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이후 20년 동안 숙명여학교는 발전을 거듭했다. 학교 부지를 넓히고 교사와 강당을 새로 지었다. 실력 있는 교사들을 영입해서 1926년 졸업식 때에는 교사의 수는 20명을 헤아렸다. 교사 중 14명이 여성이었고, 5명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사범학교를 마친 후에 후배들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온 선배들이었다.
가장 크게 증가한 것은 학생 수였다. 제1회(1910년) 졸업생은 4명에 불과했지만 제9회(1918년) 졸업생은 15명, 제13회(1922년) 졸업생은 43명, 제17회(1926년) 졸업생은 76명으로 15년 사이에 약 20배로 늘었다. 1923년에는 입학 정원은 1백 명으로 늘었기 때문에 제18회 졸업식 때에는 전교생의 수가 4백 명에 가까울 전망이었다.
17년 전, 숙명여고보의 첫 번째 졸업식은 성대했다. 1910년 4월5일에 열린 제1회 졸업식에는 4명의 졸업생을 축하하기 위해 6백 명의 하객이 몰려들었다. 하객 중 4백 명은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친족이었지만, 다른 2백 명은 왕실 귀족과 정부의 고관대작들이었다.
그해 4월7일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엄귀비의 사절과 왕실요인들이 이 졸업식에 직접 참석하거나 선물을 하사했고, 학부(=교육부)의 대신과 차관, 농상공부대신(=경제부장관)과 한성부윤(=서울시장)을 비롯한 정부의 고관들이 동부인으로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숙명여고보의 졸업식은 한양을 떠들썩하게 만든 국가적 행사였던 것이다.
1926년의 제17회 졸업식도 마찬가지였다. 단상 앞줄에 후치자와 노에(淵澤能惠, 1850-1936) 학감(=이사장)과 이정숙(李貞淑, 1858-1935) 교장을 비롯한 20명의 교사들이 각각 자리에 앉았고, 그들과 나란히 총독부 학무국장과 경기도지사 등의 중앙과 지방의 고위직 공무원들, 그리고 일제의 작위를 받은 귀족들과 그 부인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숙명여고보를 설립한 대한제국은 망했으나 이 학교의 졸업식은 여전히 국가적 행사요 경성의 화젯거리였다.
졸업생들은 옥색 저고리에 자주색 치마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서 강당의 앞줄에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 평상시나 교내행사 때에는 학생들이 자주색 세일러 제복을 닮은 서양식 교복을 입었지만 졸업식에는 한식 교복이었다. 졸업생 뒤로는 3백명의 재학생들이 빼곡히 앉았고, 양옆에는 친족들이 앉거나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매일신보>는 숙명여고보 졸업식장이 “문이 메일 지경이며 새로 지은 넓은 강당도 삽시간에 송곳 꽂을 틈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이날 졸업식에 참석한 76명의 제17회 졸업생 중에는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인물이 많았다. 조선 최초의 여성 장편소설가 박화성은 이미 1918년에 숙명여고보를 제9회로 졸업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유학에 필요한 수학기간을 채우기 위해 재입학, 4학년 과정을 마치고 다시 졸업생이 된 것이다. 그의 4학년 성적은 평점 98점으로 숙명여학교 개교 이래 최고 기록이었다.
조선의 무희 최승희는 1918년 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해 1922년 숙명여고보에 진학했으므로 수송동 교정에서 8년 동안 수학한 끝에 졸업생이 되었다. 배소득은 여자고학생상조회의 회원으로 주경야독으로 숙명여고보를 졸업했다. 그는 고통스런 고학 기간을 줄이기 위해 동덕여학교 1학년을 마치자마자 숙명여학교 3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덕분에 그는 4년제 여고보를 3년 만에 졸업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입학은 함께 했으나 함께 졸업하지 못한 동창들도 있었다. 여성 비행사 이정희는 비행 훈련을 받기 위해 3학년 때에 자퇴했고, 여성 혁명가 노남교도 1922년에 최승희, 박화성 등과 함께 입학했으나 3학년 재학 중에 가담한 항일 사건으로 퇴학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숙명여고보 제17회 졸업식은 대한제국 황실학교의 자부심과 수많은 명사와 하객들의 축하 속에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빈자리의 아쉬움이 뒤엉킨 복잡한 행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졸업식 순서에 따라 이정숙 교장의 학사보고와 후치자와 노에 학감의 훈화,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졌고, 재학생 대표의 송사와 졸업생 대표의 답사가 낭독될 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졸업식 후에 마련된 재학생들의 학예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하객들을 대접하는 축하연이 마치자 마침내 졸업생들은 수송동 교정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