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즈음 한창 세상의 이슈인 역사논쟁은 역사의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사전적 의미로서 역사(歷史, 문화어: 력사, 영어: history)는 오랜 역사, 지난 시대에 남긴 기록물, 이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 등을 가리킨다. 또 인간이 거쳐 온 모습이나 인간이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말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그리고 역사는 시간의 흐름으로써 어떤 사람이 겪은 일에서 중요한 일들 중 후대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사의 ‘역(歷)’은 지나간 것, 경과한 것을 뜻하며, ‘사(史)’는 그것을 기록하는 일을 맡은 관리를 뜻했다. 하나의 단어로서 ‘역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역사책 ‘삼국지’에 대해서 배송지(裴松之)가 달았던 주에서라고 알려져 있다. 글자의 형태상으로만 본다면 역(歷)의 최초 의미는 울창한 숲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공간적 경과의 의미에 시간적 경과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다. 시간적 경과의 의미는 달력이나 역법에서의 역(曆)자를 낳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역(歷)과 역(曆)은 서로 통하는 글자였다. 중국의 사관 사마천은 그 자신이 명언하고 있듯이 역사는 "과거의 행위를 궁구하고 그 성공과 실패, 흥기와 쇠망의 배후에 가로놓인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양에서는 헤르도토스라는 이야기꾼이 기원전 5세기에 쓴 ‘역사(histories apodexis)’라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기록한 책이 있다. 그는 이것으로 서양 역사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들이 말하는 역사는 영어로 직역한다면 ‘history on display’가 된다. 헤로도토스의 시절에는 historia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탐구를 뜻했다. 어원적으로 ‘탐구하다’ ‘증인’ ‘알다’ 등에서 파생된 그리스어 historia는 탐구 자체는 물론이고 또 그 결과로서 얻은 지식이나 저작을 뜻하기도 한다. apodexis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거나 해명하거나 전시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다. 역사라는 말은 객관적 사실과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엄밀한 사료 비판(史料批判)에 기초를 둔 근대 사학을 확립한 독일의 사학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1795~1886)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동시에 참여자이므로 그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여 지기 마련이다.
이탈리아의 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모든 역사적 판단의 기초는 실천적 요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인간과 관련된 과거 사건들을 분석하고 그 이야기를 써서 "과거의 진짜 담론"을 형성하면서 촉진된다. 현대의 역사 분야는 이러한 담론을 제도적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오늘 우리 정치사회의 문제도 그러하다.
인간이 기억하여 실제적인 형태로 보존한 모든 사건은 역사 기록이므로 역사 담론은 과거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저작을 쓰는 데 기여할만한 사료들을 검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역사가가 수집한 사료는 특정한 기록은 배제하면서 일반적인 기록을 모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에는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역사란 "사실로서의 객관적 측면의 역사와 "주관적 측면으로 기록된 사실"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역사를 뜻하는 용어의 어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독일어로 역사를 뜻하는 Geschichte라는 단어는 geschehen이라는 동사가 명사화한 것으로 "일어난 일"을 뜻 하는 말이다. 한편, 영어의 history는 "찾아서 안다."라는 그리스 어 historia에 연유한다. 즉, 전자는 "과거의 사실(객관적 측면)"을, 후자는 "기록된 사실(주관적 측면)"을 나타내는 어원을 가진 말이다. 결국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역사논쟁의 역사란 용어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와 이를 토대로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의 두 측면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역사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독일의 역사가 랑케(Leopold von LANKE 1795-1886)는 역사란 "그것이 본래 어떻게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며 "역사가는 자신을 숨기고 역사적 사실만 말해야 한다."고 하여 역사의 객관적 측면을 강조한바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는 지금 역사논쟁이 일고 있는 이때에 더욱 역사가의 임무에 큰 중요성은 부여할 수밖에 없다. 역사를 고립된 개인 행위자의 동기에 관한 사실이 아닌, 사회 내에서의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힘에 관한 사실임을 역사가는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역사가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역사 그 자체에서 방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용"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선가 왔다는 믿음은, 우리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믿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역사가는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고 한나라의 정체성과도 중요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1월13일 ‘정치인과 교과서’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도 박 대통령의 역사교과서 개정 시도를 우려한 바 있다. 당시 신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A급 전범이라는 점과 박 대통령의 아버지가 일제에 협력한 군 장교였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박 대통령은 일본 식민통치와 독재 시기가 교과서에 반영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역사교과서를 고치려는 두 나라의 위험한 시도는 역사의 교훈을 위협한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사학 이론서인 에드워드 핼릿 카(1892년~1982년)는 영국의 정치학자. 역사가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역사를 그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정의하면 막연하다. 역사에 대한 카의 정의는 보다 구체적이다. 역사라는 대화에서 그 주체는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fact)이다. 카는 ‘과거의 사실(facts of the past)’과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s)’을 구분한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자의적이다.
‘역사가들 마음대로’인 것이다. 역사가들이 중요하다고 보면 ‘역사적 사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사실’이다. 이 구분은 『역사란 무엇인가』가 상대주의(relativism)를 표방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상대주의 앞에서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진리를 독점할 수 있는 절대성을 상실한다. 역사 서술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사를 서술하는 사학자에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카에 의하면 사실을 많이 모은다고 역사가 되는 게 아니다. 무수한 사실 중에서 역사를 기술할 사실을 선정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학자의 주관이 개입된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 교과서에 나온 사실이 사실은 상대적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에 사회의 차원을 부여한다. 카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와 미래의 대화는 추상적이고 고립된 개인 간의 대화가 아니다. 역사란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라고 했듯이 어제와 오늘은 우리들의 미래이고 이긴 자들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역사학자들의 뜻있는 논쟁을 펼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늘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우리들의 새로운 역사를 써보자.
그것이 남은 자들의 책임이고 양식 있는 자들의 책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