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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사전에는 ‘착하다’를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로 표기되어 있다. 이런 잣대라면 착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드러난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바르고 상냥하다. 속이야 어떻든 그렇게 보이려고 애를 쓴다. 이기(利己)든 배려(配慮)든 그렇다. 주장도 없고 좋고 싫음도 없다. 보편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인 양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불분명한 행동을 한다. 또렷한 가치관도 없고 확고한 신념도 없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흔적 없이 살아간다.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 깊은 상처가 착한사람으로 살게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려 질 것 같은 두려움, 문제에 대처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상처가 드러날 것 같은 위축된 심리가 애매모호한 사람을 만든다.
사회도 조직도 ‘착한사람’을 원한다. 필요에 의해 움직이고 상황에 맞게 행동하되 불평하지 않는 사람, 소외되거나 무시당해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있는 사람, 시키는 일은 목숨을 다해 감당하지만 도를 넘지 않는 사람, 성과에 비해 터무니없는 대가를 받지만 그것조차도 감사하며 순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원한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사람! 기라면 기고 웃으라면 웃는 사람! 조직이 원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 되게 착해~~! 가장(家長)도 어쩌면 이런 사람이기를 원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참고 견뎌내 주기를, 그 대가로 꾸준한 소득을 안겨주기를 기대한다. 가정이 조직이 사회가 착한사람을 원한다. 아니 길러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사람은 약한 사람이고 억울한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이다. 자존심도 없고 자아도 없고 감정도 없는 사이보그다. 정말 그럴까? 착한사람은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진정 우리는 이런 착한 사람을 원하는 걸까?
아니다! 우리가 아는 착한사람은 ‘아픈 사람’이다. 가정은 조직은 사회는 더 이상 아픈 사람을 양성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병든 사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사회가 이렇게 병든 거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타인을 위해서라도 착한사람은 사회악이다. 발전은 없고 현상유지가 최선일 것이다. 다름을 원하고 새로움을 기대한다면 이런 형태의 착한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다. 덕으로써 원망을 갚으면 어떻습니까? 공자 왈 그러면 덕은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곧은 것(정의)으로써 원망을 갚고 덕(德)으로써 덕을 갚아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는 기독교의 모토(motto)다. 기독교가 아직도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수는 사랑할 대상이 아니고 정의를 실천해야할 대상이다. 기독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토를 내 세운 이유로 인해 수 세기가 지나는 지금까지도 엄청난 오류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착한사람은 부조리함과 다투고 불리하더라도 정의 편에 서는 사람이다. 부당함에 눈감지 않고 비리를 조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타인을 관용(寬容)하는 사람이다. 옳음과 그름을 판단할 줄 알고 칭찬하고 반성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성공에 진정으로 기뻐하고 자신의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정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포기하고 옳음을 위해 콩 한 조각을 나누어 먹는 사람이다. 실천하지 못하는 선행에 가슴아파하며 힘들고 어려운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이다. 시기나 질투가 아닌 부러움과 소망으로 타인의 잘남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 아니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자기보다 더 잘 난 사람이나 자기보다 훨씬 부족해 보이는 사람과도 거리낌 없이 우정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웃고 있지만 예리한 눈매를 잃지 않는 사람이다. 손끝이 시리고 볼이 따가운 겨울! 노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줄 캠페인에 동참할 사람을 찾는다는 메일을 받았다. 이 겨울 착한사람이 필요한 때다. 당신은 착한사람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