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의 부자

유태희 논설위원

2019-05-19 12:42:00

 

 

▲     © 세종타임즈

 

오늘은 의사 장기려(1911~1995)를 얘기하려 한다. 얼마 전에 그에 대한 평전(지강유철작)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에 작은 병원 청십자 의원을 세우고 나라의 의료보험제도보다 10년 앞서서 '청십자의료보험' 시대를 열었던 사람이다.

 

장기려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의전(서울 의대의 전신)을 졸업하고 서른 살에 평양 기홀병원 외과 과장으로 가서 얼마 후 병원장을 지냈다. 해방 무렵 김일성대학 교수를, 나중에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대 의대와 서울 가톨릭 의대에서 외래교수를 지냈다. 김일성대학에서 영어 원서로 가르칠 만큼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독학으로 공부한 러시아어 실력도 뛰어날 정도로 다양하고 준수(俊秀)했다.

 

특히 최근 장기려에 대한 평전에 의해 새로 밝혀진 만년의 ‘종들의 모임’ 활동은 그가 제도권 교회를 떠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하게 따른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비신도인 나도 놀랍다. ‘종들의 모임’이라는 이름도 장기려가 굳이 붙인 이름이고 사실 그 실체에 대해서는 인터넷은커녕 그 어디에서도 전혀 알려진 바 없다. 교단 이름도, 교회 건물도, 목회자 관사도, 교회 규칙도, 홍보활동도, 역사기록도 없이 2000년 동안 160여개 나라에서 선교해온 그 목회자들은 떠돌이처럼 살면서 자신들을 원하는 집에서 아이 어른 함께 모여 예배를 올려왔다. 그곳에 참석한 어느 목사가 그곳 사람들이 아무도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는 이유로 돌아가자 장기려는 혼자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넥타이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 들을 자격 없지. 예수님이 넥타이 맸나?”

 

그곳 목회자는 어떤 신학교육도 받지 않고 목사니 신부니 하는 직함도 없이, 그냥 방을 빌려주는 사람들의 집에 살면서 스스로 밥하고 청소하며 세탁을 하고, 이동을 할 때에는 최저가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성경에도 없는 십일조라는 헌금은 물론 어떤 사례도 거부하며, 신도가 스무 명을 넘으면 다시 모임을 나누어 교회의 대형화가 아니라 중형화도 거부하고 철저히 작은 것을 추구했다. 또한 새로이 목회자가 될 젊은이를 위해 늙은 목회자가 밥하고 청소하며 세탁을 하고,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신도도 그렇게 대접하며, 목회자가 죽으면 모든 재산을 형제들에게 분배한다는 것도 우리의 목회자 숭배, 아니 절대 독재 풍토와는 정반대인, 그야말로 섬기는 자의 전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도한다는 점이다. 바로 장기려 자신 말이 아니라 삶으로 빈민을 섬긴 또 한 사람의 예수였고, 게다가 그런 자신의 우상화를 철저히 경계하여 만년에 자기의 동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으라”고 욕했다고한다.

 

특히 그는 거지, 행려병자, 간질 환자들을 먼저 섬긴 우리 시대의 의인(義人)이고 성자(聖者)다. 집에 구걸 온 걸인과는 겸상을 하고, 거리의 걸인에겐 외투를 벗어주었다. 어느 날인가, 거지를 만났는데 돈이 없었다. 그는 그냥 가다가 월급으로 받은 안주머니의 수표가 생각나자 돌아가서 그걸 거지에게 건네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책을 덮고 내 기억에 남는 또 하나는 1950년 12월 3일 차남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오며 아내와 자녀 다섯과는 생이별했다. 늘 북쪽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혼자 살은 로맨티스트다. 그는 성실한 신앙인이었지만 돈과 권위주의, 파벌과 세습 같은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를 떠났다. 76세 때 교단과 교회를 등지고 기독 신앙의 실천을 예배보다 중시하는 '종들의 모임'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생각나는 또 다른 얼굴. 서울 새움교회 이재우목사다. 폐지와 고물을 팔아 빈민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 그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하늘 아래, 역사 위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동서고금의 뛰어난 사람들의 삶이나 책을 아무리 읽어도 진실, 사랑, 정직, 소박, 봉사 그리고 모든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는 자유 외에 달리 인간답게 살 길은 없다. 비오는 오늘 이재우목사에게 전화라도 한 통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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