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여사를 추모하며..

유태희 논설위원

2019-06-11 06:00:00

 

▲     © 세종타임즈

이희호 여사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 학사를, 렘버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석사)을 다시 스카릿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석사를 마친 재원이었다. 한편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약 30년간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납치·테러·사형선고·투옥(6년)·망명(10년)·가택연금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군사정권에 끝까지 맞서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동초’(忍冬草)·‘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 명성을 높였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정책의 공로로 2000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회고해보면 이희호 여사 없이 김대중 혼자만이였다면 아마 끝까지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1962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이희호 여사의 나이는 마흔 살, 그보다 두 살 아래 연하인 김 전 대통령은 어린 두 아들에 노모가 있는 정치 재수생이었다. 이 여사는 훗날 자서전에서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운명은 문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거세게 노크했다”고 전한다.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에서 그분과 운명적 만남은 가시밭의 연속이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겪은 6년의 감옥 생활, 10년의 망명과 연금 시절을 함께 견뎠습니다. 생전 이 여사는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라디오를 통해 남편의 사형 선고를 들었을 때”라고 말했다. 옥중의 남편을 생각하며 매일 편지를 보내고, 겨울에도 자신의 안방에 불을 넣지 못하게 했단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 남편 ‘김대중’을 떼 놓고 ‘이희호’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의 일생만으로도 여성 운동가로도 손색없는 삶이었다.

 

이희호 여사는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1952년. 여성문제연구원 창립 멤버로 실무를 도맡았고 1959년 YWCA 총무로 일하며 본격적인 여성 인권 운동에 나서기도했다. 그의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왜냐하면 많은 여성들이 혼인 신고도 없이 살다가 쫓겨나는 일이 흔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DJ 정부 시절 ‘여성부 창설’ ‘모성보호 3법 개정’ ‘여성 장관 4명’과 ‘첫 여성 대사’ 임명 등을 놓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여성정책의 절반은 이희호 여사 몫”이란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두 달 전인 지난 4월엔 장남 홍일 씨도 먼저 떠나보냈다. 홍일 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는 당시 이 여사가 입원 중이었지만, 상태가 위중해 장남의 별세 소식은 전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이제 이희호 여사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남편과 아들의 곁으로 돌아가면서 이제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희호 여사는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첫째는 국민들께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하늘나라에 가서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시겠다고”고 말했다. “두 번째로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노벨평화상 상금은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유언했다” 평생 어려운 사람들,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늘 함께 하고, 김대중평화센터의 이사장으로서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한 일을 계속하다가 소천했다. 모든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부디 편안한 마음으로 영면하시어 조국과 민족을 위한 축복을 다시 부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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