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 NEWS
-
제자가 선택한 스승 2
© 세종타임즈
쌀 반 가마의 무용 공연 입장료
이시이 바쿠의 공연이 성황을 이루지 못한 것은 비싼 입장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입장권 은 특등석이 3원, 2등석이 2원, 학생석이 80전이었다. 1926년의 1원은 오늘날의 대략 8천원 (구매력 기준)이므로 특등석이 2만5천원, 2등석은 1만5천원 정도였다. 최승희도 졸업식을 치 룬 마당에 6천원짜리 학생석 표를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연 입장료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그닥 비싸게 느껴지지 않지만 당시 물가와 비교 하면 아주 비쌌음을 알 수 있다. 1930년의 쌀 한가마니(80Kg)가 13원이었고 그 무렵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80Kg정도였으므로 2등석 입장권 가격은 한 사람의 두 달 치 쌀값이 었다. 또 당시 신문구독료가 1원이었으므로 두 달 치 신문 값이기도 했다.
그날 경성의 오누 이 인텔리의 공연 관람은 밥과 신문을 두 달간 포기한 대가였던 셈이다. 최승일은 아마도 2등석 입장권을 예매했을 것이다. 특등석은 너무 비쌌고, 학생석은 무대에서 너무 멀었다. 난생 처음 무용 공연을 관람하는 최승희에게 음악과 조명뿐 아니라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표정까지도 지켜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산 입쌀도 제대로 사지 못해 양쌀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살 돈이 없으면 끼니를 걸러 야 했던 최승일과 최승희 가족에게는 한 장에 2원이나 하는 공연표가 사치였음에 틀림없다. 4 원이면 여덟 식구가 반달을 먹을 수 있는 쌀값이었고, 신문값을 아끼기 위해 경성도서관까지 걸어가야 하는 수고를 네 달이나 아껴줄 액수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최승일이 아낌없이 4원을 지불하고 표를 산 것은 동생 최승희의 미래가 여기에 걸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승일이 동생에게 이시이 무용공연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보다 이틀 전이 3월21일 이었다. 경성사범학교 구두시험에서 낙방한 여동생의 앞날을 걱정하던 중 경성도서관에서 이 시이 무용단의 공연소식과 이시이 바쿠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을 때였다.
“내가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를 보니까 일본에서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왔 는데 오늘부터 이틀 동안 공회당에서 공연을 갖는다면서 그 말끝에 자신은 조선에 처음 왔는 데 웬일인지 자기 마음에 조선에는 예술가가 많이 날 것 같다며 자기에게 무용예술을 배우고 자 하는 조선의 소녀가 있으면 두어 사람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더라.”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연은 이틀이 아니라 3월21일부터 3일 동안이었고 최승일이 보았다는 기 사는 3월21일의 기사였다.
만주공연을 마친 이시이 바쿠는 20일 밤 신징(新京)을 출발해 21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 하라카네 여관(原金旅館)에 여장을 풀자마자 경성일보사를 방문해 인터뷰를 가졌고, 그것이 그날 석간신문 6면에 실린 것이다.“ ... 꼭 조선의 무용을 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경성사람들은 음악이나 무용에 대해 매우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저로서는 동경하는 땅을 찾은 것처럼 기쁩니다. ... 또한 저는 이번에 조선에 온 것을 기회로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고 싶습니다. 나이는 12살부터 15살 사 이로 정말로 열심을 낼 사람이라면 두세 사람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이시이 바쿠가 어째서 ‘경성 사람들이 음악과 무용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 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음주와 가무를 좋아한다’는 의 서술을 알고 있었 거나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수도 있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 쿠는 이미 저명인사였고, 조선에 근무하는 일본 관리나 문화예술인들 중에는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사장 마쓰오카 마사오(松岡正男)는 오랜 지인이었다. 이시 이 바쿠가 조선의 문화예술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도 그다지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떤 이유로든 ‘조선인 제자를 찾는다’고 한 이시이 바쿠의 발언은 기사로 인쇄되 어 동생의 진로를 걱정하던 최승일에게 전달되었고, 최승일은 이 기사를 읽자마자 마침내 동 생의 진로를 찾았다고 흥분하면서 당장 그날 밤에 최승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승희야! 이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남은 마지막 등용문이다, 하면서 오빠는 아주 흥분해서 나 의 몸을 껴안았다.” (최승희, 1937, , 14쪽)
2020-08-16
-
국민행복과 국민고통
© 세종타임즈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가 지향하는 길은 어디인가? 정치가 표방하는 국민이란 무엇인가? 국민이 선출한 정치권력은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해도 되는 것인가? 여당은 무엇이며 야당은 무엇인가? 진보와 보수는 국민들에게 무슨 의미인가? 누가 국민들을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갈라놓았는가? 정치보복은 무엇이며 그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수 없는 것인가? 우리에게 대통령은 무엇이며 국회의원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가? 언론은 무엇인가? 왜 언론이 정도를 걷지 않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가? 그래서 얻는 이득은 무엇인가? 지금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 국민의 참된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가? 법과 질서는 바로 서고 있는 나라인가 아니면 권력이 법위에 존재하는 나라인가? 경제는 문제가 없으며 국민들의 생활을 나아지고 있는가? 지금은 난세인가 태평성대인가? 정치는 바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갈지(之)자인가? 국민을 위한 권력인가 군림하는 권력인가? 마이웨이, 마이동풍인가? 국민들은 왜 길거리에 나서서 목청을 높이는가? 왜 우리는 늘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며 던지는 무수한 질문이다. 이보다 더 많다. 감동적인 사회 모습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당시의 국민적 단합과 위대한 열정, 그 감동은 어디로 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대한민국 사회는 코로나19에서부터 역대 최장의 장마와 기록적인 폭우로 곳곳이 초토화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19사태는 모든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잠잠해지나 싶으면 엉뚱한 곳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해 온통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난리가 아니다. 요즘은 서울 경기지역이 그렇다.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듯하다. 언제 어디에서 코로나19가 집단으로 번져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방역당국은 조심하라고 할 뿐이다. 초반 긴장감에 비해 많이 느슨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식당이나 다중집합장소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밀집하여 아직도 평소처럼 시끌벅적한 것을 보면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이태원클럽 같은 집단 감염사태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청정국가라며 교만을 떨던 베트남이 요즘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난리가 아니다. 이런 허풍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역지사지의 마음이 부족한 탓으로 비호감국가로 전락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다. 아직 큰 소리 칠일이 아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진행형이다. 대구 경북의 초기 사태를 결코 잊어서는 코로나 난국을 헤쳐가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돌이켜 보건데 코로나19 사태는 분명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고 해외유입을 막지 않은 탓에도 기인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누가 뭐래도 코로나19의 바이러스는 중국에서 발원하고 그곳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의 국민고통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떠나서 그렇다. 나라마다 대한민국 사람의 입국을 차단했다. 분명 해당국의 위정자들이 내린 결단이다. 물론 다른 나라들의 이런 조치는 우선적으로 자국민 보호를 전제로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빗장을 열고 코로라19 해외유입자들 마저 받아들였다. 그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국민고통의 산물로 k방역을 자랑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사상 최장의 장마에다 기록적인 폭우마저 쏟아져 전국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피해규모와 지역이 전국적으로 엄청나다. 산사태와 침수지역 등 그야말로 곳곳이 쑥대밭이 되었다. 농경지침수와 주택침수, 산사태매몰지역에 이르기까지 피해가 극심하다. 인명피해와 시설피해 등도 그렇다. 폭우로 침수지역이 부산, 광주, 대전, 전주 등 대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사태피해도 컸다. 올여름 집중호우로 발생한 산사태는 모두 1,548건(627㏊), 피해액은 993억3,9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지난 1일부터 전국을 강타한 폭우로 사망자는 36명에 달하고 2만6000여건의 시설 피해가 발생했다. 시설피해는 지난 1일 이후 2만6,182건이 접수되었다. 공공시설은 1만1,108건, 사유시설은 1만5,074건으로 나타났다. 도로·교량 5,284건, 하천 1,223건, 저수지·배수로 606건, 주택 6,505건, 비닐하우스 5,832건, 축사·창고 등 2,737건 농경지 2만7,932ha 등이 피해를 입었다. 전국 11개 시·도 4,587세대 8,009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중 1,442세대 2,716명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7일 호우피해가 심각한 중부지방 7개 시·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우선 선포한 데 이어 지난 7~8일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은 남부지방 11개 시·군을 추가로 선포했다. 하지만 금산지역 등은 아직도 미뤄지고 있다. 전국에서 아우성이다. 농민들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피해사각지대가 없는지 살펴보아야할 대목이다.
부동산 대책을 놓고도 전국이 난리가 아니다. 한마디로 호떡집에 불이 난 격이다.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상한제, 전월세신고제 등 이른바 임대차 3법의 후폭풍이다. 과연 얼마나 부동산 시장의 안정화에 기여할지는 세월이 말해 줄 것이다. 정치권에서조차 2주택 이상자들에게 집 한 채씩만 갖도록 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면 집을 몇 채씩 소유한 공직자 부자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도 부동산 안정화대책을 거론하며 이율배반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는 사실에 국민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다. 부랴부랴 매각에 나서는 것을 보면 더욱 모양새가 좋지 않다. 집 없는 서민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에서 괴리감마저 들게 하고 있다. 임대차3법으로 서민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게 될지는 아직은 미지수이다. 법은 있지만 법망을 벗어나는 편법과 변칙들이 새롭게 등장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 후폭풍으로 반전세 현상이 가속화되고 전세매물이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울 아파트값이 터무니없이 올라가는 현상도 다소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종 등지는 아직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거래도 없이 값만 올라가는 현상이다. 이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해당지역에 집 없는 서민들은 한숨과 걱정만 늘고 있다.
코로나에 기록적인 폭우, 아파트값 폭등에다 경제난까지 겹쳐진 상황에서 ”과연 국민들이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에 묻고 싶다. 여기에다 늘 반목과 대립이 끊이질 않고 있다. 정치권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등이 가려운데 발바닥 긁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정치인들이라는 것이다. 국민들의 행복을 지켜야 하는 정치가 국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으니 과연 정상성을 갖춘 나라의 모습인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다. 국민행복은커녕 고통만이라도 줄여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정치와 권력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국민들이 어둠의 긴 터널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선거철에 난무하던 그 화려한 장밋빛 공약들은 다 어디로 가고 살벌한 사회분위기에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허망한 모습들만 보이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요즘 국민들의 스트레스지수는 날로 높아만 가고 있다. 우리 국민들이 무슨 잘못과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국민고통이 극심한 시대에 살아가야 하는지 자못 궁금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 국민들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야 하는지 정치권과 권력자들은 진정으로 깊이 냉철하게 성찰하는 자세가 절실하다. 국민행복은 주지 못하더라도 고통을 배가시키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2020-08-16
-
제자가 선택한 스승 1
© 세종타임즈
큰 오빠가 준 여학교 졸업선물
숙명여고보 졸업식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서도 우등 졸업생 최승희의 마음은 착잡했다. 동기 들과 학창시절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도 그들이 마냥 부러웠고, 졸업 후에 어떡하느냐는 질 문을 받으면 대답이 궁색했다. 동창생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졸업 후의 갈 길이 정해져 있었지만 자신의 앞날만은 아직 짙 은 안개 속이었다. 도쿄음악대학에는 원서조차 내지 못했고, 경성사범학교는 필기시험에 합격 하고도 구두시험에서 낙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교복을 갈아입으면서도 최승희는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배운 사람 구실을 할 것인지 막막했다. 유일하게 남은 길은 이틀 전날 밤 큰오빠 최승일이 넌지시 말했던 무용이었다. 물론 최승희는 탐탁하지 않았다. 일본에 갈 수 있다는 것에는 마음이 다소 끌리지만 숙명여학교 졸업생이 춤 을 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기생이나 하는 일이 아닌가. 무용에 관해서는 최승 희의 인식도 당시의 일반인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오빠는 무용이 원래 천한 일이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것은 인류 최고(最古)의 예술이고 기생들의 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도 했다. 최승희는 열 살이나 연상이며 인생의 고 비마다 자신을 이끌어준 존경하는 오빠의 설명을 귀담아 듣기는 했지만 그다지 설득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최승희는 예술 무용은커녕 기생 무용조차 제대로 구경해 본적이 없었다. 마침내 오빠는 ‘직접 보고 결정하자’면서 무용 공연을 함께 보러 가기로 했다. 3월23일 저녁6 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는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바로 졸업식 날 저녁 이었으므로 최승일이 동생을 위해 준비한 값비싼 졸업선물이기도 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은 21일부터 3일간 계속되었고, 최승일 남매가 예매한 23일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공연 장소 경성 공회당은 소공동의 조선호텔 건너편이었으므로 체부동 집에서는 천천히 걸어도 20분, 전차를 타면 10분 이내의 거리였다. 당시에는 소공동을 장곡천정(長谷川町, 하세가와초)이라고 불다. 일제의 초대 조선군사령관 과 초대 통감을 지낸 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난 다음에는 2대 조선총독으로 재직하면서 무단통치를 일삼았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1850-1924)의 성을 붙인 것이었다. 와 를 비롯한 많은 문헌들이 경성공회당을 ‘하세가와초 공회당’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조선인들의 기미만세운동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해 총독에서 해임된 후 실의 속에 사망한 하세가와의 이름을 경성 중심가에 붙인 것이 다소 역설적이었다.
1920년 7월10일에 낙성된 경성공회당은 경성상업회의소의 건물이었으나 상업회의소는 1층만 사용했고 천정을 높게 올린 2층은 연회나 공연을 위한 극장으로 사용되었다. 경성공회당의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1963)였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1921년)과 중앙고등학교 동관과 서관(1921-23년), 그리고 덕수궁 석조전(1935년) 등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경성공회당 건축계획을 설명하면서 “길 건너의 조선호텔에 비해 왜소해 보이지 않게 하 려고 천정을 한껏 높였고, 반자층을 따로 만들지 않기로 했으므로 중간에 기둥을 세울 수 없 어 돔 지붕으로 덮”었다고 했다. 경성공회당의 면적은 2백평으로 1천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은 와 가 공동 주최했으므로 공연 3주일 전부 터 대대적인 언론 홍보작업에 돌입했으나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최승희가
이 공회당에서 공연했을 때 ‘이시이 바쿠의 공연 때와 달리 공회당이 만원이었다’는 신문보도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은 와 가 공동 주최했으므로 공연 3주일 전부 터 대대적인 언론 홍보작업에 돌입했으나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최승희가 이 공회당에서 공연했을 때 ‘이시이 바쿠의 공연 때와 달리 공회당이 만원이었다’는 신문보도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는 관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최승일과 최승희 남매는 공연 시간에 늦지 않도록 집을 나섰다.
최승일은 양복 정장, 최승희 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의 소박하지만 단정하고 맵시있는 차림이었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설 때 가족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최승일의 아내 마현경조차 남편과 그렇게 동반으로 극장 나 들이를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4남매의 둘째 최영희와 셋째 최승오도 가정형편 때문에라 도 오빠와 막내처럼 공연 구경을 갈 생각조차 못했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의 부러움을 등 뒤에 받으며 집을 나서는 오누이의 모습은 데이트에 나선 한쌍의 남녀 처럼 보였을 것이다. 귀공자 타입의 스물여섯 살 청년 최승일과 열여섯 살로 이미 숙녀티가 나는 막내 누이 최승희의 극장 데이트는 거의 1백 년 전의 일이지만 마치 눈앞에 보는 것처 럼 멋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2020-08-09
-
자연재해와 유비무환의 자세
© 세종타임즈
올해 여름장마는 14일까지 이어질 경우 52일로 역대 최장기간을 기록하게 된다. 폭우피해마저 심각하다. 장마의 집중호우에다 태풍 하구핏의 영향으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가 이어져 피해를 더했다. 여기에다 5호 태풍 장미도 올라오고 있다. 두 달 이상이나 비가 내리는 중국과 일본의 비 피해 소식이 남의 일처럼 생각했는데 그 심각한 호우피해상황을 직접 당하고 보니 모두가 망연자실이다. 수도권과 중부지방에 이어 남부지역에도 물폭탄이 쏟아지는 등 9일 넘게 전국적으로 장맛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집중호우와 폭우, 물폭탄, 장대비, 물바다, 침수, 호우경보, 호우주의보, 홍보경보, 홍수주의보, 산사태, 주택매몰, 제방붕괴, 도로유실, 이재민, 사망사고. 기록적 강우, 차량침수 등의 용어가 쏟아지며 호우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 뚫린 폭우가 내렸다. 산사태로 도로가 막히고 제방이 붕괴되고 농경지가 침수되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인명피해도 속출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충북선과 광주선, 장항선 등 6개 노선의 열차운행도 중단됐다. 경기와 강원, 충청에 특별재난지역선포가 되었고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9일 중·남부지방 집중호우로 사망 29명, 실종13명이 발생하고 인명피해가 늘어나고 있다. 이재민도 전국 12개 시도에서 무려 3,100여 가구에 4,86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주택과 비닐하우스, 산사태, 도로 유실, 교량붕괴 등 시설피해가 9,400여건이고 침수 유실된 농경지 피해는 9,317헥타에 여의도의 32배가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짧은 기간에 기록적인 강우량을 기록했다. 지난 1일부터 7일까지 강원 철원에는 755㎜, 경기 연천에 715㎜, 충북 제천에 432㎜ 등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1년에 올 비가 거의 다 왔을 정도이다. 8일에도 광주 전남에 이틀 새 400mm, 전주 339.6mm 등 많은 비가 내렸다. 시간당 30∼50mm로 쏟아 부었다.
장마가 물러가고 비가 그치면 전국적인 피해규모와 문제점 등이 드러날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호우피해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뼈아픈 교훈을 던져주었다. 이번 집중호우는 중부지방에 앞서 부산, 대전지역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고 주택과 도로 침수 등의 피해를 가져왔다. 부산은 침수소동이 주말에도 또 이어졌다. 광주, 전주 등 하천이 범람위기를 맞았고 주요도시마다 도심 곳곳이 침수되어 물난리를 겪었다. 전남 곡성에서는 산사태로 주택이 매몰되어 5명의 사망사고도 발생했다. 안타까운 것은 6일 오전 강원도 춘천 의암호에서 경찰 순찰정 등 선박 3척이 침몰해 3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댐의 물이 방류되어 급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작업도중에 빚어진 황당한 사고로 거센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이번 집중호우에 도로가 끊기고 철길이 막히고 저수지 둑이 터지고 하천이 넘치고 농경지가 침수되고 그야말로 물바다를 연상시켰다. 홍수주의보와 경보가 내려지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형국이 이어졌다. 산사태로 집이 매몰되고 물에 잠기고 흙탕물에 가재도구가 엉망이 되었다. 이재민들은 황당한 피해 상황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상습침수지역은 어김없이 물이 차고 넘쳤고 곳곳에서 발생한 산사태는 산림관리와 절개지 및 위험지역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곳곳에 산을 절개하고 만들어진 태양광시설 상당수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며 산사태취약시설임을 보여줬다. 산자락마다 집중호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 호소도 잇따르고 있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지역도 산림을 훼손한 채 절개지에 태양광시설이 들어서 있는 곳이 집중호우의 직격탄을 맞았다.
물론 집중호우에 산사태와 하천범람은 피할 수 없는 경우라고 하지만 분명히 평소 관리와 대처를 잘 해 나간다면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른바 치산치수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한 대처가 소홀히 이뤄진 것은 무사 안일한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다. 강과 하천의 관리는 위험상황을 감안하여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번 집중호우에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 주요도시가 침수되는 등 취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과거에도 반복되는 상황이 여전히 지속되는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피해상황이 발생하면 그 때만 반짝 대처이고 잠잠해지면 후속대책을 소홀히 한 채 유야무야해 왔던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말로만 자연재해 예방을 말하고 후속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악순환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기상청은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 일기예보의 정확성이나 분석력이 크게 떨어져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그동안 갖가지 문제로 불신을 자초하고 이제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또다시 겉도는 예보능력으로 국민들의 비난을 사고야 말았다. 요즘 국민들은 지나간 일기예보도 꼼꼼히 챙기고 있다. 기록적인 장마기간에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내린 이번 여름철의 장기예보와 관련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예보를 내놓았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싶다. 이런 기상청의 문제점은 차제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에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유비무환을 위해서도 그렇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적정수준의 예측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불과 하루 전의 강수량 예보조차 맞지 않자 일기예보를 중계하느냐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오고 있다.
올해 코로나19 사태에서부터 집중호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어렵고 힘겨운 상황들이 겹치고 있다. 여기에다 경제난이며 집값폭등, 실업대란, 폐업대란 등이 국민들을 옥죄고 있다. 나날이 불확실성이 커지고 모든 게 불안한 상황이다. 그야말로 국민들은 정신적인 고통이 심화되고 있다. 악재가 겹치면서 국민들의 정신건강이 걱정스럽다. 어언 입추도 지났다. 이제 여름이 다 가는데 가을걷이들이 다 없어져 버렸으니 농민들의 허탈감은 더해 갈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집중호우의 자연재해도 인재라는 비난도 나올 만하다. 평소 조금만 더 하천관리를 잘하고 산림을 훼손하지 않고 산사태위험지역을 해소했더라면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회한을 갖게 된다. 자연재해라도 안일한 자세로 유사한 피해가 반복되는 악순환은 막아야 한다. 이재민들과 피해농민들에 대한 특단의 대책도 절실하다. 멘붕에 빠진 이재민들의 정신적인 치유대책도 함께 나와야 한다. 특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차제에 전면적인 취약지역 실태파악과 장단기적인 치산치수 대책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 물론 지금 상황은 사후약방문격이지만 말이다.
2020-08-09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4
© 세종타임즈
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1926년 3월6일부터 3일간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치러진 필기시험에서 최승희는 탁월한 성적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3월19일의 면접시험에서 최승희가 불합격 판정을 받았는데 이유는 또다시 ‘연령 미달’이었다고 했다.
“... 당장 준비를 해서 사범학교 시험을 봤습니다. 시험은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남몰래 자신도 있었고 예상대로 합격했습니다. ... 이 기쁨도 헛된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불합격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음악학교에 가려고 했을 때와 같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가슴 아픈 이유로 구두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최승희, 1936, , 34-35)
최승희의 필기시험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그의 조선어판 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1백명 모집에 8백60명의 응모자 중에서 일곱 번째로 합격이 되었다. 그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중에 우등생이 아홉 명인데 내가 여덟 번째로 우등 졸업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 사범학교의 시험성적이 나은 편이었다. 모두들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울어?’ 오빠가 다그쳐 물었다. ‘나이가 적으니 일 년만 놀다가 내년에 오래.’”
최승희의 기억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해 경성사범학교 여자연습과의 정원은 80명이었고, 응시자는 3백94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경성사범학교 지원상황은 1926년 2월18일의 에 자세히 보도되어 있었다.
“경성사범학교에서는 올해 보통과 1백명, 남자연습과 갑조 80명, 을조 50명, 여자연습과 80명의 예정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는데, 16일까지 지원자 수는 보통과 1천5백명, 남자연습과 갑을조를 합하여 1천2백명, 여자연습과 3백94명에 달하여, 작년도의 보통과 1천8백명, 남자연습과 8백50명, 여자연습과 2백70명으로부터 보통과에서는 감소하였으나 남녀 연습과에서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반적 지원 상황에는 기억에 착오가 있었더라도 자기 성적에 대한 기억은 정확했을 것이다. 필기시험 성적이 3백94명 중에서 7등이었다면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다. 관비학생(60명)이든 사비학생(20명)이든 넉넉히 합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불합격처리 되었다.
‘연령 미달’이라는 낙방 이유는 합당했을까? 여기에도 의문의 여지는 있다. 경성사범학교의 교칙에는 보통과의 연령 규칙은 있지만(12세, 제64조) 연습과에는 명시적인 연령 제한(65조)이 없었다. 다만 연습과 지원자는 5년제 소학교(일본인)나 4년제 보통학교(조선인) 졸업자여야 했으므로 소학교와 보통학교에 연령제한(12세)을 둔 조선교육령 16조와 10조를 적용하면 조선인은 16세, 일본인은 17세가 되어야 사범학교에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도쿄 음악대학 지원할 때와 똑같은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지원자 평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최승희를 입학시키는 것이 학교에게는 부담일 수 있었을 것이다. 1년의 연습과를 마치고 교원으로 부임해도 만15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화성(朴花城, 1903-1998)은 1918년 3월에 숙명여고보를 졸업(9회)한 직후, 15세의 나이로 천안과 아산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원 근무를 시작했었다.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아기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경성사범학교가 필기시험 7등의 지원자를 낙방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교칙에 명시된 것도 아니고 선례까지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승희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는 최승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경성사범학교에 합격해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했더라면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린 ‘조선의 무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해 3월19일 최승희가 구술시험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큰오빠 최승일은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 그만 두어라, 승희야, 그리고 내 이야기나 좀 들어 보아라.” 진학에 거듭 실패한 최승희의 앞날은 이제 오빠의 그 “이야기”에 온통 매달리게 되었다.
2020-08-02
-
혼돈의 시대를 말한다
© 세종타임즈
올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초비상이다. 중국으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는 초기에는 우한폐렴이란 용어로 등장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암울한 바이러스 세상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온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2020년 8월 2일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214개 국가에서 무려 17,99만0,233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68만7,564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미국이 4,76만2,945명의 확진자에 사망자만도 15만7,825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그 다음이 브라질과 인도,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페루 순이다. 우리나라도 1만4,336명의 확진자에 301명이 사망했다. 전 세계적으로 74위이다. 청정지역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빗장을 걸어 잠그던 베트남도 갑작스럽게 발생해 586명의 확진자에 3명이 사망했다. 정작 코로나19 발원지였던 중국은 8만4,337명에 4,636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지만 이 수치의 신뢰성에 전 세계가 의문을 던지고 있기는 하다.
중국은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무한 책임이 주어져 있는데도 그 책임을 애써 감추려고 하는 것 같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의 신뢰도 무너진 지 오래이다. 중국을 비호하고 초기 대응을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세계인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피해국가인 미국은 아예 탈퇴를 선언할 정도이다. 국제적으로 천문학적인 피해보상 문제도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중국은 전 세계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어 놓고도 아직도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19년 12월 1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 우한화난수산물도매시장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전 세계적인 대유행인 팬데믹 상태로 몰아넣는 데는 불과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대한민국도 확진자가 발생한 것은 지난 1월 20일이었다. 우한시에 거주하는 35세 중국인 여성으로 국내입국자였다.
2월 19일부터 대구·경북지역에 신천지 대구교회를 중심으로 다수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집단감염이 시작되었다. 신천지교인들이 슈퍼전파자로 지목되면서 비상사태가 이어지고 혼돈의 시기를 맞는다. 대구·경북은 그야말로 유령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에까지 처했다. 이후에도 구로구 콜센터, 이태원클럽, 대전방문판매업체 등의 집단감염사례가 이어진다. 학교개학마저 연기되고 공적마스크를 약국을 통해 공급했다. 이제는 마스크가 상용화되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스크 세상이다. 이런 혼돈의 시기가 지난 7개월의 시간표 속에 담겨져 있다.
경제도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다.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실업자가 급증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지만 한 때 반짝 경기만을 유도한 채 상황을 도로 악화되고 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마이너스 3.3%를 나타냈다. 이는 외환위기 발생이후 1998년 1분기 마이너스 6.8% 이후 22년 만에 가장 낮은 최악의 수준으로 조사됐다. 물론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이 국경을 걸어 잠그면서 자동차, 스마트폰 등 수출이 크게 줄어든 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코로나 충격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는데 더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문제는 자영업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제조업이나 수출기업들의 어려움은 더할 나위가 없다. 어렵지 않은 곳이 없다. 모든 지표가 부정적인 것을 보면 지금이 최악의 상황임을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겼었던 상황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던 베트남도 이제는 거꾸로 확진자가 발생하고 경제난을 겪으면서 다급해지자 이제는 대한민국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비행기까지 되돌려 보냈던 배신감으로 인해 베트남을 보는 시각이 180도로 달라졌다. 우호국가인 줄 알았던 베트남이 코로나19 사태로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해 430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광객이 찾았지만 이제는 싸늘해졌다. 그 유명한 관광지 다낭도 확진자 발생으로 초토화되고 있다고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못했던 베트남이 대한민국을 외면하면서 이제 자업자득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기업들의 투자마인드도 꺾여 인근 미얀마나 인도네시아 등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래저래 베트남은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는 바람에 철퇴를 맞고 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실업자 3,000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이웃나라와의 관계마저 재설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환심을 다시 사기에는 좀처럼 쉽지 않을 듯싶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배신의 아픔이 크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가 재조명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미국과 중국의 대립상황이 과거 냉전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점입가경이다. 휴스턴의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할 정도이다. 물론 중국도 청두 미국 총영사관을 폐쇄하며 맞불을 놓았지만 대립양상이 심상치 않다. 천멸중공(天滅中共)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하늘이 중국공산당을 없앤다는 말로서 이를 외쳐대는 미국과 동조하는 서방국가들의 움직임이 거세다. 중국은 주변 16개국과 분쟁이 진행 중이다.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도 결코 간단치 않다. 미국이 주도하는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 제품 불매운동도 거세다. 영국 등 서방세계가 모두 하나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호응하고 나서고 있다. 세계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모습이다. 그동안 중국과의 포용을 상징하던 닉슨독트린의 폐기도 선언했다. 미국의 강경자세는 자유진영이냐 공산진영이냐의 선택지에 천멸중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있다. 미국과 같은 위상을 노리며 패권경쟁을 벌여온 중국이 혹독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 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두 달 동안 쏟아 붓던 폭우로 인해 28개성에서 최악의 대홍수피해가 발생해 수재민이 무려 5,5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크고 작은 댐제방들이 무너지고 세계 최대의 댐인 싼샤댐 마저 붕괴위험에 처해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상 최악의 물난리로 아비규환이다. 마치 지옥 같은 모습이다. 코로나19로 유령도시를 방불케 하던 우한시도 도시가 침수되어 또 다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의 폭우 상황과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처참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뭄으로 고통 받는 곳도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재앙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가 도래한 듯하다.
이처럼 전 세계가 혼돈과 고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남의 일처럼 알았던 폭우도 대전지역과 부산지역, 서울에까지 쏟아져 아파트가 침수되고 강남역 일대가 난리가 났다. 중국의 폭우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라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피로감도 날로 더해가고 있다. 아직도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피해도 지속되고 있다. 과거 IMF경제체제와 금융위기 등을 경험한 나라이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과연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하느냐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있다. 천멸중공을 표방하는 자유세계진영논리에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알게 된 베트남의 배신과 이중적인 자세는 국민들이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보여준 우리 대한민국의 호의와 신의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혼돈의 시대를 맞아 개인은 물론 대한민국과 국민들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교훈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고통의 시기에 국민들을 위하여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의 눈물을 닦아 줄 위정자와 지도자들의 모습도 그려본다. 답답한 국민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인물, 난세에 나타난다는 영웅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2020-08-02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3
© 세종타임즈
대안으로 지원한 경성사범도 낙방
원서도 접수해 보지 못한 채 음악학교 진학은 무산되었지만 최승희는 실망하지 않았다. 곧바로 경성사범학교 진학 계획을 세웠는데 아마도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작은오빠 최승오의 조언을 받았을 것이다. 굳이 가족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당시 경성사범학교는 ‘취업이 보장된 떠오르는 명문’으로 세간의 평판이 높았고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했던 학교였다.
1922년에 개교한 경성사범학교는 들불처럼 번진 조선의 교육열을 배경으로 탄생한 학교였다. 기미만세운동 이후 조선의 저조한 취학률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새로 창간된 와 , 등의 민족지들은 교육개선을 시급한 과제로 부각시켰다. 총독부의 교육억제와 차별정책이 전방위적으로 비판됐고 학교 증설과 교사 충원의 요구가 빗발쳤다.
여론에 밀린 조선총독부도 교육 개선에 나섰지만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학교 증설 문제는 그로부터 10년이나 지난 1929년에야 ‘한 면에 적어도 하나의 보통학교를 설립한다’는 1면1교 정책을 수립했고 그나마 그것이 달성된 것은 1936년이 되어서였다. 교원 양성 문제에는 총독부가 즉각 움직였고 경성사범학교를 설립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다.
일제 강점 직전까지 조선 정부는 한성사범학교(1895)를 운영했고, 서울의 국민사범학교(1905)과 서우사범학교(1907), 대구의 대구사범학교(1906) 등이 설립되었다. 뒤이어 평양과 원산과 개천, 진주와 광주와 평택 등에도 민간 사범학교들이 설립되어 교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일제는 강점이후 한성사범학교를 포함해 모든 사립사범학교를 폐지하고, 사범학교 기능을 관립고등보통학교에 복속시켰다. 즉 관립고보에 사범과 1년 과정을 따로 두어서 교원이 되려는 학생들이 이를 이수하게 했다. 이로써 교원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사람만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다.
삼일운동 직후부터 시작된 학교 증설과 교원 충원 요구에 압력을 받은 총독부는 1921년 5월부터 경성사범학교를 시범 운영했고, 1922년 2월 사범학교 규정을 제정한 뒤 4월에는 남학생 1백명을 선발해 경성사범학교를 정식으로 개교했다. 이 학교는 중등학교였으므로 소학교를 졸업한 일본인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모두 지원할 수 있었고, 5년의 수업연한을 이수한 뒤에 조선 각지의 보통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경성사범학교는 관립학교였으므로 학비가 없었고, 특히 ‘관비’학생으로 선발되면 매월 15원의 생활비까지 지급받았다. 학비가 면제된 대신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의무적으로 교원에 복무해야 했다. 의무 복무연한은 관비학생이 5년, 사비학생은 2년이었다.
경성사범학교의 인기는 대폭발했다. 학비가 무료인데다가 취업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개교 2년만인 1924년에는 1백명 모집에 4천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지원자 중에는 보통학교 졸업생보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더 많았다. 이에 경성사범학교는 1923년부터 교과과정을 보통과와 연습과로 나누었다.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지원하는 연습과의 학생들은 1년의 연수기간만 이수하면 바로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이 때문에 연습과 지원자는 더욱 늘었다.
1925년부터는 여자연습과가 신설되어 여고보를 졸업한 여학생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최승희가 지원한 것이 바로 경성사범 여자연습과였다. 1926년 2월18일의 에 따르면 80명을 선발하는 여자연습과에 3백94명이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이미 5대1의 경쟁률이었다.
당시 는 여자연습과 지원자들을 출신학교별로 분류했는데 고등여학교 출신인 일본학생이 1백28명, 여고보 출신인 조선학생이 1백25명이었다. 조선학생들 중에서는 경성여고보와 평양여고보 졸업생이 42명과 45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했고, 경성의 숙명(19명)과 진명(11명)과 동덕(3명)과 이화(1명), 개성의 호수돈(3명), 평양의 정의(1명)여학교 등의 순서였다.
최승희는 19명의 숙명여고보 출신 지원자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3월7일 와 에 발표된 숙명여고보 졸업자의 진로 명단에는 경성사범 입학예정자가 18명으로 되어 있었다. 19명중 1명이 낙방한 것이다. 그 유일한 낙방자가 바로 최승희였다.
2020-07-26
-
프로야구 관중 입장재개가 던져주는 의미
© 세종타임즈
정부는 주말인 26일부터 프로 스포츠 관중 입장 재개 관중 입장을 허용하기로 했다. 무관중 프로야구 경기가 시작된 지 2개월만이다. 프로축구는 다음달 1일부터이다. 물론 전면 개방이 아니고 수용 가능 인원의 10% 이내 입장으로 제한적 조치지만 경기장 입장 재개를 기다리던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2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프로 스포츠 관중 입장 재개 방안을 오늘 회의에서 논의한다"고 밝힌데 이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경기장 내외 방역수칙이 철저히 준수된다는 전체 하에 최소 인원부터 입장할 것"임을 밝혔다. 곧 이어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안에 따라 26일부터 관중 입장을 허용하겠다는 발표했다. 아쉽게도 5개 구장에서 치르는 경기 가운데 현재 거리두기 2단계 조치가 내려져 있는 대전과 광주는 제외됐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되고 있는 대전은 27일 이후로 미루어 졌다. 그렇지만 사상 처음으로 무관중 경기를 TV로 지켜보던 팬들에게는 청량제가 되고 있다.
사실 코로나19가 지역감염확산이란 우려감 속에 대전과 광주는 고강도의 거리두기를 통해 확산을 차단하는 노력을 펼쳐 왔다. 대전의 경우 다행히 방문판매업체를 중심으로 퍼지던 감염 상황이 다소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언제 어디서 전파가 또다시 이뤄질지 지역민들의 걱정은 여전한 상황이다. 일부지역에서는 동선도 공개되지 않은 채 현장을 조용히 방역처리 하는 경우마저 생기고 있다. 뒤늦게 감염자가 방문했던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례도 접하게 된다. 26일부터는 종교단체도 소모임이 허용되는 등 규제가 완화되어 다소나마 불편을 덜게 되었다. 장애인들의 직업시설과 일부 작업장들도 규제가 풀어져 다시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규제의 완화조건들은 방역수칙을 준수하고 나름대로 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려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고강도만 빠질 뿐이지 거리두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사회적 규범처럼 되어가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 습관처럼 자리 잡을 전망이다.
생활 속에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은 이제 일상에서 기본이 되고 있다. 공적 마스크 공급체계도 마무리되어 자율화되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마스크 대란을 겪었는데 그 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마스크가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여름철 비말마스크도 대중화되었다. 가격도 오히려 내려갔다. 그동안 공적 마스크가 너무 비쌌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마스크는 이제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용에 따른 지혜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마스크를 형식적으로 착용하고 다니는 사람에서부터 아예 벗어던지고 다니는 사람에 이르기 까지 공중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삼가야 해야 할 대화도 다른 탑승자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목적 승강장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하는 사례도 있다. 심지어 기침까지 하면서 탑승자들을 불안케 하는 경우도 왕왕 보게 된다. 이른바 공적 예절이 중요한 시점에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대중교통 이용이 겁날 정도의 장면들이 자주 목격이 되는 것은 아쉬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긴장감만 갖고 살 수는 없다. 일상이 그야말로 숨 막히는 것만 같은 순간순간들이지만 그래도 정신건강을 위해 돌파구는 찾아야 한다. 요즘에는 코로나 감염염려증이 너무 심한 시대에 살고 있다. 결벽증일 정도로 세심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지키지 위한 자구노력으로 코로나19 시대에는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걱정만 하고 살 수도 없다. 그동안 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규제가 너무 일방적인 정도라며 불만을 토로해 왔다. 고강도 규제가 집중하는 경향 때문이다. 기도회나 성가대연습도 하지 못하고 식사도 같이 못하고 소모임 자체도 금지되자 마치 손발이 묶인 것처럼 답답함을 호소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지난 24일 오후 6시를 기해 이런 교회 방역수칙 의무화 조치를 해제했다. 이제 그동안의 규제가 풀려 다소나마 일상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두기는 여전해 진행된다. 아직도 진행형인 코로나19 사태에는 방심은 금물이다. 그동안 터득한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유비무환의 자세이자 감염병을 예방하는 지혜임은 분명하다.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무관중 경기가 풀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나마 방역수칙을 준수하면서 일상의 피로감을 덜어가자는 의미인 것 같다. 너무나 삭막하고 피폐해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가 지금 프로야구 등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긴장감도 풀어보는 것은 이 시기에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이 넘치는 작금의 상황에서 긍정과 희망의 불씨를 키워나가는 공동체의 노력도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진 자영업자들에서부터 폐업 위기를 맞고 있는 사업장에 이르기 까지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한 대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프로야구경기가 무관중이라는 폐쇄적인 상황에서 관중입장재개라는 숨통을 찾았듯이 우리네 일상도 이런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거리두기를 한다고 마음까지 거리를 두는 사회가 되어서도 안 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코로나 19 사태 생활 속 거리두기는 지속하지만 마음만은 멀지 않게 늘 가까이 함께 하며 희망과 긍정의 꽃이 피어나길 바란다. 이런 함축의미를 프로야구 관중 입장재개가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2020-07-26
-
거듭되는 실패, 암울한 진로 2
© 세종타임즈
도쿄의 음악학교 입시를 포기
졸업을 앞둔 최승희는 이제 집안에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하며,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힘을 보태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여학교를 나온다고 나왔지만 앞으로 어찌할지 내겐 전혀 방향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취직을 해야겠다, 그리고 일가의 생계에 다소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승희, 1936, , 12)
그도 다른 동창들처럼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다른 우등 졸업생들처럼 일본 유학도 가고 싶었다. 때마침 숙명여고보의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에게 일본 유학 장학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 모교의 교원회의의 결정으로 나를 학교 급비생(給웰生)으로 동경 음악학교에 입학시키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이가 어린까닭에 하는 수없이 열여섯 살의 봄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일 년 동안 놀고서 동경에 가라고 하셨다. 음악 교사인 김영환 선생은 그중에도 나의 음악가 될 소질이 있다고 보시고 ‘너는 꼭 음악가가 되어라’ 하셨다.” (최승희, 1937, , 12)
최승희는 숙명여고보 재학시절 ‘창가를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노래 솜씨가 좋았다는 말이다. 가 최승희에 대한 첫 보도를 내면서 “승희씨는 학교시절부터 성악을 잘해서 학우들부터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고 보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최승희 자신은 성악가가 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여학교의 졸업 성적은 우등이었고, 그 중에서도 창가를 꽤 잘했습니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에는 으레 내가 독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가를 꽤 잘한다고 해서 장래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최승희, 1937, , 32)
그렇지만 음악교사 김영환의 강력한 권고와 숙명여고보 교원회의의 유학 제안, 그리고 집안에 더 이상 부담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최승희는 도쿄의 음악학교 유학을 고려해 본 것 같다. 그러나 고려는 고려로 끝났다. 연령 미달로 응시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 하지만 그 기쁨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빨리 여학교를 졸업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나이의 부족으로 도쿄 음악학교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최승희, 1936, , 33)
최승희가 도쿄의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지원했다가 ‘연령 미달’로 낙방했다고 서술한 평전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우에노 음악학교의 학칙에는 연령을 제한하는 규정이 없었다. 다만 입학 응시 자격을 5년제 중학교(여성은 고등여학교) 졸업자 또는 그에 준하는 학력을 가진 학생으로 제한했는데 이것이 간접적으로 연령을 제한할 수는 있었다.
일본의 ‘구제중학교령’에는 5년제 중학교와 고등여학교 입학을 12세 이상으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고등여학교를 졸업하면 17세가 되었고 이것이 간접적으로 음악학교의 연령기준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숙명여고보 졸업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만14세였다. 연령 제한 때문이었다면 ‘집에서 일 년 동안 놀고서’도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신 일본 여학교에 편입해서 1년을 더 수학했다면 음악학교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나이 그 자체가 아니라 나이와 연동된 조선과 일본의 학교 제도의 문제였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학교 연한을 일본보다 낮게 정한 것은 그 자체로도 교육상의 차별이었지만 조선 학생들이 일본 고등교육을 받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 대학에 가려면 먼저 일본의 중학교나 고등여학교에 편입해 1-2년의 수업연한을 채워야했던 것이다.
결국 최승희는 모교에서 대학 진학 장학금을 얻고도 도쿄의 음악학교에 응시조차 하지 못한 것인데, 그것은 연령 미달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학교의 제도상의 간격 때문이었던 것이다.
2020-07-19
-
국민공감을 생각한다
© 세종타임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이지만 어떤 사실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둘러대서 하는 말로 쓰인다. 한마디로 제멋대로 임기웅변식이다. 오죽하면 이 말이 등장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이 언어를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이 맞는가 싶기도 하다가는 살펴보면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른바 궤변(詭辯)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얼핏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둘러대어 합리화시키며 허위적인 변론을 하는 것이다. 비슷한 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있다. 온당한 이치도 살피지 않고 가당치도 않는 말을 끌어다가 자기주장이나 조건에 맞도록 합리화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더 나아가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아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으로 얼토당토않은 것을 우겨서 남을 속이려하고 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는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대는 황당한 말을 일컫는다.
요즘 대한민국은 이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지난 16일 개최되었던 '이재명 건'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공판에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건' 관련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를 제외한 3건에 대해서는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벌금 300만원인 원심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환송 조치했다. 고등법원으로 원심 파기•환송 조치된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시도 관련 허위사실 유포 건'의 심리 결과는 무죄 7명, 유죄 5명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6대5로 유•무죄 관련 의견이 맞섰다. 대법원이 일률적인 법적 책임 묻고 이에 대해 수사권이 작동하면 수사기관 중립성 훼손우려와 자유로운 토론에 장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논리이다. 일방적으로 적극적인 허위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한 처벌하기 어렵다며 무죄취지로 파기환송을 한 것이다. 물론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지만 사실 이날 생중계까지 하며 진행된 선고공판은 범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TV 토론에서의 거짓답변도 '표현의 자유' 범주에 포함시키고, 공개되는 TV 토론에서의 답변을 공개적인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공표'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며 공직선거법상 TV토론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아주 좋지 않은 판례를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대법원의 선고이후 국민적인 신뢰가 많이 무너져 내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치적인 판결이지 법적인 판결로 공감을 얻기에는 어딘가 1인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반기는 측은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사필귀정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며 환영하고 있지만 이는 역사의 평가로 남게 되었다.
요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성추행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2차 가해가 극성인 가운데 피해자를 매도하는 발언이 방송을 버젓이 타고 있다. 도대체 무슨 연유에서 피해자를 조롱하고 매도하는 발언이 등장하는지 그 심리상태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다. 충남에 이어 부산, 서울까지 이어지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고 언어폭력으로 2차 가해에 편승하는 것을 보며 상당수 국민들이 공분하고 있다. 이들 은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로서 또는 검사로서 변호사로서 쏟아놓는 언어들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심각성이 매우 크다.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사고를 갖춘 사람들이 편파성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 공적인 방송인이나 공인의 자세이다. 방송의 경우 편견과 사견이 지배하면 이는 공적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회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언론은 그 자체가 불공정한 언론임에 다름 아니다. 그 누구든지 궤변이나 지록위마식의 언어구사로는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거짓을 진실인양 포장한다고 수긍할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지났고 국민들의 수준도 그게 아니다. 언어와 사고에 있어 상식이 통하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품격 있는 노력은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특히 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여야 한다. 법이 권력 앞에 무력해지면 그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 법의 잣대가 그야말로 이현령비현령이 되어서는 결코 정의가 바로 설 수 없다. 법과 양심이 존재하는 사회와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민들은 사소한 도로교통법만 어겨도 과태료를 문다.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은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 기타 각종 법을 크게 어겨도 법망을 벗어나고 감옥에 가도 훗날 사면복권을 통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느냐 하는 볼멘소리도 들리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적용도 그동안 성토의 대상이 된지 오래이다. 법위에 군림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이는 정의가 아니다. 사회지도층에서 국민들의 등불이 되어 정의로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함에도 변칙과 반칙의 사회를 조장한다면 이는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며 국민들을 배신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작금에 대한민국 사회의 크고 작은 많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처럼 정치와 이념이 대립하는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분법적 분열과 반목의 악순환이 멈추질 않고 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이 과연 이대로 가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조차 의아해 하고 있다. 그야말로 가치관과 정체성 혼돈의 시대이다. 이현령비현령, 궤변, 견강부회가 판을 치고 있다. 심지어 지록위마의 거짓도 난무하고 있다. 어딘가 숨어서 음험한 작당과 권모술책을 꾸미지는 않는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인다. 집단이기주의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민심도 흉흉하다. 마스크는 쓰고 다니지만 복불복(福不福)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잠재적 장소가 식당과 대형마트, 관광지, 지하철, 대중교통 등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위난의 시기일수록 카멜레온의 탈을 벗어버리고 법과 질서, 양심을 가다듬고 정도를 걸어가고자 하는 사회지도층의 각성과 사회대통합의 거대한 용트림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국민 공감의 길이자 대한민국이 바로 서는 길이 아닌가 싶다.
202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