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어디에 계신가요?..

어른들이 없는 세상을 탄한다..

논설위원 유태희

2016-06-19 09:59:00

 

▲     © 행복세종타임즈

 

현대사회를 종이 없는 사회라고 한다.

종이 없는 사회no paper society는 사무자동화와 정보통신 시스템을 이용하여 모든 거래를 전자화한 사회. 정보통신 시스템에 의한 정보혁명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이르는 용어다. 회사 내부에서는 사무자동화기기를 이용하여 서류준비의 시간을 줄여서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종이로 계약서나 전표를 작성하지 않고 곧바로 상품을 주문하거나 은행과 거래를 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또한 혹자는 현대사회를 어른이 없는 사회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없는 사회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어른이 없는 사회는 곧 시대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도 갈 길을 잃은 젊은이들과 곤궁에 빠진 사람들이 조언을 듣고자 어른을 찾기 때문이며 삶의 지혜를 구하는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에서 존경할 만한 어른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해서 어른은 아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이 시대를 ‘죽은 지식인의 사회’라고 부르는 이유이고 ‘어른이 없는 사회’, ‘존경할 대상이 없는 나라’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지식인이라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비전을 제시하며, 건전한 사회 발전을 위해 비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어른이라는 말은 ‘얼의 온전한 이’라는 말은 아닐까.

 

‘어른’이란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삶을 책임지면서 이 사회를 꾸려나가겠다는 ‘의지’이자 ‘관계’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어른'이라는 말의 본래 뜻은 '나이를 먹은 사람'이 아니다. '어른'은 '얼운'이 변한 것인데, '얼운'은 '얼우다'라는 동사 어간 '얼우'에 접미사 ㄴ이 결합된 것이다. 그러니까 '얼운'은 '얼우는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우다'는 남녀가 짝을 이루는 행위를 뜻한다. 즉 남녀가 결혼을 하면 서로 몸을 합하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식이 태어나는 것인데, 우리 조상들은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여 '얼운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을 구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른’이란 결혼한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삶을 책임지면서 이 사회를 꾸려나가겠다는 ‘의지’이자 ‘관계’라 할 것이다. 넓은 의미로는 확립된 자아를 가지고, 자유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인간을 말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어른의 행실에 대하여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근본은 자신의 몸을 규율하는 데에 달려있다. 자기의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지만, 자기의 몸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해도 따라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며 갈고 닦아와 아랫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책임 있는 자세로 맡은 바 본분을 다해야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은 젊은이의 일면적인 주관성을 넘어서서 객관적 정신성의 입장에 선다. '완성된fertig'이라는 것이 어른을 표현하는 핵심어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건한 진보주의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는 살아 있는 것이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이성die Vernunft der Wirklichkeit"에 따른 진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없어진 이 세상에 갈수록 자상하고 너그러운 ‘아저씨’ 이미지는 간 데 없고 말이 아닌 비속어적이고 혐오스러운 ‘개저씨’로 비하되고 있다. 오징어는 여자가 찢어야 맛있다, 아기 많이 낳은 순서대로 비례대표 공천을 줘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 대책 없는 사람들을 젊은이들은 ‘개저씨’라 부른다. ‘개저씨’는 자신의 지위를 무기로 여성과 약자에게 권력을 휘두른다. 그래서 ‘개저씨’라는 말에는 젊은 여성들과 약자들의 분노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국 중년 남성을 개저씨로 만드는 요인은 많다. 가부장제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우월주의, 무례와 성추행에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 인성교육의 부재가 이를 부추겼다. 가부장제의 위기적 상황 속에서 서열관계를 통한 권력 행사는 편의 차원을 넘어 ‘당연한 것’이 된 지 오래다.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 갑과 을이 있을 뿐이다. 깊어지지도 넓어지지도 못하고 높이 오르는 데만 에너지를 쏟아 부은 중장년 남성들에게 남은 건 개저씨라는 조롱뿐인 이 세상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한 언제부터인지 어른이란 말 대신에 ‘멘토mentor’ 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멘토라는 말의 출처는 고대 그리스 시대 대서사시인 오디세이아Odysseia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출정 길에 오를 때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의 장래를 오랜 친구인 멘토르Mentor에게 부탁했다. 덕분에 오디세우스가 2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들은 잘 성장해 있었다. 이후 멘토르라는 고유명사는 아버지 같은 스승을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멘토보다는 어른이라는 단어가 더 가슴에 남는 것은 말의 어감이나 향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통령은 정부와 국민의 큰 어른이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정부와 국민의 큰 어른이 되어야 한다. 무게를 잡고 권위를 내세우며 국민 위에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다. 국무위원들은 물론 야당, 국민들과 직접 대화하고 소통하며, 솔직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설명할 것은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설명할 일이 있으면 직접 설명하고 사과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해야 정부와 국민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 설사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한다 해도 대통령의 권위나 신뢰가 추락하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털어놓고 국민들에게 협조를 구할 때 일치된 국민의 힘을 받을 수 있다는 역사적 선례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또한 국가의 공동체적 가치와 목표라는 큰 우산 아래 다양한 개인적 삶이 전개될 때 그러한 삶이 모여 지혜의 큰 강물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산의 부재 속에서 사회가 오직 개인적인 욕망에만 의존할 때 성찰적 삶의 바탕이 되는 역사적 유산을 간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회적 삶에 대한 축적된 경험이 없어 세상을 좀 더 성숙하고 깊이 있게 바라보기 어렵다. 세상을 보는 시각, 추구하는 삶의 목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지금이나 한 세기 전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사회에서 경험을 통한 배움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선조들은 생명의 뿌리를 내려 가꾸면서 살아왔다. 이 땅 위에서 그들은 개인의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이 땅에는 바로 그러한 삶의 개인적·사회적 의미가 살아 배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땅을 우리 세대가 거친 야만의 불모지로 만들어서야 될 일인가. 우리 후손들에게 어떠한 모습의 삶을 터전을 물려줄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이 중차대한 시점에 어른들의 심오한 각성이 필요하거니와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어른이라는 말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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