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승전보가 국민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태극전사들의 메달 소식 못지않게 모든 경기에서 보여주는 투혼은 그 자체가 감동이다. 이들이 흘리는 땀방울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담고 있다. 최선을 다해 이뤄내는 금메달 현장은 그만큼 감동을 자아낸다. 그동안 이번 대회를 위해 쏟아온 땀방울의 결정체다. 수영에서는 금메달 3관왕이 탄생하고 펜싱과 e스포츠에서도 금메달이 쏟아지며 괄목할만한 성적을 올렸다. 이처럼 각종 경기 때마다 보여주는 선수들의 불타는 투혼을 접하면서 국민은 우리 선수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에 박수를 아끼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는 경기 모습이 멋지다. 역시 스포츠 정신이야말로 승부 세계에서 가장 본보기가 되는 정신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선수들의 금메달이 영광스러운 것은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해 이룩한 결실이라는 점이다. 은메달이나 동메달도 마찬가지다. 반칙과 조작과 거짓이 용인되지 않는 승부의 길이다. 반칙이나 약물에 의한 속임수는 들통이 나면 자격이 박탈되는 것은 당연하다. 정정당당한 경기는 당연히 기본이다. 심판들의 경기 운영도 마찬가지다. 심판의 판정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어김없이 비디오 판독을 통하여 그 판정의 정당성을 가려내기 때문에 승복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심판판정에 문제가 많았던 경기도 있었다. 비디오 판독이 없었던 시절은 더했다. 축구 경기가 됐건 복싱 경기가 됐건 심판판정이 문제가 되어 늘 중계방송 아나운서들이 불만 섞인 방송내용을 전하던 때도 있었다. 심지어 88서울올림픽 당시 복싱 경기에서 미국 심판의 불공정한 판정으로 인해 국민감정이 상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 농구 경기 결승전에 소련을 응원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스포츠가 정정당당하지 못하면 그 경기 결과는 인정받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회자하는 사건이 있다. 이른바 쇼트트랙의 오노 사건이다. 오노 사건이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남자 1,500미터 결승에서 김동성이 1위로 골인했으나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김동성이 반칙한 것으로 오심 판결을 한 것이다. 오노 사건의 심판은 호주 출신의 제임스 휴이시(James Hewish)로 얼마나 사람들이 어이가 없었으면 제임스 휴이시는 한국 전용 실격 심판이라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경기 승부를 좌우하는 이런 오심과 편파 판정의 시비는 역대 중요 경기에서 숱하게 등장해 왔다. 하지만 이는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세계인들에게 회자하고 있다. 스포츠 정신을 훼손하는 비겁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나 프로축구에서도 승부조작이 들통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돈으로 매수한 경우인데 행위자는 지탄받고 퇴출당했다. 이런 행위는 스포츠 정신을 망각한 비겁한 행위로서 용납되지 않는다.
아시안 게임에서 우리 선수들이 보여주는 훌륭한 경기 모습에서는 정정당당한 승부사의 모습이 멋지고 자랑스럽다. 대한민국의 정치 현장에서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다. 국회를 비롯해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소모적이고 투쟁적인 정쟁이 넘쳐난다. 불법과 탈법, 부정부패의 꼼수가 난무하며 거짓이 판을 친다. 죄를 짓고도 큰소리치고 법정을 들락거리면서도 오히려 목소리가 크다. 죄 없는 사람들이 사법기관을 내 집 드나들 듯 오가는데도 떳떳하다는 행태를 보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도 한참 맞지 않는다. 부정선거를 통해 뒤늦게 당선이 무효가 되고 선거판에 돈 봉투가 뿌려지고 있는데도 무고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반칙과 불법, 탈법으로 승자의 자리를 노리는 비겁한 행동이다. 이른바 민주 질서를 훼손하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를 거머쥐려는 정치권의 일부 몰지각한 행태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아시안 게임에서 이런 모습의 경기가 생방송 된다면 과연 박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정치나 스포츠나 정정당당하게 겨뤄야 하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특히 최근에는 사법부의 법적 판단도 심판대에 오르고 있다. 과연 공정한 판결을 하고 있는지 하는 점이다. 사법부의 역할을 보면 원고와 피고를 두고 과연 누가 옳은지 비디오 판독을 하는 최후의 심판자와 같다. 한 점 의혹 없이 법대로 처리해야 하는 중차대한 심판이다. 불법행위자를 포장하는 기관이 사법부가 아니다.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저울과 법전을 들고 있다. 여기서 저울은 다툼을 공평하고 공정하게 해결하라는 뜻이고 법전은 정해진 법에 충실하게 재판하라는 뜻임이 분명하다. 오심과 편파 판결로 정의와 진실을 왜곡하는 행태를 경계하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작금에 사법부가 이런 정의로운 모습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것은 단순히 생각해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과거 군대 사조직을 방불케 하는 무슨 단체 출신의 판사들이 주요 요직을 독식하고 편파 논쟁에 휩싸이고 있다. 무엇보다 사법 정의가 국민 신뢰를 잃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법을 말하면서 ‘고무신도 짚신이 있다.’, ‘위록지마(謂鹿之馬)”라는 어불성설의 판결과 견강부회(牽強附會)의 논리모순을 보여서는 국민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우리나라 헌법 제11조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명시한 헌법정신을 사법부가 훼손해서는 법치국가의 질서가 바로 설 수 없다. 여기에는 신분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법적으로 평등하다는 지침이 제시되고 있다. 오심과 편파 판정이 스포츠정신을 좀먹는 악질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사법적인 오판과 편파적 판결도 민주 정신을 훼손하는 반헌법적인 적폐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가 썩는다면 대한민국의 정의와 미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 아시안 게임에서 경기마다 올바른 판정을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심판들의 당당한 모습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선수들도 스포츠정신에 따라 경기규칙을 준수하며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치러야 하지만 심판도 편파 판정과 오심이 없도록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당연히 심판판정이 공정해야 진정한 승부가 가려지는 것이다. 비디오 판독처럼 3심제를 채택한 사법부도 공정한 저울과 법전의 의미처럼 정의로운 심판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아시안 게임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경기심판과 같은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