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스의 계절, 봄

김은희 충남도립대학교교수

2019-03-09 06:53:00

 

▲  김은희 충남도립대학교 교수     © 세종타임즈

 


 

시작

 

올해도 어김없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시작되었다.

시작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 때문인지 문득 1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재뉴어리(January)가 떠오른다. 이 단어는 문을 지키는 로마의 신() 야누스(Janus)에 근거하여 야누스의 달이라는 뜻의 야누아리우스(Januarius)’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왜 하필 1월과 야누스를 연결 짓게 되었던 것일까?

야누스는 문의 앞뒤를 지키기 위해 두 개의 얼굴 때론 네 개의 얼굴이기도 하다 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야누스하면 자연스럽게 이중적인 인간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중적인 인간과 1월이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내 생각은 이렇다. 1월은 한 해를 시작하는 달이다. 시작의 순간에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경험한다.

시작과 설렘과 두려움 - . ‘시작이 갖는 이러한 양면성이 아마도 한 해의 시작인 1월과 야누스를 연결 짓게 했을 터이다.

그래서 2019년 봄,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하는 내게 봄은 또 다른 야누스의 달이다.

 

역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로 가고, 나무는 꽃이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버려야 얻는다는 이 역설의 진실을 앞에 두고, 나아가기 위해 버릴 것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는 봄이 시작되는 3

이제 막 각자의 인생의 문을 열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인공지능이 우리네 인생을 좌지우지 해버리게 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들 각자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꿈이요? 우리는 밥벌이가 가능한 기술과 기능, 지식을 습득하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요.”라고 우리들은 대답한다. 나는 할 말이 없다. 작가 김훈의 말처럼 밥벌이의 어려움은 그것대로 우리가 기꺼이 견뎌내야 하는 삶의 한 부분이니, 그것을 포기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뭔가 미진한 느낌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밥이 곧 삶의 의미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 밥을 얻기 위해 겪어야 하는 갈등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순간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물었고, 어느 날 문득 버려서 얻는역설적 물의 자세와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가 쓴 경설(鏡設)’이라는 글의 한 대목을 접하며 어렴풋이나마 그 뼈대를 세워보려 했던 것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 - 삶의 유연성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흐른다. 흐르다가 넓은 곳을 만나면 소()를 이루기도 하고, 장애물을 만나면 돌아가기도 한다.

어떤 이는 물의 겸손 즉 자기 낮춤에 주목하지만, 내게 물은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하는 삶의 유연성으로 읽힌다.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나게 물은 그릇과 하나가 된다.

적자생존이 무엇인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환경 적응력의 또 다른 표현 아닌가. 가장 가까이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흐르는 물을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가늠자를 찾는다.

 

화이부동(和而不同) - 화음(和音)

 

그런데 여기서 하나 명확히 해 둘 점이 있다.

물이 환경에 맞춰 제 모습을 바꾼다고 물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규보의 글을 빌리자면, 거울에 잠시 먼지가 덮였다고 그 밑의 본바탕까지 흐려지지 않는 것처럼

합창을 들을 때면 난 늘 같은 느낌을 갖곤 했다. 그것은 조화와 균형이 가져다주는 전율이었다. 처음 기타를 잡고 코드를 배우며 소리를 내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음()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멋진 신세계!

그 때 나는 다짐했다. 조화를 이루되 같지 않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되 조화를 꾀하는 삶이 만들어내는 그 놀라움을 잊지 말자고

 

맺음말

 

나는 이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분들에게 작은 요청 몇 가지를 하고자 한다.

물처럼 환경에 잘 적응하되 를 잃지는 말자.

타자(他者)를 인정하는 삶이 를 무화(無化)시키는 것이 아님을 알자.

강물이 강을 버리듯 지금까지 유지해 온 자기중심성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맞잡은 손으로 바다를 향해 나아가자.

이런 나를 오롯이 간직하고 싶은 나로 늘 가슴에 품고 서로가 주인공이 되는 그런 삶 속에서 나를 높이자.

 

! 3! 또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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