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다수의 最大幸福(최대행복)이 정치다.

유태희 논설위원

2016-01-04 11:29:00

 

 

▲     © 행복세종타임즈

 

정치[politics, 政治]는 사전적 의미로서 통치와 지배, 이에 대한 복종 ·협력 ·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의 총칭이다. 학자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그 주요 논점은 대략 3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대립·분쟁은 조정되고 통일적인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국가라고 하는 공동생활의 틀 속에서 단순히 개개인의 풍습이나 도덕 등의 자율적인 규범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질서를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법과 그 밖의 방법을 동원하여 유지시키는 작용을 정치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위로부터의 통치만을 정치로 보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항쟁 및 그 밖의 활동도 정치라고 보고 있다.

 

둘째, 이에 반하여 정치는 국가만으로 한정되는 인간 활동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생활의 제(諸)형태, 이를테면 회사·노동조합·교회·학교·가정 등 어디에서나 발생되는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의견의 차이를 조정해 나가는 통제의 작용도 모두 포함한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 정치학자들의 대부분은 이 관계를 거번먼트(government)라 하여 국가는 공적인 거번먼트인 데 대하여 그 밖의 것은 사적인 거번먼트라고 설명한다.

 

셋째 정치를 모든 대립을 조정하고 통일적인 질서를 유지시키는 작용으로 보는 점에서는 첫째둘째와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특히 사회적·경제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항쟁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스스로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활동을 정치의 본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것에 따르면 자기편에게는 가장 우호적인 단결과 협력을 제공하고 상대편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곧 정치의 형태이며, 정치는 스스로의 의지에 상대방을 복종시키고 상대방을 통제하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질서를 유지·강화하는 작용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자연히 국가를 중심으로 정치를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는 이렇게 폭력적인 권력을 정의로 인도하고 수천, 수백만 명의 이기적인 인간을 질서, 평화, 안녕의 틀 속에 가두는 일이다. 도덕적으로는 ‘당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가 옳지만, 정치에서는 ‘당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행하라’는 원칙이 통용된다.

 

쇼펜하우어에 정치론에 의하면 인간은 문명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의 탈을 쓰고 다니는 짐승이며, 정치는 이런 짐승을 잘 관리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정복당하기 싫으면 기회를 봐서 이웃을 정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당하는 것이 정치라고 말했다.

 

며칠 전 문재인대표와 안철수의원이 김근태의원의 추모 예배에 참석해 조우를 하였다. 영 어색함이 묻어나는 모습들에서 씁쓸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았다. 그들은 “정치인 김근태는 ‘민주대연합론자’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각기 자기 길로 들어섰다.

그동안 야당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결국 김근태만이 양보하고 희생했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주장하면서 싸운다. 그러나 김근태는 ‘나’를 희생하면서 싸웠다. 정권을 내어주는 일이 그동안 우리 국민의 피와 땀, 열사들의 숭고한 죽음과 희생으로 일구어 온 민주주의를 일순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김근태는 양보하고 희생했다. 그리고 대연합을 이루는 다수의 뜻에 복종하고 헌신했다. 민주주의자의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야당은 그런 정치인이 없다. 바로 그것이 문제다.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전기고문을 받았던 사람이다. 재야의 지도자였던 김근태 전 의원은 1992년 ‘민주대연합을 통한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민주대연합론은 김영삼 정권에 면죄부를 주고 3당합당을 사후적으로 합리화시켜준다는 등의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3당합당을 거부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민주대연합론을 비판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태도를 바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근태 전 의원을 통해 정치란 교조의 원칙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기반을 잃지 않으면서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고 고백한 일이 있다.

 

다수가 옳다고 말하는 것이 꼭 옳은 일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단점을 지적해서 나온 말을 중우정치(衆愚政治, 영어: ochlocracy, mob rule)라고 하는데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를 이르는 말로, 민주주의의 단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플라톤은 다수의 난폭한 폭민들이 이끄는 정치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의 빈민들이 이끄는 빈민정치라고도 꼬집었다. 이런 중우정치는 올바른 민주제가 시행되지 못하고, 하나 또는 몇몇 집단이 수를 앞세워 정치를 이끌어가는 형태로, 민주주의의 단점이 심해지면 만들어지는 정치를 말한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몰락을 보면서, 그 원인으로 '중우정치'를 꼽았다. 그에 따르면 '중우정치'의 병폐는 첫째, 대중적 인기에 집중하고 요구에 무조건 부응하는 사회적 병리현상, 둘째, 개인의 능력과 자질 그리고 기여도 등을 고려하지 않는 그릇된 평등관, 셋째, 개인이 절제와 시민적 덕목을 경시하고 무절제와 방종으로 치닫는 현상, 넷째, 엘리트주의를 부정하고 다중의 정치로 흘러가 중우정치의 양태로 변질될 가능성 등이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의 정치는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민들의 이해를 따라 타협과 양보하는 지루한 일상이 계속될 것이다. 또한 한 명의 위대한 정치인이나 한 번의 중대한 선거를 통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정치의 본질은 역사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대표와 안철수의원을 비롯하여 창당과 수성에 나서는 정치인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분열을 지양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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