오패스는 양심이란 사전 속 단어이기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
사이코패스는 선천적 기질이라 그렇다고 해도 소시오패스는 정말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양심의 가책이 없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다. 각종 살인사건을 통해 볼 때도 그렇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저지른 천인공노할 범죄를 비롯해 존속살인 사건, 각종 방화사건 등등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나 없는 사실을 꾸며 다른 사람들을 음해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비정상적인 행동의 인물들 속에서 소시오패스의 모습이 보인다. 심지어 해외에서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교묘하게 접근해 우리나라 사람들을 속여 등쳐먹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부류이다. 중국 등 해외에서 조심해야할 사람의 1호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은 웬만한 사람들은 이제 다 아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을 볼라치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을 보게 된다. 다양성을 떠나 악질적인 행위로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대한민국 사회가 이처럼 혼돈스럽다. 내로라하는 정치지도자란 사람들이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검찰과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벌써 영창에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끗발이 좋긴 좋다. 문제는 사건이 존재하는데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묵언수행(默言修行)하듯이 회피하거나 아니면 동문서답을 하면서 딴전을 부리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핍박을 받는 사람 행세를 하면서 모든 잘못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양 호도하고 있다. 자신은 떳떳한데 다름 사람들이 죄를 덮어씌우려 하고 있다는 듯이 동네방네 언론사마다 쫓아다니며 빈 수레처럼 요란을 떨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 현직 정당대표들이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검찰과 경찰의 소환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국민적 스트레스다. 본인들은 마치 핍박을 받고 있는 것처럼 출두를 하느니 마느니 하면서 무슨 전쟁을 치를 듯이 요란을 떨고 있지만 이는 요란을 떨 일이 아니다.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떳떳하게 조사에 임하고 결백을 밝히면 된다. 대한민국에는 엄연히 법이 존재한다. 법대로 하면 된다. 밖에서 매화타령만 해서는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 공권력이 할 일이 없어 죄도 없는 사람을 오라 가라 할 것인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비정상이 정상인양 돌아간다면 그것은 큰일이다. 이런저런 일로 벌써 사람이 한두 명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왜 멀쩡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겠는가를 남아 있는 사람들이 답을 해야 한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다면 이는 앞서 말한 소시오패스의 전형이다. 잘못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교묘한 거짓말로 본질을 호도하려는 행태를 보인다면 이 역시도 소시오패스다. 지금 국민들은 정치권에서 보여주는 정치지도자들의 행태가 정신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정치적 탄압인지를 지켜보고 있다.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본질을 호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국민을 기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치적 이념이나 좌경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은 팩트를 갖고 정론직필을 생명으로 삼아야 한다. 조작적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비언론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을 속이는 언론은 이미 언론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언론도 소시오패스 언론에 다름 아니다. 언론과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면에서 무엇인지 늘 1인치가 빈 채 돌아가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볼라치면 인성교육이나 준법교육이 다시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작금의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지도자들의 형사사건 문제는 앞으로 소시오패스를 보게 되는지 아니면 탄압받는 모습을 보게 되는지 둘 중의 하나는 분명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은 말들과 행동거지로 진실게임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는 옛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구나하는 깨달음도 분명 던져줄 것이다. 국민들은 그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202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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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사각지대와 사후약방문
생활고와 투병에 지쳐 수원의 세 모녀가 세상을 등졌다. 60대와 40대 모녀들이다. 암과 희귀병, 그리고 생활고에 복지서비스는커녕 세상에 그 흔한 도움의 손길도 없었다. 유서를 남기고 절망 속에서 세상을 마감하는 그 고통의 순간이 참으로 참담하고 눈물겹다. 세계 무역대국 9위, 10위권 경제대국을 자랑하는 이른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오늘날의 모습이다. “아프리카를 돕자! 필리핀을 돕자!”하면서 방송에는 연일 비참한 외국아이들의 모습이 화면을 통해 등장한다. 이들을 향한 사랑이 정작 내 나라 내 이웃에는 왜 미치지 못하는 가를 생각할 때 무엇인가 모순덩어리를 보는 듯하다. 복지사각지대에서 암울한 삶을 살아가는 위기가정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동안 이런 유사한 비극적 사건이 한 번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복지사각지대를 발굴해 지원한다며 난리를 피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모두가 그렇다. 그동안 무엇을 하다가 뒤늦게 호들갑인지 묻고 싶다. 사후약방문 행정과 뒷북행정에 복지 분야를 따라갈 분야가 없는 것 같다. 복지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복지행정은 있으나 체감복지는 탁상에만 있을 뿐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4일 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단전, 단수, 건강보험료나 장기 체납, 금융 연체 등 34종의 위기정보가 입수된 이들 숫자는 약 544만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복지부가 선별한 위기가구 발굴 우선순위 명단은 12만3,000명,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활용하는 인원이 8만2,000명이다. 정부는 수원 세 모녀 사망 사건을 계기로 거주지가 불분명한 위기가구를 실종자에 준해 소재를 파악하기로 했다. 경찰이 아동, 치매 노인, 정신장애인 등을 법적 근거에 의해 소재를 파악하는 것처럼 위기가구도 관련 법적 근거를 마련할 방침이다. '복지 사각지대 발굴 관련 전문가 간담회'를 열고 현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해 전문가 의견도 청취했다.
이미 각 기초지자체 중 95.2%는 복지 사각지대 발굴을 위해 '찾아가는 보건복지팀'을 설치했다. 그러나 인력은 지난해 연말 기준으로 54%만 충원된 상황이다. 그나마 코로나19 위기가 발생하면서 찾아가는 보건복지팀에 배치됐던 간호 인력이 코로나19 대응 업무 쪽에서 많이 배치돼 있다. 정부는 복지전문가 간담회의견을 토대로 행정안전부, 경찰청,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 협업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 발굴·지원 개선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한다. 하지만 탁상행정에 그치고 임시방편에 그친다면 비극의 악순환은 거듭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수원 세 모녀 사건은 8년 전인 지난 2014년도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단독주택 지하에 세 들어 살던 세 모녀 자살사건과 너무나 유사하다. 당시 세 모녀는 60세와 30대 모녀 일가족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건이다. “정말 죄송합니다.”란 메모를 남겼다. 큰딸의 만성질환과 실직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번 사건도 어쩌면 이렇게 유사한 사건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당시에도 복지사각지대를 발굴해 돕는다며 난리를 피웠다. 요란한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리고 마치 복지사각지대를 단숨에 없애버릴 것 같은 전시행정이 펼쳐졌다. 지난 2015년에는 실직한 가장이 서초동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후 도주하다 체포된 충격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상대적 빈곤이 불러온 비극적인 사건이다.
우리 사회에는 잠재되어 있는 위기가정이 너무나 많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늘 복지정책의 보호벽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위기가정들은 수원 세 모녀나 송파 세 모녀사건처럼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실 빚으로 사는 가정들이 너무나 많다. 불안정한 직장도 마찬가지다.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직장에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가장들의 고통이 곳곳에서 목도된다. 겉으로만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있지만 톡 건들면 터질 것 같은 가정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풍요로울 것 같은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미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구조로 향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해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다. 기본적인 경제력을 갖지 못한 계층들은 늘 불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한때 잘 나가던 사람들도 그런 세상이다.
여기에다 시골이나 중소도시, 대도시 할 것 없이 외국인 근로자들이 판을 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일자리를 남의 나라 사람들이 와서 차고 앉아 있으니 그만큼 우리 국민들은 힘들 수밖에 없다. 이른바 3D업종이라고 해서 기피업종이라고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일을 기피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런 기형적인 일자리 구조가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와 경제는 불균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불안한 사회와 불안정한 경제상황이 소외계층과 취약계층을 양산하고 위기가정으로 내몰고 있다.
심지어 행정안전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해 대한민국의 1인 세대가 946만1,695가구로 급증해 전체 주민등록인구의 40%를 넘어서고 있다. 1,000만가구가 나 홀로 사는 가구이다. 특히 70대가 가장 많다. 불안정한 가구형태가 아닐 수 없다. 질병에서부터 정신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상성을 벗어나고 있다. 물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약칭 기초생활보장법)이 가장 획기적으로 변화된 계기는 송파 세 모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세 모녀 법으로 불리는 개정법이 제정 시행되어 왔다. 그런데도 이런 유사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허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기초생활수급자 위주의 정책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재난지원금을 줄때도 그래왔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위기가정들이 이를 넘보지도 못했다.
정부가 수원 세 모녀 사건을 계기로 복지 사각지대 발굴·지원 체계 전반을 점검하고 사회보장정보시스템에 수급 이력 없는 주거지 미상 위기가구도 유관기관과의 정보연계 등을 통해 끝까지 찾아내어 지원토록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허겁지겁 이것저것 처방전을 내놓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들해져 온 것이 지난 과거의 복지행태이다. 사후약방문이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국민들은 지금 세 모녀의 비극에 고통의 눈물을 짓고 있다. 1인 가구를 포함해 유사한 상황을 겪고 있는 가정들도 더더욱 그렇다. 모든 정책과 행정이 구호에만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세 모녀를 추모하기 위해 빈소에 시민과 정계인사 등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지만 뒤늦은 관심과 추모는 뭔가 개운치 못한 여운을 남겼다. 국민들이 이런 고통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도 정치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눈만 뜨면 권력 다툼과 갈등, 대립에 혈안이 되어 있다. 나아가 불법과 탈법, 비리로 이전투구를 일삼고 있다. 등 가려운데 발바닥을 긁고 있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송파 세 모녀 사건에 이어 8년 만에 다시 발생한 수원 세 모녀 사건은 우리 사회의 모진 환경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법이 없거나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주체들이 국민을 위한 진정한 눈물과 헌신적 봉사자세가 결여된 때문이다. 곳곳에 복지단체가 즐비하고 복지재단이 들어서 있다. 복지관 등에는 지원 예산과 후원이 넘치는데도 빈익빈부익부 복지로 고통 받는 국민들이 위기 속에서 세상을 등지는 비극이 잇따르고 있다. 전면적인 대수술이 시급하다. 복지재단을 없애고 복지관도 정리하고 복지체계를 전면 개편해 복지예산이 실제 어려운 이웃,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예산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복지예산이다. 올해 복지예산은 교육과 고용분야를 포함해 무려 200조가 넘는다. 하지만 100원을 주면 90원은 인건비 등 각종비용으로 중간에서 없어지고 마지막에는 10원만 돌아가는 복지정책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 복지 분야의 정리정돈 없이는 진정한 복지정책이 위기가정에 제대로 투영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복지시스템은 곧 직거래장터와 같은 실질적인 복지직거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송파에 이은 수원 세 모녀사건이 뼈아픈 교훈으로 던져주고 있다. 말로만 복지사각지대근절이란 사후약방문격인 탁상복지행정은 이젠 그만 멈춰야 할 때다.
202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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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과 윤리의식
대한민국의 공직자들은 국민 앞에 나서면 기본적으로 윤리강령을 준수하도록 되어 있다. 공무원은 물론 법관, 기자, 정당인 등에 이르기까지 윤리강령을 준수하도록 명시하여 이를 윤리의식과 도덕적 기준을 삼고 있다. 이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청렴한 공직사회 풍토를 조성하여 국민을 위해 막중한 책임과 사명감을 갖고 바르게 일하라고 하는 지침서에 다름 아니다. 기자들도 취재활동으로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고 공인으로서 윤리, 도덕적 규범에 벗어난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윤리강령이 있다. 입법과 사법, 행정 등 그 어느 부처에서도 윤리강령은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청렴하고 올바른 공직자상을 정립하여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공인이자 선출직 공무원, 국회의원, 정당인 등 모두가 대상이다. 높은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강조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패하고 타락한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다. 그래서 부정부패하고 시정잡배와 같은 그릇된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갖은 인물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퇴출되어야 마땅하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한마디로 가관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아마추어 정치인들이 무슨 개그대회를 열었나 싶을 정도로 수준이하의 상황극을 연출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들어섰지만 정치만은 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방죽을 흐리게 한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여당의 전임 대표라는 젊은 정치인이 보여주는 작태는 한마디로 목불인견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자는 이야기인지 알다가 모를 지경이다. 이곳저곳 온갖 신문방송을 찾아다니며 갖은 변명과 험담, 궤변으로 연일 쌈판을 벌이고 있다. 자기주장만 늘어놓고 국민들이 궁금해 하는 성상납의혹 등을 질문하면 대부분 딴전을 피우고 있다. 윤리적이고 본질적인 물음에는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하면서 대통령을 포함하여 자기 당의 반대세력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몰아세우고 있다. 그것도 지나간 일들을 늘어놓으며 새 정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형국이다. 과연 이런 정치인이 그리는 대한민국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교도소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은 이 인물에게 성상납을 했다는지 접대를 했었다느니 하면서 폭로전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도 동문서답이나 하며 좌충우돌하면서 가처분 신청과 본안소송을 내며 마치 정의로운 사람인양 국민을 향해 온갖 교언영색을 쏟아놓고 있다. 추잡한 싸움과 언행에 국민들은 이미 식상해 있다. 지금까지 이런 정치풍토는 없었다. 정치인의 이중성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지적이 거세다. 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작당 정치인들은 하루속히 정치판에서 퇴출되어야 한다. 자칫 국민 불행의 단초가 되고 대한민국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당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법카문제, 대장동문제, 변호사비 대납문제 등 온갖 불법 비리 사건이 눈만 뜨면 속보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것은 공소시효가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데도 아직도 ‘수사 중’이다. 일반 서민 같았으면 벌써 교도소에 들어앉아 있을 사안인데도 그렇다. 권력자들에게는 약한 법인지 아니면 철저한 수사를 위해 신중한 처리절차를 밟고 있다는 이야기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를 둘러싼 수사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정국은 또 한 차례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것은 명약관화하다. 문제는 불법과 비리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공권력이 나서서 올가미를 씌우고 있느냐는 점이다.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느냐’는 말이 있다. 이것저것 드러나는 것은 보면 단순사안은 분명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주변 인물들은 이미 감옥에 들어앉아 있거나 해외로 나갔다. 상황논리로 보아도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일부는 세상을 떴다. 어쩌다가 대한민국 정치판이 이 모양 이 꼴로 본질을 벗어나 추한 문제로 소모적인 나날을 보내야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기 그지없다. 정치혐오증만 날로 심해지고 있다.
지난 19일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에 대한 전격 압수수색이 벌어졌다. 월성원전 조기폐쇄문제와 탈북어민 강제북송의혹 등과 관련해서 전 정권의 청와대의 의사결정과정을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분명 무엇인가 문제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30년 이후에나 들여다볼 수 있다는 문건을 고등법원의 영장을 받아 전격 압수수색하는 것을 보면 결코 단순치 않은 사안임이 분명하다. 범법과 불법사실이 있다면 법대로 처리하면 된다. 정치탄압이니 뭐니 하면서 허튼 수작을 부리는 세력들이 존재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에서 적폐 척결대상 1호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보고 시점 조작혐의와 관련 전 정권의 비서실장 등 3명이 대법원의 무죄취지파기 환송, 무죄확정의 판결을 받았다. 이는 적폐몰이에 억울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법 앞에는 모든 국민이 평등하다. 권력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무죄인데도 오랫동안 고통을 받는 억울한 희생양을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불법행위자들을 눈감아주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특히 권력자들은 가중 처벌해야 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옥고를 치렀거나 치르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말이다. 법 앞에는 예외가 없다. 법대로 하면 된다. 윤리강령은커녕 인권을 유린하고 잔혹한 범죄행위까지 저질렀다면 이에 상응한 법적 처벌을 그 누구도 받아야 한다.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누가 범법자들인지를 말이다.
이런 저간의 문제는 공인의 윤리의식이나 도덕불감증에서 비롯된다. 국민을 무서워하고 국민을 위해 청렴하게 봉사 헌신하고자 하는 의식이 결여된 때문이다. 권력자로서 국민위에 군림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세월을 보낸 탓이다. 국민을 한순간 속일 수 있지만 준엄한 역사는 결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한 모습들은 자라나는 후대들이 보고 배워서는 안 되는 일들이다. 기성세대들의 자성과 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청년정치를 부르짖으며 나선 설익은 인물들의 추태 또한 ‘아니올시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치권의 추태는 공인의 윤리의식과 도덕불감증, 탐욕과 교만이 불러오는 술수정치의 산물로 척결되어야 할 적폐 중에 적폐임이 분명하다. 올바르지 못한 정신과 그릇된 윤리의식으로 이중성을 보이는 공인들의 각성은 당연하다. 나아가 이런 인물들은 하루속히 국민 앞에서 사라지길 촉구한다.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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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
115년 만에 중부지방 일대에 기록적 폭우가 쏟아지면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수도권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7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도로와 지하철이 침수되고 산사태가 발생해 재산피해도 컸다. 서울 강남일대는 물바다를 이뤘다. 참으로 황당한 사태를 빚었다. 강남역을 중심으로 용량을 감당하지 못하는 배수시설로 인해 물이 빠지지 않고 역류를 하다 보니 도로가 물바다를 이룬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중국이나 일본의 집중호우에 대한 피해가 남의 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들렸지만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한마디로 물 폭탄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강원도 쪽에서도 커다란 돌덩어리가 마치 종이배처럼 급류에 흘러갈 정도였다. 반지하나 맨홀에서 황당한 사망사고가 발생해 안타까움도 더했다. 강남에는 시간 당 140밀리의 비가 쏟아졌다. 홍수피해가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과 청주, 군산까지 물난리를 겪었다. 이제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확인했다. 준비를 미리 해 두면 근심걱정이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인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자세가 없다면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집중호우에 물바다를 이룬 강남 침수원인에는 빗물터널이 6개에서 1개로 축소되고 빗물펌프장도 집값이 떨어진다며 유야무야됨에 따라 기반을 다져놓지 못한 때문으로 드러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비무환을 생각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한 것에 다름 아니다. 행정기관이나 주민들 모두가 이처럼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채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2011년에도 똑같은 침수가 있었는데 알면서도 피해를 당한 것이다. 강남역 일대는 상습적인 침수구역으로 지목되고 있는데도 개선은커녕 속수무책으로 침수피해를 당했다. 이런 물난리는 근본적으로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는 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한다. 주택 상가 침수피해만도 3,819채로 집계되고 차량도 6,000여대가 침수됐다. 피해자들은 그야말로 망연자실이다. 집중호우는 수도권에 집중되긴 했지만 강원도 충북일대에도 수마를 남겼다. 홍수에 대비하는 자세가 자칫 요식행위에 그친 채 안일하게 대처해 온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서울의 강남이 10년의 허송세월을 한 것을 보면 안전의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안전대책예산을 무책임하게 잘라 다른 곳으로 전용하는 우를 범해 왔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일본과 중국에서 물난리를 겪고 심지어 베트남 하노이도 36년 만에 최대 강우량을 기록하며 물난리를 겪었다. 필리핀 세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보면 동남아시아 전 지역에서 위아래를 오가면서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번 서울과 수도권 등 중부지방에 내린 기록적인 폭우는 앞으로 유사한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고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다 8호 태풍까지 일본을 향하고 있다. 또다시 집중호우가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우려되는 것은 기록적인 물 폭탄으로 약해진 지반으로 인해 다시 폭우가 쏟아질 경우 연쇄적인 산사태나 붕괴우려가 높다는 점이다. 취약지역을 다시 점검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 방심을 하거나 만심을 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점을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기록적인 집중호우는 이런 점에서 유비무환 자세의 중요성과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202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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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 모두가 유난히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지쳤다. 하지만 자연의 순리는 어김없이 여름은 보내고 있다. 올 여름은 코로나마저 다시 극성을 부려 자유로움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그래도 예전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거리낌 없이 환담을 하고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들이 마치 코로나가 종식된 듯 느껴지는 요즘이다. 마스크는 습관처럼 쓰고 다니지만 코로나를 잊은 듯하다. 아무튼 엄청난 변화의 시대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되찾기 위해 모두가 안간힘을 다하는 듯하다. 여름휴가도 예전처럼 이어지고 있고 모든 것들이 일상을 되찾아 가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는 물가폭등이란 상처를 남기고 있다. 마음 졸이게 하던 태풍도 일본 쪽을 강타해 많은 피해를 낳았지만 우리나라는 무더위를 식히면서 비켜가고 단비만 내리고 갔으니 참 다행이다. 이제 풍요로운 가을을 맞을 마음만 준비하면 된다.
가을을 향한 마음은 추석과 같이 한다. 다음달 10일이 추석이니까 참 빠른 것 같다. 8월이란 달이 빠르게 지나가는 듯하다. 올해는 지방선거와 대선이란 큰 선거를 치렀다. 정권이 교체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8월이 빠른 것이 아니라 세월이 빠르게 지나고 있다. 자치단체장들이 대거 교체되고 대통령도 교체되어 중앙이나 지방정부도 많은 변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가을 향한 풍요로운 마음 같은 여유가 보이질 않는다. 물가는 폭등하고 부동산은 휘청거리고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지고 있으니 입추를 맞는 마음이 어둡기만 하다. 무엇인가 역동적이고 활기찬 사회상을 기대하고 인내하고 살아왔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으니 답답한 심경이 아닐 수 없다. 서민들의 삶이 그렇다. ’투잡‘, ’쓰리잡‘을 해야 먹고 살수 있다는 하소연이 예사롭지 않은 경제상황을 엿보게 한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무슨 일이 나는 것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IMF의 악몽이 떠오른다는 주변의 말들이 단순하게 들리지 않은 이유이다.
이런 나라꼴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정치는 늘 밥그릇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집권여당이라는 정당의 꼴을 보면 마치 삼류영화를 보는 듯하다. 퇴출수순을 밟고 있지만 대표라는 작자는 갖은 몽니와 투정을 부리며 노상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다. 무슨 성상납 의혹이니 증거인멸이니 하면서 추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아예 이런 것들은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듯이 행동을 하고 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윤리위가 징계를 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경찰이 수사를 하고 있다는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윤리에는 공소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못 궁금하다. 대표라는 인물이 이럴 진데 집권정당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었겠는가는 불문가지이다. 정치세력을 키우기에만 골몰하고 대통령과 맞장 뜨려는 식의 언행을 일삼고 있으니 인성과 품성을 곱게 볼 수만은 없다는 여론이다. 눈만 뜨면 총질만 해대고 있다. 언론은 이를 침소봉대하고 있으니 삼류영화는 끝날 줄 모르고 있다. 비정상의 연속이다.
독일 시인 안톤 슈낙이 1941년 펴낸 젊은 날의 전설에 실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산문이 작금의 우리 주변상황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경기도 이천병원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5명의 환자와 간호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무더운 여름날 참으로 불행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고다. 경기도 이천에는 물류창고 화재 사건 등 화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참으로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다. 해마다 대형 화재사고로 인명피해가 끊이질 않고 있으니 경기도 이천지역에는 별도로 보다 철저한 화재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을 듯싶다. 이를 통해 유비무환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인해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경기도 이천지역의 그동안의 화재참상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힘든 삶을 살아갈 때에는 희망을 주는 그런 인물이 절실하다. 과거에 IMF 경제위기 시절에는 골프선수 박세리가 있었고 메이커 리그의 박찬호, 류현진이 있었고 최근에는 유럽축구의 손홍민이 있다. 2002년에는 월드컵 4강신화의 감동이 있었다. 이런 드라마 같은 감동적인 순간들이 국민들에게 청량제가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특히 정치에 관한한 추악한 모습들만 연속되고 있다. 늘 싸움판이다. 특히 야당의 내로라하는 국회의원의 과거 행적을 둘러싼 의혹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도 아직도 ’수사 중‘이다.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벌써 수 십 번은 교도소에 갈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감동은커녕 거짓말 퍼레이드를 보고 있다. 과연 법대로 할 것인지 아니면 두루뭉술 끝날 것인지 국민들은 감동 없는 수사드라마를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까운 목숨들이 4명이나 사라졌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관련 당사자들이란 점에서 그렇다. 참으로 비극이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코로나사태와 경제난, 고물가, 고금리, 저출산고령화, 취업난에 무더위까지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이 여름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여기에다 교육개혁이니 뭐니 해서 평지풍파도 일으켰다. 심지어 공무원인력감축이란 명분을 내세워 기존 공무원들의 업무상황이 힘겹게 되어버렸다. 시험을 분비하던 공시생들도 한마디로 뻥 쪄버렸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의 개혁은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일선 말단 공무원들의 현업현장을 가보라. 지금의 상황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음을 여실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순리에 의해야 한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입추를 거쳐 가을을 향하는 자연의 섭리와 순리처럼 모든 것들은 변칙과 편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로 지친 국민들도 이제 코로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와의 공존을 택하고 있다. 명심보감에도 역천자(逆天者)는 망하고 순천자(順天者)는 흥하리라 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한다는 말이다. 정치가 됐건 경제가 됐건 모든 것이 순리에 어긋나면 탈이 나게 된다. 법이 있으면 법대로 하면 된다. 권력자이든 일반 국민이든 법은 똑같이 적용된다. 법을 어긴 권력자는 단호한 심판이 뒤따라야 된다. 지금 검찰과 경찰이 수사 중인 사건을 보면 정치권력의 불법행위로 인한 폐해가 엄청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입추를 지나 가을로 향하는 길목에 서서 국민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해소해야 한다. 나라꼴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한 시점이다.
2022-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