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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
© 세종타임즈
올해 2020년은 참으로 특이한 해가 되고 있다. 중국 우한으로부터 시작한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으면서 혼돈이 시작된다. 영화 속에서 보던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현실로 나타났다. 지금 백신이다 치료제다 해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영국, 곳곳에서 하루라도 빨리 내놓으려고 안간 힘을 다하고 있다. 성급한 러시아는 임상 3상도 건너뛰고 백신이라고 내놓고 있지만 전 세계가 바라보는 눈길을 불신으로 차갑기만 하다. 미덥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미국에서 획기적인 백신 개발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아직 어디까지인지는 몰라도 반가운 소식임이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도 연내에 혈장치료제를 내놓을 것이라는 소식도 나오고 있다. 이런 개발들은 특단의 조치들이 수반되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류 공동의 노력의 일환이다. 한마디로 21세기 인류를 구원하는 엄청난 일이다. 백신이 나오기 전부터 확보전이 뜨거운 모양이다. 개발국은 자국민들을 우선하고 나머지는 나중 순위에 놓고 있다. 우리나라가 백신과 치료제를 동시에 개발해 내놓을 경우를 생각하면 이는 우리나라의 위상을 달리하는 획기적인 개가로 기록될 것이다. 현재의 추이를 보면 가능하리라는 기대감이 매우 크다. 이는 정보망이 막강한 주식시장에도 이미 그 내용이 반영되고 있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일련의 과정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무력감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다음으로 살펴보면 최장기간의 여름장마이다. 무려 54일이란 장마기간으로 2013년 49일간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집중호우에 피해가 극심했다. 전국에서 물난리를 겪었다. 농경지가 침수되고 제방이 무너지고 도시가 물바다로 변했다. 재산피해, 인명피해도 컸다. 여기에다 태풍도 지나갔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자연이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가을에는 어떨는지 걱정이 앞서는 요즘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지구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을 주요원인으로 꼽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이 중국은 그야말로 홍수로 6,400여만 명의 수재민이 발생하고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다. 무려 석 달 이상이나 비가 내렸으니 한마디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마치 자연이 징벌을 내리듯이 비를 쏟아 부었다. 샨사댐이 금방이라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이 난리가 아니었다. 그동안에도 충칭을 비롯해 우한시 등 주요도시들이 물바다를 이뤘다. 샨사댐의 방류로 하류 곳곳이 침수되어 그 피해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어 버렸다. 무려 24개성이 침수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세기에 이런 황당한 홍수사태는 접하지도 못했지 않나 싶다. 가장 극심한 피해가 중국이니 앞으로 식량부족 사태가 크게 우려되는 상황이다. 일본도 역시 홍수피해를 비켜가질 못했다. 일본 큐슈지역에 5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었다. 무너져 내리고 침수되고 역시 물바다를 이뤘다. 136만 명에게 대피령까지 내려질 정도였다. 8호 태풍 바비로 인해 중국 칭다오시 등지와 북한에도 많은 피해를 냈다. 예외가 없을 정도로 한·중·일 3국이 자연으로부터 난타를 당했다. 마치 그동안 잘못에 대해 징벌을 내리는 듯 했다.
중국홍수를 바라는 보는 느낌은 한마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난다해도 이처럼 잔인할 정도로 엄청난 상황이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난리 통에도 어미개가 물로 뛰어들어 자신의 새끼들을 구출하는 장면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는 강에서 고기를 잡는 장면은 이들이 수재민들인지 관광객들인지 알다가도 모를 정도여서 이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그런데도 중국의 지도자들은 수해현장에 얼굴만 한번 살짝 내밀고 ‘니들이 알아서 잘 해’ 하는 식으로 대처하는 장면도 좀 감동적인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정치인들이 수해현장에 달려가서 위로하고 돕는다고 액션들을 취했지만 그다지 큰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지금도 농가들은 시름에 젖어있다. 다행히 8호 태풍바비는 큰 피해 없이 넘겼지만 수해복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침수되었던 농작물들은 그야말로 다 망치고 말았다. 수해피해자들의 신고상황이 해당 관청에 접수되었지만 과연 어디까지 손길이 미칠지도 미지수이다. 수재민들이나 피해농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모두의 의지가 필요하지만 벌써 잊혀 가고 있다. 폭우도 지나가고 태풍도 지나갔지만 상처만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참으로 자연은 인정사정없는 듯하다.
사실 그동안 중국의 경우 대한민국에 피해를 주는 미세먼지의 산실이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올해는 중국에 석 달 이상 내리는 비로 공장들의 미세먼지가 한반도로 날아들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미세먼지 걱정이 없이 올 봄을 보냈다. 그 대신 중국에서 날아든 우한폐렴, 이제는 코로나19라고 칭하지만 더 심각한 상황으로 대한민국을 몰아넣었다. 코로나19는 온 세상을 마스크 천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코로나 19 사태이후에도 문호가 개방된 대한민국에는 감염자들마저 버젓이 입국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코로나19 사태가 쉽게 진정될 수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벌써 n차 지역감염과 집단감염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제는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까지 나갔다. 3단계가 이어지면 그야말로 경제는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름이 지나가는 지금도 코로나19 사태가 진정기미를 보이지 않고 확산되고 있으니 참으로 잔인한 봄과 여름을 지나고 있다.
이런데도 대한민국은 파업은 물론 이해집단들의 집단행동으로 콧잔등이 아물 날이 없다. 이런 비상시국에도 구석구석에서 반목과 대립이 판을 치고 있으니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다. 정치는 있으나 가슴이 없고 경제는 있으나 활력이 없으니 모두가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다. 어린아이들마저 마스크를 쓰고 성장해야 하는 이런 답답한 시기에 사회분위기 마저 삭막하니 신바람 나는 일이 과연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올해 자연도 인간의 교만함을 질타하고 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고 인터넷 세상이 아무리 첨단을 간다고 한 들 운영주체인 인간이 바이러스 하나 잡지 못하고 병들고 지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밉상인 일본총리 아베 신조가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 28일 총리직을 사임했다. 아무리 잘나가도 건강을 지키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교훈을 아베는 던져준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나온다. 자연을 순리대로 잘 지키고 인간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가 절실하다. 이것이 바로 요즘 자연현상이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인간들아! 정신 좀 차려라!”고 말이다.
2020-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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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선택한 스승 3
© 세종타임즈
제자를 찾는 스승, 스승을 찾는 제자
이시이 바쿠가 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 제자를 들이고 싶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 지만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 바람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경성에 머물렀던 기간은 4일에 불과했고, 그동안 조선인 제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했던 것일까? 경성의 음악 수 준이 높다거나 경성인들의 무용 이해가 깊다는 말은 그냥 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근거가 없는 말이라도 누구에게든 해를 끼치는 말은 아니다. 이른바 백색 거짓말이다. 실제로 비슷한 말을 했던 다른 일본 무용가도 있었다. 이시이 바쿠보다 4개월 전에 경성 공연 을 했던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였다.
그는 1925년 10월말에 일본을 출발해 부산과 대구, 대 전을 거쳐서 경성에 도착했고, 11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경성 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단에는 일본 민요작가 나카야마 신페이(中山晉平)와 일본악기 샤쿠하치 (尺八)의 대가 요시다 세이후(吉田晴風), 소프라노 가수 사토 치야코(佐藤千夜子) 등이 동참했 고, 후지마 시즈에의 제자 십여명을 동반한, 당시로서는 대규모 호화 공연단이었다. 10월28일의 는 후지마 시즈에가 “조선의 춤을 연구하여 ... 독특한 동작과 음악에 맞추어 일종의 새로운 춤을 창조할” 것이라고 보도했고, 인터뷰 기사는 “조선인 무용가를 찾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실었다. 그는 경성에 도착했을 때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이틀의 공연에서도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무용을 배우겠다며 따라나선 조선인은 없었다. 사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은 이시이 바쿠보다 훨씬 큰 성황을 이루었다. 흥행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신문에 보도된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 사진 중에는 경성공회당이 관객으로 가득 찬 사진이 여러장 실렸다. 반면 이시이 바쿠의 공연 사진에는 관객석을 찍은 것이 없었다. 다 시 말해 인기의 면에서는 후지마 시즈에가 이시이 바쿠보다 훨씬 나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후지마 시즈에는 조선인 제자를 얻지 못한 반면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얻었다.
그 동안 평전들은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를 제자로 삼았다고 서술했지만, 거꾸로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스승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기 있던 후지마 시즈에를 제치고 흥행 에 실패한 이시이 바쿠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이시이 바쿠를 선택했을까? 우선 두 사람의 무용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두 사람 모두 가부키와 노와 같은 일본 전통 무 용을 답습하지 않고 근대화된 작품을 창작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일본 무용을 근대화시 켰고 일본 무용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후지마 시즈에가 여전히 일본 음악과 일본 의상을 사용하면서 일본 전통무용의 동작들을 재구성한 반면, 이시이 바쿠는 일본 전통무용과의 연결을 끊고 서양식 음악과 서양 식 의상을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무용을 선보였다. 다시 말해 후지마 시즈에가 일본 전통무용을 근대적으로 ‘계승’하면서 ‘개선’했다면, 이시이 바쿠는 일본 전통을 깨뜨려 버리고 서양식 발레 동작을 접목시킨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무용을 ‘개발’했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양식의 무용을 ‘무용시’라고 불렀다. 이는 일본 전통 무 용과도 달랐지만 서양의 발레와도 구별되었다. 무용시는 관객에게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이 목 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음악과 조명, 동작과 표정 등을 총동원해서 관객의 감성에 직접 호 소하려고 했다. 와의 인터뷰에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소개했다. “춤은 ‘인간의 감정 또는 사상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운율적인 운동’이라는 신념 아래 정진하 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무용은 음악이 가장 소중합니다.” 이와 함께 이시이 바쿠는 일본 전통음악보다 서양 음악을 쓰거나 혹은 서양식 음계로 작곡된 음악을 반주 음악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일본 관객에게 이 해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여야 했지만, 친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후지 마 시즈에의 무용은 훨씬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경성 공연을 가졌던 후지마 시즈에와 이시이 바쿠 중에서 최승희는 후자를 스 승으로 선택했다.
의 애독자였던 최승일은 후지마 시즈에와 이시이 바쿠의 “조선인 제자 구함”이라는 메시지를 모두 접했을 테지만, 동생에게 이시이 바쿠를 소개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상황이 달랐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 때에는 최승희가 진로 선택의 여지 가 아직 남아 있었다. 최승희는 도쿄 음악학교 유학을 생각 중이었으므로 일본 무용가의 “조 선인 제자를 구한다”는 메시지에 귀기울일 절박함은 없었다. 이시이 바쿠 때는 달랐다. 도쿄 음악학교에 이어 경성사범 입학도 좌절되었므로 최승희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둘째,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아무리 근대화되었더라도 여전히 일본 춤이었다. 반주 음악도 일본 악기를 사용한 일본 음악이었고, 의상도 전적으로 일본 의상이었다. 조선인의 눈에는 일 본 춤이 근대화된 특징보다는 일본 전통의 계승이 먼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토와 문 화를 강점당한 조선인들은 아무리 근대적이라 해도 ‘일본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시이 바쿠의 무용에는 일본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서구적이었다. 물론 그 가 전달하려는 정서와 감성은 일본인들에게 친화력이 있었겠으나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음악 과 의상, 동작과 표정은 서구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에게 훨씬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이시이 바쿠는 일본에서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순회여행을 가졌고 거기서도 호평을 받았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유럽 공연을 다녀오고 난 뒤에는 그의 성가가 한껏 높아져 있었다. 그의 무용 세계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이를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독일에서 마리 비그만(Mary Wigman 1886-1973)의 표현주의 신무용(노이에 탄체)을 접 한 뒤로는 그의 무용도 서구 무용과 접점이 생겼다. 특히 독일 순회공연 중에 창작한 은 이시이 바쿠를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Harald Kreutzberg, 1902–1968)에 못지않 은 표현주의 무용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일본적이기만 한 후지마 시즈에 의 무용보다 서구 무용과 접맥된 이시이 바쿠의 무용에 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오빠 최승일의 경험이었다.
최승일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니혼대학 미학과에 유학 하면서 일본의 근대적 문화현상을 눈여겨 관찰한 바 있었다. 그중에서 문학과 연극 분야의 새 로운 움직임과 함께 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목격했고, 그 선두주자가 바로 이시이 바쿠였다. 최승일은 유학기간 중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미학적 관점 에서 보아도 일본이나 조선의 근대 무용의 미래는 후지마 시즈에 식의 일본식 근대무용이 아 니라 이시이 바쿠식의 서구식 근대무용에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오빠 최승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최승희가 후지마 시즈에를 제치고 이시이 바쿠를 스승으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스승이 조선인 최승희 를 제자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선택한 셈이었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 이후 불과 1달 반인 5월7일 후지마 시즈에는 경성 2차공연을 가졌 다. 자신의 1차 공연이후 6개월만이었으니 1차공연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다. 의 보도에 따르면 후지마 시즈에의 2차 경성 공연도 대단히 성공적인 공연이었다. 하지만 후지마 시즈에는 이때에도 다른 조선인 제자를 얻지 못했다. 그의 무용은 아마도 감상 하기에는 이국적이고 신기했겠으나 조선인이 연구하고 연마하기에는 너무도 일본적이었기 때 문일 것이다. 후지마 시즈에가 두 번째 경성공연의 성공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최승희는 도쿄 무사시노의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시의 공부와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202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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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재확산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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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재확산의 공포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서울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확산되고 있는데 이어 전국적으로 17개 시도를 모두 강타하여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에 들어갔다.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에서 2단계로 격상되었다. 이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진자들이 급증함에 따른 것이다. 하루 신규 확진자 추이는 보면 지난 14일부터 103명을 시작으로 166명, 279명,197명, 246명, 297명, 288명, 324명, 332명(3월8일 이후 최다 발생수)을 기록하며 9일간 세 자리수를 이어갔다. 9일간 무려 2,232명이 확진자가 발생했다. 이틀연속 300명대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처음으로 17개 광역시도 전역에서 환자가 나왔다. 한마디로 비상사태이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랑제일교회 관련 누적확진자가 796명, 경기용인의 우리제일교회174명, 인천의 열매맺는 교회17명, 여의도 순복음교회 28명 등 교회감염확산세도 우려되고 있다. 여기에다 광복절 광화문 집회 관련 확진자들도 전국적으로 104명으로 계속 늘고 있다. 이밖에도 극단과 바캉스모임, 지하철역, 경찰청, 법원, 심지어 의료기관 등에 까지 침투하고 있다. 연휴기간에 부산 등 전국 주요 해수욕장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 이 역시도 향후 주목되는 부분이다. 해외유입 확진자들도 꾸준히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요즘의 전파는 무증상감염이라는 소리 없는 ‘깜깜이 감염’이 전체 20.2%나 차지하며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확산의 공포가 더해가고 있다. 광화문 집회 발 감염확산이 우려되면서 정부의 강경방침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지금의 확산속도는 그동안 자랑하던 k방역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전 세계 팬데믹 상황에서 전 인류가 겪고 있는 희대의 코로나19 사태의 고통을 누가 가볍게 치부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짚어보아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감염자가 무려 2,280만 명을 넘어섰다. 다음 달 초가 되면 3,0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도 1만7,000명을 넘어섰다. 세계적으로 80만 명 가까이 사망자가 발생했고 우리나라도 309명이나 된다. 570만 명의 감염자에 18만 명가량이 사망한 미국은 지금 비상사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발원지 중국은 얄밉게도 확진자 0명이라는 발표가 나오고 있다. 전 세계적인 책임추궁과 피해보상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청정국가라고 대한민국 비행기를 되돌려 보내며 교만 떨던 베트남도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경제에 치명타를 입고 있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배신감과 밉상을 자초했다. 전 세계 모든 일상이 비상사태인데 코로나19를 가볍게 치부하며 만용을 부린다면 이는 국가나 개인이나 치명적인 결과를 자초할 뿐이다. 이런 교만과 허풍 사례는 일본에서도 보고 베트남에서도 보고 곳곳에서 보게 된다.
기회 있을 때마다 코로나19 사태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형이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 왔다. 장기간 피로감에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칫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식당과 카페, 예식장, 종교시설, 재래시장, 관광지, 해수욕장, 대중교통에 이르기까지 위험천만한 사각지대가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동안 느슨한 대처와 위험천만한 방역구멍들이 곳곳에서 노출되어 왔다. 심지어 정부조차도 위축된 국내경제를 살린다며 1,700억 원이라는 막대한 할인쿠폰까지 발행하다가 부랴부랴 중단했다. 숙박, 관광, 공연, 영화, 전시, 체육시설, 외식, 농수산물 분야에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이다. 방역측면에서는 결과론적으로 이것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집단감염 전국 확산시기에 맞물려 있다. 한마디로 헛발을 내딛은 것이다. 남의 탓만 할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차제에 감염된 해외유입자들을 아직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정부의 대처도 과연 올바른 것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질병을 차단하는 것이 방역이라고 한다면 해외로부터 감염자를 받아들이는 것도 방역에 역행하는 처사가 아닌가 하는 지적이 거세다. 이들이 어떤 변종바이러스를 갖고 입국하는지도 모르는데다 이를 통해 국민 감염위험을 더해지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레이시아에 10배 이상의 감염력을 가진 변종발생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해외감염자의 국내 유입의 지속화는 정말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성급하게 k방역을 자랑하며 자화자찬을 할 때가 아니다. 프로야구 경기에서 자주 나오는 말인 “끝날 때 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툭하면 경제활동을 독려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풀어 뜨리고 프로야구 관중 입장 등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일을 정부가 해 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장기간의 피로감에 젖은 국민들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코로나19 사태를 보고 마치 마스크만 쓰고 다니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다닌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다시 ‘앗 뜨거워라’ 하고 난리가 아니지만 바로 이전 상황은 그래왔다. 물론 철저하게 방역수칙을 지키는 곳도 여전히 많다. 생활화되어가고 있음도 숨길 수 없다. 하지만 그동안 식당이나 카페 등 다중시설 곳곳에서 초기비상사태가 무색할 정도의 모습들을 보여 왔다.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다. 마치 코로나19 사태가 끝난 것인가 싶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의 탓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 공동체 모두가 자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정부도 나서 소비 진작을 위한다며 대체공휴일도 지정하며 외식도하고 영화도 가고 여행지도 가도록 독려하던 1,700억 규모의 쿠폰행정도 결국 재확산과 맞물려 있고 방역당국과의 엇박자행보가 되고 말았다. 결국 이도 하루 반 만에 종료를 선언하고 말았다. 이를 촌극이라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실내 50인 이상의 모임이 금지되면서 벌써부터 예식장과 예약자들이 난리가 아니다. 2단계 가지고도 이처럼 파장이 큰데 3단계로 가면 얼마나 더 하겠는가는 불문가지이다. 3단계의 경우는 더 강화되어 10인 이상 집합모임이 금지된다. 학교도 원격수업을 하던지 휴업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필수적 사회경제활동 외 모든 활동이 원칙적으로 금지가 된다. 공공기관이나 필수인원 외 전원채택근무를 하게 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올스톱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식당이 제대로 되겠는가 사회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생각해 보면 답이 금방 나온다. 3단계로 가면 피해가 매우 큰데 지금의 사태가 이런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이른바 K방역이 구멍이 나고 공든 탑이 무너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리고 경제난은 더욱 극심해질 것은 자명하다.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 어쩌다가 K방역이라는 허풍에 물들어 코로나19 사태가 전국적 재확산이라는 지경에 까지 처하게 됐는지 안타깝다. 그동안 헌신적으로 노력해왔던 의료진들과 보건소 등 방역일선 현장의 관계자들이 얼마나 허탈해 할 것인지도 미루어 알 수 있다. 벌써 업무과중을 하소연 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도 방역을 방해하는 자들을 구속해 엄단하겠다고 강경모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코로나 19 사태를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고 그 대처방안과 관련 국민들에게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해 왔는지도 되돌아보며 성찰해야 한다. 위화감을 조성하지 말고 법대로 하면 된다. 지금의 사태는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사회적 거리두기 행동지침은 물론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확산을 차단하고자 하는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시간을 우리 사회 공동체 모두가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재확산 상황에 처해 있다. 철저히 막아야 한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올 때 까지 그렇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코로나19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코로나19 재확산이 우리 모두에게 이런 뼈아픈 교훈과 경각심을 던져주고 있다.
202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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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선택한 스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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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 가마의 무용 공연 입장료
이시이 바쿠의 공연이 성황을 이루지 못한 것은 비싼 입장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입장권 은 특등석이 3원, 2등석이 2원, 학생석이 80전이었다. 1926년의 1원은 오늘날의 대략 8천원 (구매력 기준)이므로 특등석이 2만5천원, 2등석은 1만5천원 정도였다. 최승희도 졸업식을 치 룬 마당에 6천원짜리 학생석 표를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연 입장료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그닥 비싸게 느껴지지 않지만 당시 물가와 비교 하면 아주 비쌌음을 알 수 있다. 1930년의 쌀 한가마니(80Kg)가 13원이었고 그 무렵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80Kg정도였으므로 2등석 입장권 가격은 한 사람의 두 달 치 쌀값이 었다. 또 당시 신문구독료가 1원이었으므로 두 달 치 신문 값이기도 했다.
그날 경성의 오누 이 인텔리의 공연 관람은 밥과 신문을 두 달간 포기한 대가였던 셈이다. 최승일은 아마도 2등석 입장권을 예매했을 것이다. 특등석은 너무 비쌌고, 학생석은 무대에서 너무 멀었다. 난생 처음 무용 공연을 관람하는 최승희에게 음악과 조명뿐 아니라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표정까지도 지켜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산 입쌀도 제대로 사지 못해 양쌀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살 돈이 없으면 끼니를 걸러 야 했던 최승일과 최승희 가족에게는 한 장에 2원이나 하는 공연표가 사치였음에 틀림없다. 4 원이면 여덟 식구가 반달을 먹을 수 있는 쌀값이었고, 신문값을 아끼기 위해 경성도서관까지 걸어가야 하는 수고를 네 달이나 아껴줄 액수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최승일이 아낌없이 4원을 지불하고 표를 산 것은 동생 최승희의 미래가 여기에 걸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승일이 동생에게 이시이 무용공연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보다 이틀 전이 3월21일 이었다. 경성사범학교 구두시험에서 낙방한 여동생의 앞날을 걱정하던 중 경성도서관에서 이 시이 무용단의 공연소식과 이시이 바쿠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을 때였다.
“내가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를 보니까 일본에서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왔 는데 오늘부터 이틀 동안 공회당에서 공연을 갖는다면서 그 말끝에 자신은 조선에 처음 왔는 데 웬일인지 자기 마음에 조선에는 예술가가 많이 날 것 같다며 자기에게 무용예술을 배우고 자 하는 조선의 소녀가 있으면 두어 사람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더라.”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연은 이틀이 아니라 3월21일부터 3일 동안이었고 최승일이 보았다는 기 사는 3월21일의 기사였다.
만주공연을 마친 이시이 바쿠는 20일 밤 신징(新京)을 출발해 21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 하라카네 여관(原金旅館)에 여장을 풀자마자 경성일보사를 방문해 인터뷰를 가졌고, 그것이 그날 석간신문 6면에 실린 것이다.“ ... 꼭 조선의 무용을 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경성사람들은 음악이나 무용에 대해 매우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저로서는 동경하는 땅을 찾은 것처럼 기쁩니다. ... 또한 저는 이번에 조선에 온 것을 기회로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고 싶습니다. 나이는 12살부터 15살 사 이로 정말로 열심을 낼 사람이라면 두세 사람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이시이 바쿠가 어째서 ‘경성 사람들이 음악과 무용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 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음주와 가무를 좋아한다’는 의 서술을 알고 있었 거나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수도 있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 쿠는 이미 저명인사였고, 조선에 근무하는 일본 관리나 문화예술인들 중에는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사장 마쓰오카 마사오(松岡正男)는 오랜 지인이었다. 이시 이 바쿠가 조선의 문화예술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도 그다지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떤 이유로든 ‘조선인 제자를 찾는다’고 한 이시이 바쿠의 발언은 기사로 인쇄되 어 동생의 진로를 걱정하던 최승일에게 전달되었고, 최승일은 이 기사를 읽자마자 마침내 동 생의 진로를 찾았다고 흥분하면서 당장 그날 밤에 최승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승희야! 이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남은 마지막 등용문이다, 하면서 오빠는 아주 흥분해서 나 의 몸을 껴안았다.” (최승희, 1937, , 14쪽)
202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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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행복과 국민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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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무엇인가? 정치가 지향하는 길은 어디인가? 정치가 표방하는 국민이란 무엇인가? 국민이 선출한 정치권력은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해도 되는 것인가? 여당은 무엇이며 야당은 무엇인가? 진보와 보수는 국민들에게 무슨 의미인가? 누가 국민들을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갈라놓았는가? 정치보복은 무엇이며 그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수 없는 것인가? 우리에게 대통령은 무엇이며 국회의원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가? 언론은 무엇인가? 왜 언론이 정도를 걷지 않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가? 그래서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지금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국민의 참된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법과 질서는 바로 서고 있는 나라인가 아니면 권력이 법위에 존재하는 나라인가? 경제는 문제가 없으며 국민들의 생활을 나아지고 있는가? 지금은 난세인가 태평성대인가? 정치는 바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갈지(之)자인가? 국민을 위한 권력인가 군림하는 권력인가? 마이웨이, 마이동풍인가? 국민들은 왜 길거리에 나서서 목청을 높이는가? 왜 우리는 늘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며 던지는 무수한 질문이다. 이보다 더 많다. 감동적인 사회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당시의 국민적 단합과 위대한 열정, 그 감동은 어디로 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대한민국 사회는 코로나19에서부터 역대 최장의 장마와 기록적인 폭우로 곳곳이 초토화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사태는 모든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잠잠해지나 싶으면 엉뚱한 곳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해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난리가 아니다. 요즘은 서울 경기지역이 그렇다.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듯하다. 언제 어디에서 코로나19가 집단으로 번져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방역당국은 조심하라고 할 뿐이다. 초반 긴장감에 비해 많이 느슨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식당이나 다중집합장소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밀집하여 아직도 평소처럼 시끌벅적한 것을 보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이태원클럽 같은 집단 감염사태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청정국가라며 교만을 떨던 베트남이 요즘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난리가 아니다. 이런 허풍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이 부족한 탓으로 비호감국가로 전락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다. 아직 큰 소리 칠일이 아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진행형이다. 대구 경북의 초기 사태를 결코 잊어서는 코로나 난국을 헤쳐가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돌이켜 보건데 코로나19 사태는 분명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고 해외유입을 막지 않은 탓에도 기인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코로나19의 바이러스는 중국에서 발원하고 그곳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국민고통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떠나서 그렇다. 나라마다 대한민국 사람의 입국을 차단했다. 분명 해당국의 위정자들이 내린 결단이다. 물론 다른 나라들의 이런 조치는 우선적으로 자국민 보호를 전제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빗장을 열고 코로라19 해외유입자들 마저 받아들였다. 그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국민고통의 산물로 k방역을 자랑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사상 최장의 장마에다 기록적인 폭우마저 쏟아져 전국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피해규모와 지역이 전국적으로 엄청나다. 산사태와 침수지역 등 그야말로 곳곳이 쑥대밭이 되었다. 농경지침수와 주택침수, 산사태매몰지역에 이르기까지 피해가 극심하다. 인명피해와 시설피해 등도 그렇다. 폭우로 침수지역이 부산, 광주, 대전, 전주 등 대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사태피해도 컸다. 올여름 집중호우로 발생한 산사태는 모두 1,548건(627㏊), 피해액은 993억3,9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지난 1일부터 전국을 강타한 폭우로 사망자는 36명에 달하고 2만6000여건의 시설 피해가 발생했다. 시설피해는 지난 1일 이후 2만6,182건이 접수되었다. 공공시설은 1만1,108건, 사유시설은 1만5,074건으로 나타났다. 도로·교량 5,284건, 하천 1,223건, 저수지·배수로 606건, 주택 6,505건, 비닐하우스 5,832건, 축사·창고 등 2,737건 농경지 2만7,932ha 등이 피해를 입었다. 전국 11개 시·도 4,587세대 8,00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중 1,442세대 2,716명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7일 호우피해가 심각한 중부지방 7개 시·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우선 선포한 데 이어 지난 7~8일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은 남부지방 11개 시·군을 추가로 선포했다. 하지만 금산지역 등은 아직도 미뤄지고 있다. 전국에서 아우성이다. 농민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피해사각지대가 없는지 살펴보아야할 대목이다.
부동산 대책을 놓고도 전국이 난리가 아니다. 한마디로 호떡집에 불이 난 격이다.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상한제, 전월세신고제 등 이른바 임대차 3법의 후폭풍이다. 과연 얼마나 부동산 시장의 안정화에 기여할지는 세월이 말해 줄 것이다. 정치권에서조차 2주택 이상자들에게 집 한 채씩만 갖도록 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면 집을 몇 채씩 소유한 공직자 부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도 부동산 안정화대책을 거론하며 이율배반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는 사실에 국민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다. 부랴부랴 매각에 나서는 것을 보면 더욱 모양새가 좋지 않다. 집 없는 서민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에서 괴리감마저 들게 하고 있다. 임대차3법으로 서민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게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법은 있지만 법망을 벗어나는 편법과 변칙들이 새롭게 등장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후폭풍으로 반전세 현상이 가속화되고 전세매물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 아파트값이 터무니없이 올라가는 현상도 다소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종 등지는 아직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거래도 없이 값만 올라가는 현상이다. 이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해당지역에 집 없는 서민들은 한숨과 걱정만 늘고 있다.
코로나에 기록적인 폭우, 아파트값 폭등에다 경제난까지 겹쳐진 상황에서 ”과연 국민들이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에 묻고 싶다. 여기에다 늘 반목과 대립이 끊이질 않고 있다. 정치권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등이 가려운데 발바닥 긁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행복을 지켜야 하는 정치가 국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과연 정상성을 갖춘 나라의 모습인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다. 국민행복은커녕 고통만이라도 줄여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정치와 권력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국민들이 어둠의 긴 터널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선거철에 난무하던 그 화려한 장밋빛 공약들은 다 어디로 가고 살벌한 사회분위기에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허망한 모습들만 보이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요즘 국민들의 스트레스지수는 날로 높아만 가고 있다. 우리 국민들이 무슨 잘못과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국민고통이 극심한 시대에 살아가야 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 국민들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지 정치권과 권력자들은 진정으로 깊이 냉철하게 성찰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국민행복은 주지 못하더라도 고통을 배가시키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202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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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선택한 스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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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오빠가 준 여학교 졸업선물
숙명여고보 졸업식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서도 우등 졸업생 최승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동기 들과 학창시절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도 그들이 마냥 부러웠고, 졸업 후에 어떡하느냐는 질 문을 받으면 대답이 궁색했다. 동창생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졸업 후의 갈 길이 정해져 있었지만 자신의 앞날만은 아직 짙 은 안개 속이었다. 도쿄음악대학에는 원서조차 내지 못했고, 경성사범학교는 필기시험에 합격 하고도 구두시험에서 낙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교복을 갈아입으면서도 최승희는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배운 사람 구실을 할 것인지 막막했다. 유일하게 남은 길은 이틀 전날 밤 큰오빠 최승일이 넌지시 말했던 무용이었다. 물론 최승희는 탐탁하지 않았다. 일본에 갈 수 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다소 끌리지만 숙명여학교 졸업생이 춤 을 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기생이나 하는 일이 아닌가. 무용에 관해서는 최승 희의 인식도 당시의 일반인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오빠는 무용이 원래 천한 일이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것은 인류 최고(最古)의 예술이고 기생들의 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도 했다. 최승희는 열 살이나 연상이며 인생의 고 비마다 자신을 이끌어준 존경하는 오빠의 설명을 귀담아 듣기는 했지만 그다지 설득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최승희는 예술 무용은커녕 기생 무용조차 제대로 구경해 본적이 없었다. 마침내 오빠는 ‘직접 보고 결정하자’면서 무용 공연을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3월23일 저녁6 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는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바로 졸업식 날 저녁 이었으므로 최승일이 동생을 위해 준비한 값비싼 졸업선물이기도 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은 21일부터 3일간 계속되었고, 최승일 남매가 예매한 23일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공연 장소 경성 공회당은 소공동의 조선호텔 건너편이었으므로 체부동 집에서는 천천히 걸어도 20분, 전차를 타면 10분 이내의 거리였다. 당시에는 소공동을 장곡천정(長谷川町, 하세가와초)이라고 불다. 일제의 초대 조선군사령관 과 초대 통감을 지낸 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난 다음에는 2대 조선총독으로 재직하면서 무단통치를 일삼았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의 성을 붙인 것이었다. 와 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이 경성공회당을 ‘하세가와초 공회당’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조선인들의 기미만세운동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해 총독에서 해임된 후 실의 속에 사망한 하세가와의 이름을 경성 중심가에 붙인 것이 다소 역설적이었다.
1920년 7월10일에 낙성된 경성공회당은 경성상업회의소의 건물이었으나 상업회의소는 1층만 사용했고 천정을 높게 올린 2층은 연회나 공연을 위한 극장으로 사용되었다. 경성공회당의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1963)였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1921년)과 중앙고등학교 동관과 서관(1921-23년), 그리고 덕수궁 석조전(1935년) 등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경성공회당 건축계획을 설명하면서 “길 건너의 조선호텔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 않게 하 려고 천정을 한껏 높였고, 반자층을 따로 만들지 않기로 했으므로 중간에 기둥을 세울 수 없 어 돔 지붕으로 덮”었다고 했다. 경성공회당의 면적은 2백평으로 1천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은 와 가 공동 주최했으므로 공연 3주일 전부 터 대대적인 언론 홍보작업에 돌입했으나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최승희가
이 공회당에서 공연했을 때 ‘이시이 바쿠의 공연 때와 달리 공회당이 만원이었다’는 신문보도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은 와 가 공동 주최했으므로 공연 3주일 전부 터 대대적인 언론 홍보작업에 돌입했으나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최승희가 이 공회당에서 공연했을 때 ‘이시이 바쿠의 공연 때와 달리 공회당이 만원이었다’는 신문보도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최승일과 최승희 남매는 공연 시간에 늦지 않도록 집을 나섰다.
최승일은 양복 정장, 최승희 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의 소박하지만 단정하고 맵시있는 차림이었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설 때 가족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최승일의 아내 마현경조차 남편과 그렇게 동반으로 극장 나 들이를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4남매의 둘째 최영희와 셋째 최승오도 가정형편 때문에라 도 오빠와 막내처럼 공연 구경을 갈 생각조차 못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의 부러움을 등 뒤에 받으며 집을 나서는 오누이의 모습은 데이트에 나선 한쌍의 남녀 처럼 보였을 것이다. 귀공자 타입의 스물여섯 살 청년 최승일과 열여섯 살로 이미 숙녀티가 나는 막내 누이 최승희의 극장 데이트는 거의 1백 년 전의 일이지만 마치 눈앞에 보는 것처 럼 멋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20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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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와 유비무환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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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장마는 14일까지 이어질 경우 52일로 역대 최장기간을 기록하게 된다. 폭우피해마저 심각하다. 장마의 집중호우에다 태풍 하구핏의 영향으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가 이어져 피해를 더했다. 여기에다 5호 태풍 장미도 올라오고 있다. 두 달 이상이나 비가 내리는 중국과 일본의 비 피해 소식이 남의 일처럼 생각했는데 그 심각한 호우피해상황을 직접 당하고 보니 모두가 망연자실이다. 수도권과 중부지방에 이어 남부지역에도 물폭탄이 쏟아지는 등 9일 넘게 전국적으로 장맛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집중호우와 폭우, 물폭탄, 장대비, 물바다, 침수, 호우경보, 호우주의보, 홍보경보, 홍수주의보, 산사태, 주택매몰, 제방붕괴, 도로유실, 이재민, 사망사고. 기록적 강우, 차량침수 등의 용어가 쏟아지며 호우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 뚫린 폭우가 내렸다. 산사태로 도로가 막히고 제방이 붕괴되고 농경지가 침수되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인명피해도 속출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충북선과 광주선, 장항선 등 6개 노선의 열차운행도 중단됐다. 경기와 강원, 충청에 특별재난지역선포가 되었고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9일 중·남부지방 집중호우로 사망 29명, 실종13명이 발생하고 인명피해가 늘어나고 있다. 이재민도 전국 12개 시도에서 무려 3,100여 가구에 4,86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주택과 비닐하우스, 산사태, 도로 유실, 교량붕괴 등 시설피해가 9,400여건이고 침수 유실된 농경지 피해는 9,317헥타에 여의도의 32배가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짧은 기간에 기록적인 강우량을 기록했다.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강원 철원에는 755㎜, 경기 연천에 715㎜, 충북 제천에 432㎜ 등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1년에 올 비가 거의 다 왔을 정도이다. 8일에도 광주 전남에 이틀 새 400mm, 전주 339.6mm 등 많은 비가 내렸다. 시간당 30∼50mm로 쏟아 부었다.
장마가 물러가고 비가 그치면 전국적인 피해규모와 문제점 등이 드러날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호우피해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뼈아픈 교훈을 던져주었다. 이번 집중호우는 중부지방에 앞서 부산, 대전지역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고 주택과 도로 침수 등의 피해를 가져왔다. 부산은 침수소동이 주말에도 또 이어졌다. 광주, 전주 등 하천이 범람위기를 맞았고 주요도시마다 도심 곳곳이 침수되어 물난리를 겪었다. 전남 곡성에서는 산사태로 주택이 매몰되어 5명의 사망사고도 발생했다. 안타까운 것은 6일 오전 강원도 춘천 의암호에서 경찰 순찰정 등 선박 3척이 침몰해 3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댐의 물이 방류되어 급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작업도중에 빚어진 황당한 사고로 거센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이번 집중호우에 도로가 끊기고 철길이 막히고 저수지 둑이 터지고 하천이 넘치고 농경지가 침수되고 그야말로 물바다를 연상시켰다. 홍수주의보와 경보가 내려지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형국이 이어졌다. 산사태로 집이 매몰되고 물에 잠기고 흙탕물에 가재도구가 엉망이 되었다. 이재민들은 황당한 피해 상황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상습침수지역은 어김없이 물이 차고 넘쳤고 곳곳에서 발생한 산사태는 산림관리와 절개지 및 위험지역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곳곳에 산을 절개하고 만들어진 태양광시설 상당수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며 산사태취약시설임을 보여줬다. 산자락마다 집중호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 호소도 잇따르고 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지역도 산림을 훼손한 채 절개지에 태양광시설이 들어서 있는 곳이 집중호우의 직격탄을 맞았다.
물론 집중호우에 산사태와 하천범람은 피할 수 없는 경우라고 하지만 분명히 평소 관리와 대처를 잘 해 나간다면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른바 치산치수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한 대처가 소홀히 이뤄진 것은 무사 안일한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다. 강과 하천의 관리는 위험상황을 감안하여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번 집중호우에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 주요도시가 침수되는 등 취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과거에도 반복되는 상황이 여전히 지속되는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피해상황이 발생하면 그 때만 반짝 대처이고 잠잠해지면 후속대책을 소홀히 한 채 유야무야해 왔던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말로만 자연재해 예방을 말하고 후속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악순환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기상청은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 일기예보의 정확성이나 분석력이 크게 떨어져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그동안 갖가지 문제로 불신을 자초하고 이제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또다시 겉도는 예보능력으로 국민들의 비난을 사고야 말았다. 요즘 국민들은 지나간 일기예보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기록적인 장마기간에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내린 이번 여름철의 장기예보와 관련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예보를 내놓았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싶다. 이런 기상청의 문제점은 차제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에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비무환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적정수준의 예측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불과 하루 전의 강수량 예보조차 맞지 않자 일기예보를 중계하느냐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오고 있다.
올해 코로나19 사태에서부터 집중호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어렵고 힘겨운 상황들이 겹치고 있다. 여기에다 경제난이며 집값폭등, 실업대란, 폐업대란 등이 국민들을 옥죄고 있다. 나날이 불확실성이 커지고 모든 게 불안한 상황이다. 그야말로 국민들은 정신적인 고통이 심화되고 있다. 악재가 겹치면서 국민들의 정신건강이 걱정스럽다. 어언 입추도 지났다. 이제 여름이 다 가는데 가을걷이들이 다 없어져 버렸으니 농민들의 허탈감은 더해 갈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집중호우의 자연재해도 인재라는 비난도 나올 만하다. 평소 조금만 더 하천관리를 잘하고 산림을 훼손하지 않고 산사태위험지역을 해소했더라면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회한을 갖게 된다. 자연재해라도 안일한 자세로 유사한 피해가 반복되는 악순환은 막아야 한다. 이재민들과 피해농민들에 대한 특단의 대책도 절실하다. 멘붕에 빠진 이재민들의 정신적인 치유대책도 함께 나와야 한다. 특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차제에 전면적인 취약지역 실태파악과 장단기적인 치산치수 대책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 물론 지금 상황은 사후약방문격이지만 말이다.
20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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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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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1926년 3월6일부터 3일간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치러진 필기시험에서 최승희는 탁월한 성적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3월19일의 면접시험에서 최승희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는데 이유는 또다시 ‘연령 미달’이었다고 했다.
“... 당장 준비를 해서 사범학교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은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남몰래 자신도 있었고 예상대로 합격했습니다. ... 이 기쁨도 헛된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불합격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음악학교에 가려고 했을 때와 같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가슴 아픈 이유로 구두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최승희, 1936, , 34-35)
최승희의 필기시험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그의 조선어판 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1백명 모집에 8백60명의 응모자 중에서 일곱 번째로 합격이 되었다. 그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중에 우등생이 아홉 명인데 내가 여덟 번째로 우등 졸업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 사범학교의 시험성적이 나은 편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울어?’ 오빠가 다그쳐 물었다. ‘나이가 적으니 일 년만 놀다가 내년에 오래.’”
최승희의 기억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해 경성사범학교 여자연습과의 정원은 80명이었고, 응시자는 3백94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경성사범학교 지원상황은 1926년 2월18일의 에 자세히 보도되어 있었다.
“경성사범학교에서는 올해 보통과 1백명, 남자연습과 갑조 80명, 을조 50명, 여자연습과 80명의 예정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는데, 16일까지 지원자 수는 보통과 1천5백명, 남자연습과 갑을조를 합하여 1천2백명, 여자연습과 3백94명에 달하여, 작년도의 보통과 1천8백명, 남자연습과 8백50명, 여자연습과 2백70명으로부터 보통과에서는 감소하였으나 남녀 연습과에서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반적 지원 상황에는 기억에 착오가 있었더라도 자기 성적에 대한 기억은 정확했을 것이다. 필기시험 성적이 3백94명 중에서 7등이었다면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다. 관비학생(60명)이든 사비학생(20명)이든 넉넉히 합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불합격처리 되었다.
‘연령 미달’이라는 낙방 이유는 합당했을까? 여기에도 의문의 여지는 있다. 경성사범학교의 교칙에는 보통과의 연령 규칙은 있지만(12세, 제64조) 연습과에는 명시적인 연령 제한(65조)이 없었다. 다만 연습과 지원자는 5년제 소학교(일본인)나 4년제 보통학교(조선인) 졸업자여야 했으므로 소학교와 보통학교에 연령제한(12세)을 둔 조선교육령 16조와 10조를 적용하면 조선인은 16세, 일본인은 17세가 되어야 사범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도쿄 음악대학 지원할 때와 똑같은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지원자 평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최승희를 입학시키는 것이 학교에게는 부담일 수 있었을 것이다. 1년의 연습과를 마치고 교원으로 부임해도 만15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화성(朴花城, 1903-1998)은 1918년 3월에 숙명여고보를 졸업(9회)한 직후, 15세의 나이로 천안과 아산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 근무를 시작했었다.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아기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경성사범학교가 필기시험 7등의 지원자를 낙방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교칙에 명시된 것도 아니고 선례까지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승희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는 최승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경성사범학교에 합격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했더라면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린 ‘조선의 무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해 3월19일 최승희가 구술시험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큰오빠 최승일은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 그만 두어라, 승희야, 그리고 내 이야기나 좀 들어 보아라.” 진학에 거듭 실패한 최승희의 앞날은 이제 오빠의 그 “이야기”에 온통 매달리게 되었다.
20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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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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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초비상이다. 중국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는 초기에는 우한폐렴이란 용어로 등장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암울한 바이러스 세상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온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2020년 8월 2일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214개 국가에서 무려 17,99만0,233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68만7,564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미국이 4,76만2,945명의 확진자에 사망자만도 15만7,825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브라질과 인도,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페루 순이다. 우리나라도 1만4,336명의 확진자에 301명이 사망했다. 전 세계적으로 74위이다. 청정지역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빗장을 걸어 잠그던 베트남도 갑작스럽게 발생해 586명의 확진자에 3명이 사망했다. 정작 코로나19 발원지였던 중국은 8만4,337명에 4,636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지만 이 수치의 신뢰성에 전 세계가 의문을 던지고 있기는 하다.
중국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무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데도 그 책임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것 같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의 신뢰도 무너진 지 오래이다. 중국을 비호하고 초기 대응을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세계인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피해국가인 미국은 아예 탈퇴를 선언할 정도이다. 국제적으로 천문학적인 피해보상 문제도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중국은 전 세계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놓고도 아직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19년 12월 1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우한화난수산물도매시장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적인 대유행인 팬데믹 상태로 몰아넣는 데는 불과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대한민국도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1월 20일이었다. 우한시에 거주하는 35세 중국인 여성으로 국내입국자였다.
2월 19일부터 대구·경북지역에 신천지 대구교회를 중심으로 다수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집단감염이 시작되었다. 신천지교인들이 슈퍼전파자로 지목되면서 비상사태가 이어지고 혼돈의 시기를 맞는다. 대구·경북은 그야말로 유령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까지 처했다. 이후에도 구로구 콜센터, 이태원클럽, 대전방문판매업체 등의 집단감염사례가 이어진다. 학교개학마저 연기되고 공적마스크를 약국을 통해 공급했다. 이제는 마스크가 상용화되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스크 세상이다. 이런 혼돈의 시기가 지난 7개월의 시간표 속에 담겨져 있다.
경제도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다.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급증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지만 한 때 반짝 경기만을 유도한 채 상황을 도로 악화되고 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 3.3%를 나타냈다. 이는 외환위기 발생이후 1998년 1분기 마이너스 6.8% 이후 22년 만에 가장 낮은 최악의 수준으로 조사됐다. 물론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이 국경을 걸어 잠그면서 자동차, 스마트폰 등 수출이 크게 줄어든 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코로나 충격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데 더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문제는 자영업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제조업이나 수출기업들의 어려움은 더할 나위가 없다. 어렵지 않은 곳이 없다. 모든 지표가 부정적인 것을 보면 지금이 최악의 상황임을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겼었던 상황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던 베트남도 이제는 거꾸로 확진자가 발생하고 경제난을 겪으면서 다급해지자 이제는 대한민국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까지 되돌려 보냈던 배신감으로 인해 베트남을 보는 시각이 180도로 달라졌다. 우호국가인 줄 알았던 베트남이 코로나19 사태로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해 430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광객이 찾았지만 이제는 싸늘해졌다. 그 유명한 관광지 다낭도 확진자 발생으로 초토화되고 있다고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못했던 베트남이 대한민국을 외면하면서 이제 자업자득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기업들의 투자마인드도 꺾여 인근 미얀마나 인도네시아 등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래저래 베트남은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는 바람에 철퇴를 맞고 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실업자 3,000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이웃나라와의 관계마저 재설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환심을 다시 사기에는 좀처럼 쉽지 않을 듯싶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배신의 아픔이 크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가 재조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대립상황이 과거 냉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점입가경이다. 휴스턴의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할 정도이다. 물론 중국도 청두 미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며 맞불을 놓았지만 대립양상이 심상치 않다. 천멸중공(天滅中共)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하늘이 중국공산당을 없앤다는 말로서 이를 외쳐대는 미국과 동조하는 서방국가들의 움직임이 거세다. 중국은 주변 16개국과 분쟁이 진행 중이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도 결코 간단치 않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 제품 불매운동도 거세다. 영국 등 서방세계가 모두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호응하고 나서고 있다. 세계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모습이다. 그동안 중국과의 포용을 상징하던 닉슨독트린의 폐기도 선언했다. 미국의 강경자세는 자유진영이냐 공산진영이냐의 선택지에 천멸중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다. 미국과 같은 위상을 노리며 패권경쟁을 벌여온 중국이 혹독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 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두 달 동안 쏟아 붓던 폭우로 인해 28개성에서 최악의 대홍수피해가 발생해 수재민이 무려 5,5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크고 작은 댐제방들이 무너지고 세계 최대의 댐인 싼샤댐 마저 붕괴위험에 처해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상 최악의 물난리로 아비규환이다. 마치 지옥 같은 모습이다. 코로나19로 유령도시를 방불케 하던 우한시도 도시가 침수되어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의 폭우 상황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처참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뭄으로 고통 받는 곳도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재앙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이처럼 전 세계가 혼돈과 고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남의 일처럼 알았던 폭우도 대전지역과 부산지역, 서울에까지 쏟아져 아파트가 침수되고 강남역 일대가 난리가 났다. 중국의 폭우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라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피로감도 날로 더해가고 있다. 아직도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피해도 지속되고 있다. 과거 IMF경제체제와 금융위기 등을 경험한 나라이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과연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하느냐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있다. 천멸중공을 표방하는 자유세계진영논리에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알게 된 베트남의 배신과 이중적인 자세는 국민들이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보여준 우리 대한민국의 호의와 신의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혼돈의 시대를 맞아 개인은 물론 대한민국과 국민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고통의 시기에 국민들을 위하여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의 눈물을 닦아 줄 위정자와 지도자들의 모습도 그려본다. 답답한 국민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인물, 난세에 나타난다는 영웅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20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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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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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원서도 접수해 보지 못한 채 음악학교 진학은 무산되었지만 최승희는 실망하지 않았다. 곧바로 경성사범학교 진학 계획을 세웠는데 아마도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작은오빠 최승오의 조언을 받았을 것이다. 굳이 가족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당시 경성사범학교는 ‘취업이 보장된 떠오르는 명문’으로 세간의 평판이 높았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했던 학교였다.
1922년에 개교한 경성사범학교는 들불처럼 번진 조선의 교육열을 배경으로 탄생한 학교였다.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의 저조한 취학률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새로 창간된 와 , 등의 민족지들은 교육개선을 시급한 과제로 부각시켰다. 총독부의 교육억제와 차별정책이 전방위적으로 비판됐고 학교 증설과 교사 충원의 요구가 빗발쳤다.
여론에 밀린 조선총독부도 교육 개선에 나섰지만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학교 증설 문제는 그로부터 10년이나 지난 1929년에야 ‘한 면에 적어도 하나의 보통학교를 설립한다’는 1면1교 정책을 수립했고 그나마 그것이 달성된 것은 1936년이 되어서였다. 교원 양성 문제에는 총독부가 즉각 움직였고 경성사범학교를 설립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다.
일제 강점 직전까지 조선 정부는 한성사범학교(1895)를 운영했고, 서울의 국민사범학교(1905)과 서우사범학교(1907), 대구의 대구사범학교(1906) 등이 설립되었다. 뒤이어 평양과 원산과 개천, 진주와 광주와 평택 등에도 민간 사범학교들이 설립되어 교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일제는 강점이후 한성사범학교를 포함해 모든 사립사범학교를 폐지하고, 사범학교 기능을 관립고등보통학교에 복속시켰다. 즉 관립고보에 사범과 1년 과정을 따로 두어서 교원이 되려는 학생들이 이를 이수하게 했다. 이로써 교원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사람만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삼일운동 직후부터 시작된 학교 증설과 교원 충원 요구에 압력을 받은 총독부는 1921년 5월부터 경성사범학교를 시범 운영했고, 1922년 2월 사범학교 규정을 제정한 뒤 4월에는 남학생 1백명을 선발해 경성사범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했다. 이 학교는 중등학교였으므로 소학교를 졸업한 일본인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모두 지원할 수 있었고, 5년의 수업연한을 이수한 뒤에 조선 각지의 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경성사범학교는 관립학교였으므로 학비가 없었고, 특히 ‘관비’학생으로 선발되면 매월 15원의 생활비까지 지급받았다. 학비가 면제된 대신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의무적으로 교원에 복무해야 했다. 의무 복무연한은 관비학생이 5년, 사비학생은 2년이었다.
경성사범학교의 인기는 대폭발했다. 학비가 무료인데다가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개교 2년만인 1924년에는 1백명 모집에 4천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지원자 중에는 보통학교 졸업생보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더 많았다. 이에 경성사범학교는 1923년부터 교과과정을 보통과와 연습과로 나누었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지원하는 연습과의 학생들은 1년의 연수기간만 이수하면 바로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이 때문에 연습과 지원자는 더욱 늘었다.
1925년부터는 여자연습과가 신설되어 여고보를 졸업한 여학생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최승희가 지원한 것이 바로 경성사범 여자연습과였다. 1926년 2월18일의 에 따르면 80명을 선발하는 여자연습과에 3백94명이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이미 5대1의 경쟁률이었다.
당시 는 여자연습과 지원자들을 출신학교별로 분류했는데 고등여학교 출신인 일본학생이 1백28명, 여고보 출신인 조선학생이 1백25명이었다. 조선학생들 중에서는 경성여고보와 평양여고보 졸업생이 42명과 45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경성의 숙명(19명)과 진명(11명)과 동덕(3명)과 이화(1명), 개성의 호수돈(3명), 평양의 정의(1명)여학교 등의 순서였다.
최승희는 19명의 숙명여고보 출신 지원자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3월7일 와 에 발표된 숙명여고보 졸업자의 진로 명단에는 경성사범 입학예정자가 18명으로 되어 있었다. 19명중 1명이 낙방한 것이다. 그 유일한 낙방자가 바로 최승희였다.
2020-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