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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해를 마감하며
2019년이 이제 저물어 가고 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2019년이다. 우리는 한해를 마감하며 참으로 많은 회한을 가슴에 남기고 있다. 2019년 기해년 황금돼지 해라고 풍요와 풍성함을 소망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를 넘기는 시점에 서 있다. 세월이 유수 같다고 하던 옛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해마다 이맘 때 쯤 이면 늘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낸다는 말을 하게 된다. 회고하건데 2019년처럼 다사다난했던 때가 있을 까 싶다. 나라는 줄곧 전쟁과 평화의 사다리타기를 해 왔다. 평화의 한반도를 말하던 꿈같던 시간이 금방 지나고 수도 없이 쏘아대던 불상의 로켓들이 평화의 꿈을 앗아가 버렸다. 지금도 북미대화가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으르렁대는 모습이 마치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흐르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금강산 시설물을 금방이라도 때려 부술 듯이 요란을 떠는 모습에서도 평화를 향한 길이 멀기만 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평화는 결코 구걸이 아님을 깨닫는 마음이 아쉬운 시점이다.
무엇보다 경제난은 국민들을 옥죄는 아픔이었다. 자영업자들이 쓰러지고 길거리에는 청년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온 가족이 집단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12월까지도 이어졌다. 심지어 지난 7월 숨진 지 두 달이 지나 발견된 탈북민모자사망사건은 우리 사회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복지사각지대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뒤늦게 법안을 발의하느니 뭐니 호들갑을 떨다가 이제는 시들해져 버렸다. 일가족 집단자살은 올 들어 계속되어 왔다, 사회안전망이 구멍이 뚫려도 뻥둟려 있음을 보게 된다. 송파 3모녀 자살사건이 충격을 주면서 무엇인가 달라지나 싶었는데도 올해 계속되는 일가족 자살사건이 대한민국 사회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복지정책은 어디로 갔는지 참으로 고통의 사회이자 비극의 현주소이다. 심지어 유명 정치인과 유명연예인들의 자살마저 잇따라 안타까움을 더해주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구에서 일가족 4명이 생활고로 추정되는 집단자살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이어지는 집단 자살사건이 올 들어 서울, 화성, 시흥, 김포, 대전, 인천, 충북단양, 대구 등 모두 32번째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19년의 일가족 자살일지를 들춰보면 우리 사회가 지금 어느 정도로 망가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길거리에는 노숙자들이 넘쳐나고 심지어 청년들조차 무료급식소를 찾아 이른 새벽부터 나서고 있다는 소식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소득주도성장이 무엇인지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내년이 더욱 걱정이라고 한다. 생계형 가족들의 집단자살이 풍요로운 말장난을 비웃듯이 다반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경각심을 던져주는 대목이다.
무엇이 우리 사회 우리 국민들을 이처럼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는지를 냉철히 파악해야 한다. 이처럼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일가족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무엇 때문인지를 헤아리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이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어느 누구 책임을 통감하는 정치인들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 아픔을 같이 나누고자 하는 눈물이 보이질 않는다. 오로지 권력욕과 국회의원 자리에만 탐닉하는 정치권의 모습만 보인다.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정치를 하고 국회의원을 하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국민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목숨을 끊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나라마저 등지고 떠나는 이민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에 법마저 이현령비현령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비난도 거세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교묘한 말장난으로 형평성을 저버리는 이상야릇한 일들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서민들은 교통법규 하나면 어겨도 10만원에 가까운 생돈을 물어대고 있는 판국인데도 위법이 드러나도 힘이 있는 자들에게는 솜방망이를 휘둘러 대니 이게 과연 올바른 사법정의를 구현하는 나라인지를 의심케 하고 있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이현령비현령의 법 적용을 해왔는지를 국민들은 묻고 있다. 법관의 양심과 법대로 해야 할 일들이 정의롭지 못하고 ‘가래 끓른 소리’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스스로 통찰해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다. 이제는 사법 불신까지 팽배해지고 있다. 이런 2019년을 보내왔다.
올해 우리 국민들은 비정상이 판을 치는 정치판을 목도했다. 국민을 앞세우며 대립과 반목을 부축이고 각종 부정부패의 연쇄 고리들이 구석구석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것을 체감했다. 아직도 썩은 부패의 고리를 감추고 분칠을 하며 양두구육의 모습으로 버젓이 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요즘 일본에서도 수뢰혐의를 받는 의원이 체포되고 그 일련의 비리과정을 속보로 전하면서 대서특필하고 있다. 부패정치인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사회악임이 틀림이 없다. 법을 어기면서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언제나 들통이 나면 그 이상 개망신을 당한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부패한 정치인들의 연결고리가 다 파헤쳐지지 않고 내년으로 넘어갈 공산이 크다. 2019년의 부패 수사는 종료가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19년 한해를 마감하며 느끼는 것은 올 한 해 국민들의 고통지수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다. 광화문에서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 정치구호를 외쳐댔고 서초동 거리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집회 모습도 보았다. 아침이 무서운 자영업자들은 삶이 너무나 버거웠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데도 적자에 허덕이며 눈물로 폐업을 해야 했다. 국민 불신의 단초를 제공하는 일부 언론들은 불의에 침묵하고 외면하고 호도하고 정치권력에 아부를 하며 정치시녀임을 자임해 왔다. 역대 이런 언론 시대는 없었다. 언론이 정치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국민들에게 올바른 지향점을 제시해야 하는데도 정도언론의 길을 망각하며 아직도 매화타령만을 일삼고 있다. 이런 2019년의 언론의 모습도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을 국민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019년의 대한민국은 평화를 외치면서도 늑대소년이 되고 소득주도성장을 외치면서도 생계형집단자살이 잇따르고 사법정의가 무너져 내리고 부패정치인들이 활보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치졸한 언론행태가 판을 치고 경제가 추동력을 상실하고 저출산고령사회의 기형적 사회구조가 나라의 근간을 흔들어 왔다. 뭔가 나사가 빠진 형국이다. 곡예를 하는 나라처럼 보인다. 올해 대한민국은 나라 안팎으로 브랜드가치를 스스로 추락시킨 역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담한 한 해였음을 회고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씁쓸한 한해로 모두가 뼈아픈 자성의 해로 삼았으면 한다. 해왕성 밖에서 보이저 2호가 보내온 사진에 창백하고 푸른 점인 지구 속 대한민국의 2019년은 모두가 참으로 힘든 한해였다. 부디 2020년은 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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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바로 세우는 길
▲ © 세종타임즈
선거법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지만 내년 총선을 향한 경주가 막이 올랐다. 지난 17일부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면서 현수막이 내걸리며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선거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생소한 사람들이 지역의 새로운 일꾼이 되겠다며 나서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국회에서는 연동형비례대표제라는 것을 놓고 정당 간에 동상이몽의 셈법을 헤아리고 있는 것도 국민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으로 비춰지고 있음도 숨길 수 없는 요즘의 모습이다. 총선이 내년 4월 15일로 12월이 지나면 사실상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데도 갖은 머리를 다 쓰며 오로지 향후 권력쟁탈을 위한 계산만 하고 있으니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는 권력을 위한 정치가 되어버렸다는 자조 섞인 푸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우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부터 제대로 갖추고 나와야 한다. 선거 때마다 화려한 정치공약으로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꼼수를 다 동원하지만 선거 이후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표변하는 모습이 정치인들의 풍속도라는 조롱도 받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회의 기능이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2020년도 예산안 처리도 한마디로 주먹구구식으로 졸속처리하여 어영부영 지나고 있다. 나라의 엄청난 예산을 심의 의결하는 처리 절차가 국민들에게 투명하지 못하게 처리될 정도로 엉뚱한 일에만 골몰하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다는 지적이 팽배하다. 선거법이니 공수처법이니 뭐니 하면서 세월만 죽이는 정치를 하니 가득이나 어려운 국민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다. 광화문과 청와대 앞에서는 집회가 끊이질 않고 있다. 과거 울산시장 선거와 관련 청와대의 선거개입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되어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뒤늦게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늘 그렇듯이 그 연결고리가 교묘하기 때문이다. 검찰의 수사로 그 전모가 밝혀지길 바라지만 국민들은 벌써부터 그 썩은 냄새를 감지하고 있다.
예비후보 등록을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유권자들에게 당당할 정도로 자기관리를 잘하고 나온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 선거철마다 각 정당들은 마치 흠결이 없고 도덕적인 인물들을 선정하여 공천을 주는 듯 해 왔지만 실상은 그렇게 커다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함량미달인 자들이 교묘하게 포장되어 국회를 향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멸시당하는 사태까지 빚고 있다.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자들이 바로 국회의원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이 거세다. 지금 여의도의 국회가 바로 이런 국민실망의 진원지가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검증을 받고 선택받은 자들의 행보가 이러할진대 국민들이 과연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보낼 수 있다고 보는지 불문가지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볼 수 없는 위험천만한 의식구조와 이념 철학을 가진 자들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있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지 국민들의 허탈감과 상실감이 매우 큰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국회는 선거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물선정에서부터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일꾼의 자세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만과 오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4년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표만 얻으면 된다는 식의 인물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참으로 추하다. 지금 같은 나라 형국이라면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 할 지경이다. 그만큼 책임이 무겁다는 것이다. 국민대립과 반목을 조장하는 정치 갖고는 대한민국의 올바른 미래가 열릴 수 없다. 연동형비례대표제에 목숨을 걸듯이 나서는 정당들의 모습도 추하긴 마찬가지이다. 300명 국회의원 정원을 슬그머니 그 숫자를 늘리고 싶어 안달을 하지만 국민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도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은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차제에 국회의원들을 무보수 명예직으로 바꿔버리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9명이나 되는 보좌관들도 모두 없애면 국민혈세도 줄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갖고 있는 특권도 모조리 없애는 혁신이 선거법과 함께 나온다면 이것이야 말로 국민을 위한 국회로 환골탈태하는 진정한 모습이 될 것이다.
내년 21대 총선의 선거전이 사실상 막이 올랐지만 선거법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만약 선거법이 이렇게 지지부진할 바에는 개정하지 말고 종전의 법을 그대로 적용해 선거를 치르는 것이 더 낫다. 코앞에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도 당리당략에만 눈이 어두워 제 갈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국민들만 안타까울 뿐이다. 정치를 하자는 것인지 하지 말자는 것인지 마치 이판사판으로 사사건건 부딪히는 대한민국의 정당정치 행태를 보면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를 하는 국가인지 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 팽배하다. 모두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깜깜이 선거’도 선거지만 예비후보를 등록하고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조차 머쓱해 보이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대한민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내년 총선은 참으로 중요한 선거이다. 난마처럼 얽힌 대한민국의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고 치유해야 하는 거대한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 불신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양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헝클어진 대한민국 사회를 바로 잡고 상처받은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길은 훌륭한 새 인물들이 국회에 많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같은 인물들로서는 이 난국을 돌파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대폭적인 물갈이로 진부한 정치꾼들을 퇴출시켜 국회의 자정능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 밥에 그 나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맡은바 소임을 묵묵히 다해 나가는 훌륭한 인물들을 발굴하여 국민들을 위한 진정한 국회의원들로 세워야 한다. 정치선진국인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유럽 국회의원들의 무보수 명예직의 유럽의 국회의원들의 성실한 자세를 타산지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들처럼 인생의 마지막 삶을 이웃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은 참된 인물들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많이 나서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나라를 바로 잡고 국회다운 국회를 만드는 길이다. 내년 선거는 국민심판의 선거이자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역사적인 선거가 될 것이다. 국민들도 부정부패의 비리정치인이나 선동적인 정치판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묻지 마 투표’, ‘묻지 마 선거’의 부끄러운 자세를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불행은 국민 스스로가 자초하게 될 것이다. 총선을 통하여 국민들의 손으로 만신창이 된 국회를 바로 세워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올바른 민주의식과 자정능력을 되찾을 시점이다.
201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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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가 없는 세상을 누가 감히 말하는가?
▲ © 세종타임즈
국제투명성기구(TI: Transparency International)는 지난 1995년부터 매년 각 국가별로 공무원과 정치인의 부패정도에 대한 기업인 및 애널리스트들의 인식정도를 국가별로 지수화하여 발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부패인식지수를 발표하는 것인데 국가 사회 및 특정 기관의 부패정도에 대한 관련자들의 인식을 지수화한 것으로 주로 공공부분의 부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를 통하여 대한민국사회를 청렴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데 매우 큰 의미가 주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바닥을 걷고 있다. 올해 1월에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TI, Transparency International)에서는 2018년도 각 국가별 부패지수기준이라 할 수 있는 부패인식지수 2018(2018 Corruption perception Index)이 발표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부패인식지수(CPI)는 100점 만점 중 57점으로 조사대상 180개국 중 45위이다. 이전보다 6계단 상승했으나 30위 이하로 기준되는 부패지수 국가로 여전히 부패한 국가로 분류됐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부패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부패유발의 주체도 대부분 정치인들로 지목하고 있다.
그동안의 부패지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첫해인 1995년 조사대상국 41개국 중 27위를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1996년 54개국 중 27위, 1997년 52개국 중 34위, 1998년 85개국 중 43위에 이어 1999년 99개국 중 50위를 차지했다. 이는 부패척결을 외치면서도 아직도 구호에 그치고 있다는 반증이다. 특히 정경유착의 지표(PRS)는 지난 2012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낮은 수준인 100점 만점에 50점에 머물고 있다. 공직사회의 부패정도가 다소 개선된 반면 정경유착의 전반적인 부패수준(PERC)은 45점에서 42점으로 점수가 오히려 내려갔다. 정치인들이 부패의 온상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니 아직도 부패공화국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의 자화상이 이렇다. 북한의 경우는 최하위에 가까운 171위였으니까 이를 쳐다보며 대견해 할지 모르지만 이를 비교한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문재인정부가 적폐를 청산한다고 하지만 실제 이는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있다. 올해 대한민국을 혼돈에 빠트린 사건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아직도 관련 정치인들이 검찰의 수사선상에서 부정부패의 썩은 고리가 들춰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니 국민들의 마음과 정신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있는지는 불문가지이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썩어있는 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더욱 가관인 것은 거짓과 위선으로 이를 포장하며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자기성찰이 보이지 않는다. ‘도덕불감증’인지 아니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인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살펴보기 힘들다. 이런 사회와 국가를 우리는 병든 사회, 병든 국가라 일컫는다. 안타깝지만 대한민국이 이런 형국으로 국민고통은 날로 배가되고 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반부패와 청렴을 부르짖는 사람의 모습에 이런 기운이 감돈다는 사실이다. 부패를 말하면서 스스로가 부패한지 모르는 양두구육의 부패운동이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은 부패하지 않은 사람인양 포장하며 뒤돌아서서는 부패의 갖은 추악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반부패, 청렴운동을 말하면서 갖은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하며 이른바 반부패장사를 일삼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러니 부패운동을 그렇게 해도 나라가 아직도 부패공화국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과거 환경운동을 한다면서 갖은 약점을 이용하여 기업체들을 괴롭히고 돈을 뜯어내는 형국과 다름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 대상층이 너무나 다양하고 선량한 참여자들이 알게 모르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우리는 반부패운동을 명목으로 상식을 벗어나는 행각을 일삼는 행위에 대하여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또 다른 부패이기 때문이다. 부패한 자들이 반부패를 외치는 황당한 사회가 대한민국의 사회이고 반부패 청렴운동이 되어서는 부패공화국을 청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부패방지조직이 부패온상이 되어 사회적 지탄과 조롱거리가 된다면 국민적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이는 환경운동을 빙자하며 기업체들에게 돈을 뜯던 무리들이나 다름이 없다. 반부패 청렴운동을 한다면서 사리사욕을 취하는 무리들이 존재한다면 이는 과감히 척결해야 할 심각한 적폐이자 사회적 해악이다.
반부패 척결에는 너와 내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대상이며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거짓과 사기는 안 되는 것이다. 오로지 정의와 진실만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반부패청렴운동이다. 김영란법을 만들어 청렴사회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검찰조직에까지 반부패전담부서가 생겼다. 일시적인 외침이나 구호만으로는 청렴사회를 이루기가 어렵다. 어릴 때부터 청렴교육을 생활화하고 표리부동하지 않은 심성을 가꾸어나가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반부패를 외치는 사람이 썩어 있거나 청렴을 내세우는 사람이 추악한 모습을 감추고 있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며 국민사기극에 다름이 아니다. 좋은 게 좋다고 불의와 허상에 타협하며 협잡을 하면 이 또한 공동정범이다.
차제에 국민권익위원회는 산하 부패방지관련 단체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여 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를 점검하기를 바란다. 이들 조직에 대한 투명성과 반부패성을 오히려 살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재원마련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 재원들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이들의 세입세출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있는지를 분명히 살펴야 한다. 기존에도 많은 추한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아직도 세간에 비난을 받고 있는 사례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도감독을 소홀히 하거나 조직운영전반에 대한 감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직무유기이며 향후 심각한 사태에 직면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반부패 청렴운동은 누구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모두가 깊이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는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애국애민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거짓과 사기, 불의와 퇴행, 교만과 협잡, 부정부패의 온상에서 탈피하여 진실과 선행, 정의와 겸손, 그리고 청렴한 마음가짐을 다시금 재정립하며 자신들부터 되돌아보아야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 그래야 대한민국 반부패정신과 청렴의 정신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는 말이 있다. 우리말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모든 말은 바로 나부터 먼저 깨끗하고 나서야 남을 탓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하물며 성경에는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하였다. 반부패에 대한 강력한 경종이다. 일그러진 모습으로 반부패를 외치는 추한 모습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지향점이 아니며 죄악임이 분명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국회가 민주절차를 포장하는 정당들의 야합으로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을 국민들이 잘했다고 박수를 칠 리가 없다. 제대로 심의가 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 피해자는 국민이다. 민주주의가 부패하고 퇴행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국민을 위하여 일한다고 나선 정상모리배들이 국가 중요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중요 직책을 맡아 갖은 추악한 비리와 부정부패를 일삼는 것은 한마디로 내면의 정신세계가 썩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지만 온 세상이 경멸하는 들보를 눈에 담고 다니는 격이다. 이런 자들 때문에 나라의 부패지수가 높아진 것이다. 이제 사회고위층인사에게 부여되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의미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Oblige)’를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정치인이든 기업인이든 유명연예인, 사회단체의 리더들이든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치이자 의무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2019년 세밑 지나온 잘못과 허상을 집어 던지고 환골탈태하는 자기성찰 속에서 다시금 변화해야 한다. “부패가 없는 세상을 누가 감히 말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야 보다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2020년 경자년 새해를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20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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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세밑 단상
▲ © 세종타임즈
2019년 12월이 가고 있다. 해마다 이 때쯤이면 다사다단했던 한해를 보내는 마음을 세월이라는 단어에 담아 회고하게 된다. 사건사고로 얼룩진 한해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이 기억과 역사 속으로 남겨진 채 말이다. 한해에 세웠던 계획이 잘 성취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누구나 아쉬움을 토로하게 된다. 세월(歲月)이란 단어는 흘러가는 시간을 일컫는다. "가는 세월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 세월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고 가더라" 고려 말 선비가 세월의 빠름과 나이 듦의 속절없음을 한탄하며 썼다는 시조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라는 노년의 자조 섞인 말도 인구에 회자된다.
그래서 그런지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미국 100달러 지폐 속 초상화의 주인공인 벤자민 프랭클린이 서점의 점원 시절에 한 말이다. “Time is money.(시간은 금입니다.)” 이 말은 누구나 알고 있는 명언 중에 명언이다. 하지만 금으로 시간은 사지 못한다. 시간은 그만큼 값진 것이고 우리 삶에 있어 소중하다. 멈추지 않는 시간, 돌아오지 않는 시간,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 순간 이 시간의 의미는 너무나 중요하다. 시간은 우리가 머무는 공간과 더불어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시간을 멈추는 공간인 블랙홀, 빛조차 빠져 나올 수 없다는 블랙홀의 삶이라도 한번 쯤 차원을 달리해 생각해 보지만 부질없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 정치는 식물정치가 되어가고 있다. 예산은 법정시한을 넘기고도 처리하지 못하여 국회의원들이 불법과 직무유기를 자행하고 있다. 이에 대한 처벌규정은 없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가 하면 내년 4월 15일에 치러지는 21대 총선을 앞두고도 선거법하나 확실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다. 이럴 바에는 그냥 기존대로 선거를 치루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각종 민생법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너는 너 나는 나’이다. 민주적인 질서나 협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세월을 말하는데 쓰는 또 다른 말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많은 국회의원들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국민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 국회의원들의 도끼자루가 썩고 있다. 주인인 국민들이 일꾼인 국회의원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를 모른다면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무노동 무임금의 적용을 국회의원들에게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이 귀한 시간에 민주정치는 어디로 갔고 왜 대립과 반목만 일삼고 있는 지 국민들만 속을 끓이고 있다. ”못된 강아지 콧잔등 아물 날 없다“고 했다. 딱 그 짝이다. 일하기 싫으면 그만 두어야지 왜 세비만 꼬박꼬박 받아먹고 있는지 답을 해야 한다. 주인인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알기에 이런 행동이 다반사로 나오는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
모든 것이 정상을 벗어나 추악한 모습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한해였다. 이런 가운데도 오히려 서민들이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김장김치를 담아서 함께 나누며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사랑을 펼치고 있다. 역 광장 등지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탑이 온도가 오르고 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의 종소리도 어김없이 등장해 세밑 분위기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다. 곳곳에서 송년모임도 시작되고 있다. 2019년 황금돼지의 해가 이제 서서히 머물고 2020년 기해년 쥐의 해가 다가오고 있다. 이를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고 하지만 황금돼지의 꿈을 키우며 풍요로움을 소원했던 서민들의 마음은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아쉬움만 더해 가는 것 같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도 모두 지나가고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찾아오길 소망해 본다. 분명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간은 지나가야 한다. 시간이 멈춘다하더라도 이런 곳과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 국민을 위한 시간을 헛되게 버리는 정치인들, 무위도식하며 시간을 버리는 어리석은 자들, 위선과 거짓으로 혹세무민하는 사기꾼들 등등 모두에게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 다만 그 시간의 가치를 참되고 선하게 활용했느냐 아니면 사리사욕과 양두구육의 표리부동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쓰고 있느냐 하는 여부에 쏜 살 같이 지나가는 세월의 영욕이 갈린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멈추지 않는다면 아니 멈출 수 없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딛고서 후회없는 삶의 자세로 자신들을 돌아보는 세밑의 자성의 순간을 한번 쯤 가져봄이 어떤지 권면해 본다.
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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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속에 빈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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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국내총생산량)기준으로 한국의 경제순위는 최근 발표에서 1조7,208달러(약 2,000조)로 세계 국가경제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2016년 1조 5,380달러로 11위에 위치해 있다가 한 단계 올라섰다. 한국의 경제규모를 보여주는 수치로 보통 11위 내지 12위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총생산량이란 일정기간 보통 1년 동안 한 나라 안에서 생산된 최종 생산물의 가치를 시장 가격으로 합산하여 나타낸다.
각 나라별 규모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다. 1위 미국 20조4,940억 달러(약 23,900조), 2위 중국 13조6,081억 달러(약 15,850조), 3위 일본 4조9,709억 달러(약5800조), 4위 독일 2조9,967억 달러(약 4,600조), 5위 영국 2,8252조(약 2,990조), 6위 프랑스 2조7,775억 달러, 7위 인도 2조 7,263억 달러, 8위 이탈리아 2조 739억 달러, 9위 브라질 1조8,686억 달러, 10위 한국 1조 7,208억 달러, 11위 캐나다 1조 7,093억 달러, 12위 러시아 1조 6,575억 달러, 13위 호주 1조 4,321억 달러, 18위 사우디아라비아 7,824억 달러, 20위 스위스 7,055억 달러 순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3만1,349달러 우리 돈으로 3,500만원을 넘어섰다. 인구 5천만 명에 소득 3만 달러 시대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참으로 커졌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6개 회원국 중 22개국만이 3만 달러를 넘었고 인구 5천만 명 기준으로는 6개국에 불과하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대한민국이고 풍요로운 경제, 행복한 사회, 역동성이 넘치는 국가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보자. 줄었다고는 하지만 10월 실업자 수는 86만 4,000명에 달하고 있다. 지난 1월 기준으로 122만 명이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줄었다. 하지만 이는 정부 돈을 풀어 공공일자리형태의 일시적인 복지근로를 확대한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른바 노인일자리를 늘린 때문이다. 통계수치상의 감소형태를 노린 듯 한 느낌마저 들고 있다. 지난해부터 23조원을 풀어 공공일자리 13만개를 늘린다는 계획아래 추진된 것이다. 일자리를 늘리려면 기본적으로 일시적 공공근로 말고 시장이 일자리를 늘려야 진정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지적이 거센 이유이다. 민간고용이 살아나지 않으면 헛돈 쓰는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때문에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난 것으로도 통계는 이미 발표됐다. 얼핏 보면 경제상황이 참 좋아진 듯 하고 실제 이런 통계에 정부각료의 말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화자찬으로 쏟아진다. 취업자 수 늘고 실업자 수 줄었다는 말이다. 진정한 취업인 민간고용을 외면한 채 말이다. 국민정서와는 엇박자가 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8월 기준 20대 정규직 일자리는 219만4,000개로 2017년 같은 달 234만1,000개에 비해 크게 줄었다. 특히 2013년과 2015년 각각 223만2,000개, 231만6,000개로 상승 추세에 있던 20대 정규직 일자리는 올해 감소했다. OECD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의 청년(15∼24세) 고용률은 26.2%로 35개 회원국 중 30위에 그쳤다. 이 같은 현실 앞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16개 대학생들이 소득주도 성장과 청년실업률을 비판하는 집회도 열어 집단행동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오죽 했으면 이렇게 나서겠는가 생각해 볼 때이다. 이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이 뿌리가 깊다. 진실을 왜곡하고 바로 알리지 않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공정한 대한민국과 거리가 멀다는 주장이다. 경제정책에 대한 청년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들의 향후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이다. 청년실업 100만 시대, 공시생 35만 명 시대의 뼈아픈 자화상이다. 그냥 시간을 보낸다는 이른바 자포자기 청년들마저 등장하고 있는 작금의 실업상황이다.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9월말 기준 1,572조7,000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웠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요즘 시대에도 굶고 다니는 청년들이 많다는 사실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하루 800원에서 1,500원대로 끼니를 해결하며 삼각 김밥에 의존하는 청년들이 있다. 끼니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달걀 두 알로 하루를 버티고 1,000원으로 두 끼를 해결하는 청년도 있다고 한다. 하루 한 끼 이상 굶고 산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까 새벽 4시부터 청년들을 위해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교회에는 많게는 100명이상이 몰린다는 소식이다. 도시락을 가져와 밥을 싸가는 청년들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과연 이런 모습이 왜 생기는 것일까 참으로 답답하다. 이 같은 식사권의 문제의 원인을 소득부족뿐 아니라 불안정한 노동시장, 스펙경쟁으로 인한 시간부족 등을 이유로 들지만 청년들은 기본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아픔을 토로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게 대한민국 맞는가 싶다. 소득 3만 달러 이상에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는 말이 공허하기 들린다. 이게 오늘날 우리 청년들이 겪고 있는 뼈아픈 현실이다. 요즘 아르바이트자리도 쉽게 찾기 힘이 든다. 소득주도성장과 주 52시간이라는 장밋빛 경제정책이 우리의 청년들의 배를 곯게 하고 있다. 돈이 아까워서 아니면 돈이 없어 굶고 다니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알량한 경제정책으로 호들갑을 떨어온 정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난 7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탈북민 모자사망이 발생했다. 숨진 지 두 달 만에 발견된 사건으로 사회적 충격을 던져주었다. 밥을 먹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 이후 최대 충격파이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위기가구에 대한 긴급실태조사에 나서 대책을 수립한다며 요란을 떨었지만 지금은 시들해졌다. 그 때 뿐이다. 세계경제 10위권을 자랑하고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구가하는 나라치고는 너무 모순된 모습이다. 지금도 곳곳에 무료급식소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게 된다. 이 대열에 이제는 청년들도 합류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청년은 우리 사회의 내일의 희망이자 동력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고생은 하더라도 밥은 굶지 말고 고생을 해야지 지금의 이런 모습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처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컴퓨터를 비롯하여 모든 능력이 출중한 세대들이고 창의력이 매우 뛰어난 똑똑한 세대들이다.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하게 성장해 오고 있다. 이런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이 청년실업이라는 고통과 배를 굶는 고통 속에서 일상을 살아간다면 이는 기형적인 사회이자 나라가 아닐 수 없다. 풍요속의 빈곤은 정말 우리가 바라는 사회모습이 아니다. 밥을 굶는 청년, 일이 없는 청년, 갈 곳 없어 헤매는 청년들의 허탈한 눈망울이 우리 사회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풍요 속에 빈곤을 마감하는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청년대책이 시급하다. 16개 주요 대학들의 학생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서고 있음은 이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한다.
201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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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공화국 이대로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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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가계부채 규모가 천문학적인 규모로 증가했다. 지난 9월 말 기준으로 무려 1,572조 7,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이 가운데 53%인 830조 3,000억 원이 주택담보대출이라고 한다. 이는 2007년 4분기 통계작성 이후 역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한국은행이 2019년 3분기 중 가계 신용 발표를 통해서 밝혔다. 이는 사실상 아파트 매매 량에 따른 구입자금 증가와 전세자금대출수요 증가 등의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이 시작되면서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가 엄격해졌고 경기둔화가 대출감소요인으로 동시에 작동하고 있지만 저금리환경에서 대출증가요인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택담보대출이 전분기보다 9조 5,000억 원이 증가해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는 것은 가계부채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가계신용증가 속도가 둔화된다고는 하지만 소득증가 속도보다는 여전히 빠르기 때문에 리스크가 커질 수밖에 없는 불안한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한마디로 부채공화국이다.
동시에 3분기 가계의 사업소득은 사상 최대 감소 폭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는 경기악화로 자영업 가구의 경제사정이 최악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2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48만 7,000원으로 지난 해 3분기보다 12만 9,000원으로 2.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의 3분기 가계 동향 조사결과가 이렇게 나왔다. 소득별로 보면 근로소득과 이전소득은 늘어난 반면 사업소득과 재산소득은 큰 폭으로 줄었다. 3분기 사업소득은 87만 9,800원으로 전년 동 분기 92만 5,600원보다 4만 5,800원(-4.9%) 감소했다. 이는 지난해 4분기(-3.4%) 이후 4분기 연속 감소세이자, 2003년 가계동향조사 집계 이후 사상 최대 감소 폭이다. 경기가 좋지 않았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나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보다 자영업 사정이 더 악화된 것이다. 경기악화에 따른 소비감소로 자영업자의 매출이 줄어든 가운데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비용부담이 늘어나면서 전체적인 소득이 감소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업소득 감소는 고소득층의 소득감소와 함께 중산층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계층 간 소득격차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근로소득이 줄었는데도 근로·자녀장려금 확대로 정부지원금이 크게 늘면서 소득증가혜택을 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정부가 돈을 풀어 그 혜택을 본 것이다. 경제상황이 좋아지거나 근로소득이 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경기 악화는 자영업자들의 추락을 반증하고 있다. 아무리 포장해도 전문가들의 날카로운 분석을 피해지는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의 허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각종 장려금을 받으라고 우편물이 쏟아졌던 모양이다. 여하튼 통계수치를 바꾸는데 정부 돈이 한몫을 거들기는 한 것 같다.
이는 대한민국 경제의 허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화된 경제를 위한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다. 아랫돌 빼서 웃돌 괴기가 아닐 수 없다.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둘러맞추는 식이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이런 경제처방전은 대한민국경제위기를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자영업자들은 소비감소, 최저임금인상의 직격탄을 맞고 최악의 상황에 처하고 있다. 사업소득 감소는 중산층마저 추락하고 있다. 하위 20% 저소득 계층의 가구소득이 증가는 오로지 공적이전소득에 기인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체감경기는 온통 바닥인데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양 호도한다면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심각한 경제 상황을 바로 보는 냉철한 현실 감각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난국에 경제의 주체인 가계, 기업, 정부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매화타령만 한다면 이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 피해는 국민이고 국가이다. 요즘 늘 사례를 들고 있는 베네주엘라 짝이 난다는 우려의 시각이 팽배하다. 불행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계수치를 좋게 만들기에 오버액션을 하는 것은 별로 환영받지 못할 수법이다. 아무리 경제상황을 좋게 포장을 해도 전문적인 분석과 냉엄한 현실 앞에서는 무색할 수밖에 없다. 활성화 정책이 절실하다.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좀 더 수준 높은 시각이 필요하다.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똑똑하다. 이런 시대의 흐름도를 모른다면 그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다.
모두에서 밝혔듯이 가계부채가 1,572조 7,000억 원은 금년 9월의 부채를 말한다. 지난해의 경우도 가구당 부채비율이 무려 7,531만 원으로 국내총생산(GDP)대비 가계 빚이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해까지 7년 새 44.7%가 늘어났으니 올해도 8년 새 더욱 늘어난 셈이다. 심각하다. 빚만 증가하니 말이다. 경기악화로 사업소득은 줄고 부채는 늘어가는 형국이니 참으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정부 돈 풀어서 억지로 두드려 맞춰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고 있다고 하면 좀 개운치 못한 셈법이다. 체감경기를 끌어올리고 그야말로 신명나는 사회적 분위기와 경제 활성화에 즉각 나서야 한다. 기득권세력들의 장밋빛 환상에 젖어 나라경제가 거덜 나는 상황을 맞아서는 안 된다. 베네주엘라는 물론 기존에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도 반면교사이다. 세계경제 10위권을 자랑하기에는 수출부진과 경상수지 흑자 폭의 감소 등 경제상황이 녹록치 않다. 차제에 통계청이나 한국은행은 따로 국밥의 통계를 내놓지 말고 서로 협조하여 종합적인 분석 데이터를 내놓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가계 빚과 소득, 대출 등은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경제상황이 큰소리치며 자화자찬하기에는 그 상황이 심각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제상황에 대한 현실인식과 국민공감대가 부족하고 괴리현상마저 심화되고 있다는 비난도 거세다. 대한민국은 부채공화국이라는 오명이 부끄럽다. 넘쳐나는 화려한 아파트에서 빚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2019-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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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참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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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학년도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전국 1,185개 시험장에서 무사히 끝났다. 수험생들이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마음도 홀가분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시험을 잘 봤느냐 못 봤느냐에 따라 희비는 엇갈릴 수는 있으나 그 최종 결과는 성적 발표일에 나올 것이다. 올해는 수능한파도 닥쳤으나 후배들의 응원열기 앞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수능대박을 기원하는 염원들이 한데 몰려있는 곳곳에서 뜨거운 열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수능을 잘 치르려는 수험생들의 긴장된 모습에서 그동안 열심히 공부해온 멋진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는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좋은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올해 수능시험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생각을 던져주고 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비정상적인 입시 현실 속에서 그렇다.
대학입시를 향해 나아가는 수험생들의 정정당당한 모습과 편법과 불법, 변칙으로 수시전형을 통한 비정상적인 모습이 겹쳐진다. 이는 최근의 사태에서 총장상과 인턴 증명서 위조 및 허위발급 의혹 등 입시목적의 이른바 ‘스펙 쌓기’의 추잡한 사태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수시입시에서 빚어진 이런 부당한 사례는 음성적으로 곳곳에서 빚어져 왔다는 점에서 많은 수험생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고 있다. 2,025년에는 정시모집의 대폭 확대한다고 하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빚어진 이른바 입시부정은 늦었더라도 철저히 조사해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부정부패와 범죄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시에서 조차 비리가 판을 친다고 하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불행한 일이자 비정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전수조사가 가능하다고 본다. 일부 교수를 비롯해 각종 지도층 인사들의 자녀들이 이런 행태를 벌여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입시는 물론 채용비리에서도 우리 사회 고위층들의 불법과 비리의혹이 회자되고 있다. 수시전형의 당락이 생각보다 은밀한 경향이 있어 사실상 당락의 이유가 모호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올해 동국대 수시합격자가 26명이나 당락이 뒤바뀌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5일 발표한 2,020학년도 수시모집 실기전향 합격자 14명이 불합격자로 처리되고 불합격자 12명이 합격자로 정정 발표했다. 그 이유는 오류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0월 24일 홍익대도 수시전형합격자를 잘못 발표하여 닷새 만에 11명이 당락이 뒤바뀌었다. 이런 합격자 번복은 서강대 로스쿨에서도 지난 11월 1일 발표한 1차 합격자명단에서도 발생했다. 학교 측은 오류를 정정해 이틀 뒤 재공고를 했지만 비난이 빗발쳤다. 많은 지원자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이런 황당한 사고는 한마디로 수준이하의 졸작이 아닐 수 없다. 수험생들의 인생이 걸린 중요한 시험에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하자 수험생들이나 학부모들의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냉탕온탕을 오가게 하는 이런 황당스토리에 분노하고 있다. 해당 대학들은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공신력을 잃고 있다. 만약 오류를 바로 잡지 않았다고 한다면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비단 이번 사고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대학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간 입시에서도 이런 오류가 발생했으나 은폐하거나 시정되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수시전형에 대한 불신이 큰 이유이다.
우리는 수능시험일에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긴장된 모습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시험을 잘 치르거나 못 치르건 관계없이 정정당당한 수험생들의 진실된 모습이 입시비리를 조장하는 부류의 그 어떤 고위층들과 그들 자녀들의 추한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만 하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야 말로 그 자체가 값지기 때문이다. 편법과 불법, 비리, 조작으로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추악한 행태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이런 비정상적인 자세는 우리가 추구하는 길이 아니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성실한 수험생들과 학생들에게 자괴감을 안겨주었는지 분명히 반성해야 한다. 수능시험이 던져주는 의미는 단순히 시험이상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내일을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우리 차세대들의 몸부림의 현장이다. 가슴 졸이며 한 문제 한 문제를 풀어나가며 꿈을 이루고자 하는 수험생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는 비정상의 일련의 수시입시행태는 지금이라도 분명 그 진상이 철저히 가려져야 한다. 지났다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이번 수능 세대들은 꿈과 희망을 갖고 달려가는 우리 사회와 나라의 차세대 동력이다. 비정상적인 자들의 추잡한 행각으로 인해 진인사대천명이라는 큰 가치관마저 흔들린다면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비겁한 짓으로 성실한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을 선의의 피해자로 만드는 자들은 범죄자에 다름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 바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이것이 바로 정당한 수험생들의 마음가짐이다. 불의한 자들의 부패한 고리를 끊어내고 꿈과 희망을 향한 진인사대천명의 건전한 열정과 참된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바로 이번 수능시험의 뜨거운 현장이 강하게 일깨워 주었다. 입시비리 전수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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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을 바로잡는 길은 준엄한 국민심판 뿐이다
▲ © 세종타임즈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OECD기준 인구로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6.6명으로, OECD 평균 11.5명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았다. 2017년 기준으로 24.3명보다 9.5%가 더 늘어 자살률 1위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2018 더 나은 삶의 질 지수’(The Better Life·BLI)에 따르면 우리나라 종합순위는 조사국 40개국 가운데 30위에 불과하다. 심지어 영역별로는 사회적 관계, 환경 영역에서 40위로 최하위이다. 유엔이 발표한 2019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에서도 156개국에서 54위를 기록했다. 사회적 자유가 144위, 부정부패는 100위, 사회적 지원 91위로 그야말로 바닥권이다. 세계경제 10위권의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참으로 창피한 데이터이다. 최근에 정치사회적 갈등까지 더하면 모든 국민들의 체감지수는 훨씬 더 심각하면 심각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한 국가 1위는 핀란드, 2위 덴마크, 3위 노르웨이(삶의 질 1위), 4위 네덜란드, 5위 스위스 등으로 부러운 국가들입니다.
경제적 성장과 고용여건이 좋지 않은데다 불평등과 부패, 자살과 정치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불안 등 참으로 ‘헬 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반증을 보여준다. 어쩌다 이 지경에 달했는지 모를 일이다. 정치 경제 사회 그 어느 구석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정치갈등이 국민갈등과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이념갈등까지 겹쳐 교육현장에 이르기 까지 역대 가장 심각한 대결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기득권 안주세력들이 노동현장과 교육, 심지어 언론에 까지 진을 치고 철밥통 두드리며 매화타령을 일삼고 있다. 급기야 고등학생들까지 전교조 교사들의 정치선동에 참다못해 들고 있어서기도 했다. 이렇게 집단행동에 나선 것을 처음 있는 일로서 앞으로가 더욱 주목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광화문과 서초동은 집회가 끊이질 않고 있다. 좌와 우를 나누어진 집회이다. 이곳을 보면 대한민국이 지금 무슨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국민 고통과 갈등의 집합체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31일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탈북자인 40대 여성과 여섯 살짜리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탈북민 모자사망사건이다, 이미 두 달전에 절망과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마디로 아사한 것이다. 우리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하다는 반증이다. 복지사각지대 문제를 줄이기 위한 개발방지 대책을 마련한다고 부산을 떨치면 그 때뿐이다. 지난 11월 2일에도 서울 성북구 다세대주택에서 70대 노모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유서도 발견되었다. 시신의 부패정도가 심해 발견 당시 사망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성북구 네 모녀 사망사건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 9월 4일에도 대전 중구 중촌동 아파트에서도 40대부부와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다는 내용을 담은 유서형식의 메모지가 발견되었다. 이 모두가 극단적 선택으로 복지사각지대의 참담한 생활상을 말해주고 있다. 더욱이 사망한지 한참 지나서야 발견된다는 점에서 이웃에 대한 무관심의 실상마저 보여주고 있다. 삭막한 사회분위기이다.
여기에다 유명연예인과 전직 국회의원의 자살사건이 모방자살효과 영향 등으로 지난 해 자살률이 5년 만에 증가했다. 지난 해 자살자수는 1만3,670명으로 전년대비 1,207명이 늘었다. 자살예방정책이 무색하다. 심지어 유명연예인의 자살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무분별한 악플에 따른 우울증 등의 충동성 짙은 연예인 자살이라는 점에서 대중들의 충격이 매우 크다. 심지어 전직 유명 국회의원과 아나운서의 자살에 이르기까지 자살이 던져주는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연예인 자살에는 베르테르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명인사가 자살을 하고 그 영향을 받아 죽음을 택하는 경우를 베르테르 효과라고 한다. 심지어 최근 10월에 부산에서는 11살 초등학생마저 학업문제 어려움의 유서를 남기고 숨진 채 발견되어 충격을 주었다. 역시 10월에 25세의 유명가수의 자살에 이어 11월에 금융투자협회장의 자살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대한민국 사회에 던져주는 충격이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자살국가의 실상과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노인 자살률마저 세계 최고이니까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부실하며 삶의 질이 바닥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부정적인 용어들이 이런 비정상 사회의 현상을 말해주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와 인구절벽, 청년실업, 자영업폐업대란, 심각한 경제난, 경제성장 둔화, 좌우이념갈등, 대립과 반목의 정치, 수준낮은 정치행태, 뒷걸음치는 언론정의, 불평등, 지도층의 부정부패, 반사회적 집단행동, 노동귀족, 정당정치의 퇴행, 비민주적인 질서 등등 참으로 구석구석에서 부정적 요소들이 꿈틀대며 사회발전을 역행하고 있다. 선거철 틈만 나면 국민행복을 주창하고 민생경제를 부르짖던 정치권들은 그 때 뿐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자기들이 약속한 것들조차 헌신짝 버리듯이 한다. 아예 잊어버리는 듯하다. 이런 악순환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하는가를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국민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정치는 종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년 총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의 정치활동을 면밀히 분석하여 무능하고 무책임한 국회의원들을 모조리 퇴출시켜야 한다. 모든 국민들이 단단히 마음을 먹고 주인위에 군림하던 정상모리배들과 구시대 정치인들을 모두 속아내야 한다.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야 하는 것이다. 마음고생과 생활고 등 저간의 부정적인 국민고통과 부끄러운 실상은 앞서 밝힌 것과 같다. 이렇게 모든 분야에서 구석구석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책임은 누구보다 정치권이자 위정자들이 매우 크다. 좌고우면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고 내년 4월 15일 21대 총선에서는 준엄한 국민심판을 내려야 한다. 지금은 일촉즉발의 난파선 형국이다. 이대로는 갈지자걸음을 걷는 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이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내년 21대 총선은 비정상을 바로잡는 중요한 선거이다.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리는 역사적인 선거임을 국민 모두는 지금부터 명심해야 한다. 비정상을 바로잡는 길은 오로지 준엄한 국민심판 뿐이다.
20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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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언론과 당당한 언론
▲ © 세종타임즈
요즘 우리나라 언론이 과연 정도의 길을 걷고 있는지 국민들이 의아해 하고 있다. 신문방송과 인터넷언론이 넘쳐나는 그야말로 언론춘추정국시대를 맞고 있지만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매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은 많은데 왜 이렇게 불신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인지 성찰해야 할 시점이 바로 오늘날이다. 과거에는 언론통제를 통하여 조작된 뉴스를 전달하며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였다면 요즘은 ‘좀 알아서 기는 형국’이다. 정론직필의 언론의 길이 아닌 야합과 아부의 언론이 국민들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뉴스를 교묘하게 재단하여 전달하는 기교가 엿보이는 경우가 너무나 자주 눈에 뜨인다. 과거에는 국민들이 이런 뉴스에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 중에 착각이다. 이는 지상파의 시청률 저하에서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부 뉴스채널이나 종편에서조차 쉽게 보게 된다. 가장 손쉽게 알 수 있는 것은 편집된 송출화면이다. 특히 집회장면의 인파편집에서 그 냄새를 풍긴다. 있는 그대로의 뉴스전달이라기 보다는 무엇인가 의도된 기법이 엿보인다는 지적이다.
중앙언론이나 지방언론이나 할 것 없이 무수한 언론사들이 존재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사회적 이슈에 침묵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했다하더라도 심층적인 보도가 미흡하고 형식적인 보도나 아예 묵살해버리는 경우마저 생기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싶다. 과거 군사정권시절의 언론 통폐합으로 뜨거운 시절을 보낸 대한민국의 언론이다. 그리고 이 시절에도 그 어떤 압력과 통제에도 굴하지 않고 정의로운 뉴스를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심지어 과거에는 광고가 없는 신문도 존재하였다. 이런 탄압을 거친 언론들이다. 그런가하면 해직기자들이 넘쳐났다. 바른 말을 하던 언론인들을 갖은 굴레를 씌워 일선 현장에서 내쫓아 버렸다. 물론 이후에 상당수가 복직하였지만 그런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언론인들이 정론직필, 정도언론의 역사를 만들어 놨다. 그래서 이런 언론이야말로 당당한 언론이었으며 그런 곳에 종사하는 언론인들은 그야말로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언론춘추전국시대인 지금이야말로 언론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시대를 맞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논조가 정의롭지 못하고 정권과 이념의 논쟁에 휩싸여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물론 언론중재위원회를 통하여 정정보도를 청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회적 이슈가 되면 이유야 어떻든 상처는 남게 마련이다. 의도적이고 무책임한 보도가 낳은 폐해이다. 언론사가 정치권력에 휘둘리면 이미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감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종사자들조차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부끄러울 것이다. 지금의 언론의 가는 길이 정도인지는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국민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보도를 외면하고 작위적인 보도와 편성으로 국민들의 여론을 왜곡하려한다면 이는 참으로 수준이하의 졸작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은 과거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받는 아날로그 시대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 인터넷시대, 다채널 다매체시대이다. 거짓 정보를 전달하면 이는 금방 들통이 나는 시대이다. 국민들이 오히려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진짜와 가짜를 스스로 가려내는 시대이다. 창피한 언론, 신뢰받지 못하는 언론은 그것이 신문이건 방송이건 이미 사망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신은 오래간다.
이런 현상이 지금 유튜브로 눈을 돌려 정보를 전달받는 신언론시대를 선언하고 있다. 실버세대들조차 유튜브에서 정치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역으로 접하고 있다. 기존 지방파방송이나 종편, 심지어 뉴스채널에서 접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유튜브를 통하여 접하다 보니 구독자가 50만 명은 물론 100만 명을 넘는 채널도 등장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기존 언론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소식들을 통쾌하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대변혁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을 쓰고 있는 기존 매머드 언론사들과 비교하여 그 가성비를 따지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진실을 담고자 노력하는 언론보다는 정치권력의 입맛에 맞는 보도행태를 보이면서 박수를 받고자 한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셈법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가 언론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광고를 얻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언론들을 향해 국민과 시민의 세금을 갖고 광고를 주네 주지 않네 하며 재단하고 있는 현실도 안타깝기는 매 한가지이다. 그렇다고 할 이야기를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보도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국민과 시민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아쉽게도 언론의 목줄은 사실상 정부가 쥐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정기간행물 등록관리시스템에 등록된 종별 언론사는 2019년 5월 15일 기준으로 1만 8,969개에 달하고 있다. 이들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은 2016년 이후 매년 5% 이상 성장하며 무려 2만 1,307개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인터넷 신문은 8,396개로 전체 44.26%를 차지해 가장 많다. 종이신문 매체수는 모두 더해도 3,268개이다. 이는 전체 17.23%로 인터넷신문에 비해 두 배 반 이상이나 적다. 위기상황이었던 지난 2015년 6,347개였던 인터넷신문은 2019년 5월 현재 8,396개로 4년 만에 무려 2,049개나 증가했다. 매년 500개 이상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방송으로는 현재 공중파방송사인 공영방송 KBS와 민영방송 MBC, SBS, iTV가 있다. 기타 EBS, 케이블TV가 있지만 특성화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종합편성채널도 등장하여 뉴스를 전달하고 있다. 이른바 종편PP의 영향력이 막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3년마다 재승인을 받아야 하는 종편의 생명줄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쥐고 있다. 물론 지상파도 재허가 심사를 받는다. 사실상 이들 매체들은 정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사정권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상파와 SO/위성, PP종편, 보도, 홈쇼핑 등 재허가·재승인을 받는 사업자는 무려 ‘158개 사업자에 367개 방송국’이다. 방통위는 이들의 방송평가를 받아 재허가 및 재승인의 심사에 반영한다.
언론이 이처럼 정부의 사정권에 들어있기 때문에 맥을 추지 못하는 이유이기는 하다. 하지만 언론이 언론이기를 포기한다면 이는 직무유기이다. 더욱이 여론을 조작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보도행태를 보인다면 이는 단죄되어 마땅하다. 언론의 숫자가 많고 기득권을 갖고 있다고 해서 정도언론이 아니다. 이런 언론들이 숱하게 존재함에도 유튜브가 새로운 언론시대를 구가하고 있음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찌 보면 기존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외면이 낳은 새로운 언론 자화상이다. 우리 시대 대한민국의 언론이 비겁한 언론과 당당한 언론으로 구분지어지는 이유는 바로 국민들을 향한 진실보도가 그만큼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언론시대를 가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심지어 법무부의 언론통제의 발상은 그 자체가 법을 다루는 곳에서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짓밟고자 하는 무지몽매한 발상으로 철회되어야 한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역사와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참으로 무서운 발상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것도 침묵해서는 안 된다. 비겁한 언론과 당당한 언론이냐는 역사의 심판과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할 절박한 시점임이 분명하다.
201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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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 © 세종타임즈
대한민국의 갈등과 대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해지고 있다. 수백만 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집회가 끊이질 않고 있다. 광화문과 서초동의 집회는 대한민국의 집회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초동의 집회가 좌우의 대립개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면 광화문의 집회는 다소 다르다는데 그 심각성이 경중을 달리한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광장으로 몰려들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대한민국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이는 분명 정치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정치가 국민의 마음을 담지 못하고 겉돌고 있으니 도대체 대한민국에는 지도자가 있고 정치인들이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을 이처럼 극단으로 몰고 있는 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국민갈등의 소용돌이가 거세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이를 치유할 대책과 처방이 나와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국민들의 물음에 모든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은 답해야 한다.
만신창이 되고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고는 올바른 정치와 국민의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없다.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은 결코 정상이라고 평할 수 없다. 정치와 경제, 사회, 교육 등 그 어느 곳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 없다. 국민들만 생활전선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다. 심지어 일선교육현장에서 전교조 교사들의 세뇌교육마저 뜨거운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도 고등학생들의 폭로로 말이다. 아니 이 나라의 교육현장에서마저 이념과 좌우편갈이 의식교육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미래 세대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 나라와 이 사회를 지켜나갈 것인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어쩌다 교육현장마저 이 지경이 됐는지 참으로 비감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학생들의 올곧은 사고방식이 존재함을 확인하고 국민들은 안도하고 있다. 정의와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줏대를 지켜나가는 자세는 오히려 전조교 교사들보나 더 나으면 낫지 덜하지 않다. 자신들의 수준 낮은 행동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고 이른바 나이 값을 해야 한다. 참교육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모양으로 이율배반이고 표리부동한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대한민국을 58일 동안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던 조국의 부인 정경심교수가 구속된데 이어 조국 전 법무부장관마저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한다는 소식마저 들려온다. 취임 35일 만에 전격 사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탄식을 자아냈다. 무엇인가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의 법을 다루는 중차대한 자리가 이처럼 재단이 되는 정치를 바라보며 도대체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 나라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의혹에서부터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국민들에게 자괴감과 분노를 촉발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 같다는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기존에 나온 영화의 대목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많지만 언젠가 분명히 한편의 영화소재로 등장할 것이 예상되기도 한다. 그만큼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부분들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리라. 지지층들의 옹호도 있지만 무엇을 옹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범법을 옹호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검찰을 비난하지만 검찰은 현 정치권력 하에 검찰이다. 오히려 정치권력에 좌고우면하지 않는 모습이 더 당당해 보이고 박수를 받는 이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법과 원칙이 살아있다는 이야기이다. 검찰개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법과 원칙이 바로 서는 것이 검찰개혁이자 정의로운 사회, 민주사회이다. 여기에 무슨 사족이 필요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편을 건들면 개혁의 대상이라는 발상은 논리의 비약이자 어불성설이다.
한 동안 한반도에 평화가 다시 찾아올 것 같은 환상에 젖어 국민들이 환호했다. 이 때문에 지난 지방선거에서 싹쓸이 정당이라는 이름마저 나왔다. 남북문제가 이처럼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적이 언제인가 싶기도 하다. 그 바람에 지방자치단체에는 마치 일당 독재를 방불케 하는 지방자치가 판을 치고 있다. 단체장과 지방의회를 싹쓸이 했으니 지금 가는 길은 불문가지이다. 지방행정을 감시 감독하는 기능이 과연 얼마나 작동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끼리끼리 다 해 먹는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난무한다. 결국 그 피해자는 시민들이고 국민들이다. 민주주주의 작동원리가 상실한 의회 기능이자 지방자치가 되어 버렸다. 평화를 향한 신기루가 국민 민주질서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면 지금 평화로 가는 길에 서 있는가를 짚어보자. 지난 5월 이후 북한은 10여 차례의 탄도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를 시험 발사하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심지어 10월 2일에는 SLBM 즉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까지 발사했다. 북한은 금강산의 남한 시설을 싹 들어내라는 지시에 논의개시 통지문까지 이틀 만에 보내왔다. 월드컵 축구예선전은 중계는커녕 체류기간 중 많은 불편과 고통을 겪어 선수단들의 하소연이 쏟아졌다. 평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련의 상황들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향하여 왔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미북정상회담도 결렬되고 북한은 올해 연말까지 미국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지켜보겠다는 발언도 쏟아 내놓고 있다. 작년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남북의 현 상황을 보면 평화를 입에 담기도 창피할 지경이다. 과연 세계는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지 불문가지이다. 이런 평화놀음에 국민들은 이미 식상해 있다.
나라안팎의 상황이 이러 할진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자. 조국사태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소모적인 정쟁만이 난무하고 국민들마저 이분법으로 분열되어 연일 광화문이 들썩거리고 있다. 수백만 명이 집회를 찾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사태를 그냥 좌우논리로만 보아야 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국민들의 외침을 일회성으로만 치부한다면 이는 착각일 수 있다. 서민들은 먹기 살기에도 힘겨운데 온 나라가 날이면 날마다 바람 잘 날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등어리’ 가려운데 발바닥 긁고 있는 형국이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이합집산도 우려된다. 국민을 기만하는 무슨 꼼수정치가 등장할 지도 모른다. 온통 구호만 난무하는 이 시점에 서서 “대한민국이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누군가 답을 해주어야 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 국민이 보이질 않는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는데 그 영웅은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보고 싶은 오늘이다.
2019-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