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떳떳하게 자수하라.

유태희 논설위원

2015-12-09 06:35:00

 

 

 

▲     © 행복세종타임즈


경찰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게 자진 출석하지 않으면 영장을 집행하겠다고 밝힌 시각이 오후 4시, 이제 2시간을 앞두고 조계사의 긴장감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조계종은 경찰의 공권력 집행 예고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법집행을 하루 늦추어줄 것을 제안했다.

 

논란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종교시설의 공권력의 성역제공이라는 초법지대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지금 입장에서 보면 남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여기서 오랜 역사의 현장을 거꾸로 돌려보면 옛 우리의 조상들은 그러한 초법적인 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천신(天神)을 제사지낸 소도라는 명칭을 가진 곳이다.

 

후한서와 삼국지 등에 소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한 삼한에서는 매년 1∼2차에 걸쳐 각 읍별로 제주(祭主)인 천군(天君)을 선발하여, 특별 장소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 이 제사지내는 장소를 소도라 하는데, 그 명칭은 거기에 세우는 솟대[立木]의 음역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문헌을 살펴보면 소도는 신성(神聖) 지역이므로 국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더라도 그를 돌려보내거나 잡아갈 수 없어 도둑이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소도에 영고(鈴鼓)를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제사지내던 당시의 주술적인 민속신앙은 오늘날에도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마을 입구나 신당에 세우는 솟대다. 이 같은 상고시대 부족국가들의 제천의식에는 종교·문화·생활 등 제정일치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우리들이 가진 포용의 정신을 담고 있다

 

서양에서도 이런 것들이 존재하였는데 그리스·로마의 아실리(Asillie) 또는 아실럼(Asylum)이 그것이다. 죄인이 아실리로 도망쳐 오더라도 돌려보내거나 잡아가는 것은 되레 종교적인 범죄행위가 되었다. 도둑이 성행하기도 했다지만 성역은 난민, 노예, 채무자, 범죄인의 보호장소로서 피의 복수와 사형의 남용을 막는 사회적 순기능도 하며 인간 구제와 인간 존엄의 보루로 떠오르기도 했다.

 

어제 강신명경찰청장은 입장문에서 “한상균이 수차례의 조직적인 불법 폭력행위를 주도한 후 종교시설로 도피한 채 계속적인 불법행위를 선동하고 있는 것은 법과 국민을 무시하는 매우 중대한 범법 행위”라며 “지난 6일까지의 자진 퇴거 약속을 스스로 어기고 계속적인 불법 투쟁을 선언한 것은 20일 넘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준 국민과 불자들을 배신한 행위”라고 했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명동성당이나 조계사 등 종교시설이 민주화 사건 수배자들을 숨겨줬던 것은 충분히 국민적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불법시위나 불법파업으로 경제에 큰 손실을 끼친 주동자에게 종교시설이 소도나 아실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더 큰 눈으로 사건을 살펴보면 조금의 여유를 두는 것이 우리 대다수의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권력에 맞서자는 것이 아니라 성역이라는 여유를 조금 가짐으로서 국민의 바듯해가는 정서를 어루만져주자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총무원장스님의 기자회견 후 경찰은 대한불교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이 "10일 정오까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영장 집행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한 것과 관련, "기자회견 내용을 감안해 일단 집행을 연기하겠다"고 9일 밝혔다고 하니 한숨은 돌렸다.

 

지금의 문제는 단순히 범법자를 체포하기 위한 영장집행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도마저 부정하며 평등하고 따뜻한 대자대비의 가르침을 펼친 부처님의 도량에서 이루어지는 공권력에 대해서이다. 불교야말로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를 통해 소외되어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성역이 무너진다는 상징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중생의 고통을 직시하며 함께 하는 대승불교의 수행은 언제나 삶의 현장 속 실천을 중요시하며 있어야 하거늘 지금의 스님들의 처사는 부처님 가르침에 전혀 적합한 행동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한번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어야 한다.

 

아울러 이것은 종단의 정체성 문제이기도 하다. 현재 조계사 상황은 종교의 자비심과 포용력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실현하고 보여줄 수 있는 계기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내부 갈등이 있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성역에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다시 그곳을 성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죄를 진 범법자지만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도 이제 이정도의 여우는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장소를 모른 척 봐주는 여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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