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적 폭우가 덮친 한반도… ‘기후재난 안전지대’는 더 이상 없다
2025년 7월, 대한민국은 다시금 자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장마가 끝났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예측을 비웃듯 폭염 뒤에 폭우는 불시에 몰아쳤다. 충남 서산, 광주광역시, 서울 강남과 동작, 중랑 일대까지 전국 곳곳이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기상청도 감지하지 못한 짧고 굵은 ‘기습 폭우’는 하늘이 쏟아붓는 물 폭탄이었다. 도로는 강이 되었고, 댐과 하천 주변 주택과 농경지는 물바다를 이뤘다.
충남 서산에서는 1시간에 130mm가 넘는 기록적 폭우가 하룻밤 사이에 쏟아지며 도로와 주택 수십 채가 침수됐다. 광주광역시는 24시간 동안 300mm에 가까운 비가 내렸고, 광주천이 범람 위기를 넘나들며 일부 주민들은 새벽 대피령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 주요 도로와 하천이 잠기면서 도심 기능이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행정안전부가 낸 '국민 안전관리 일일상황'과 소방청에 따르면 20일 오전 5시 기준 최근 집중호우에 따른 인명피해는 사망 10명, 실종 9명이다. 지역별로 보면 사망자는 경기 오산 1명, 충남 서산 2명, 충남 당진 1명, 경남 산청 6명이었다. 실종자는 광주 북구에서 2명, 산청에서 7명이다. 시설피해도 늘어 도로 침수와 토사유실, 하천시설 붕괴 등 공공시설 피해가 1천920건, 건축물·농경지 침수 등 사유시설 피해가 2천234건이고, 대피 주민은 14개 시도, 86개 시군에서 9천504세대, 1만2천921명으로 집계됐다.
지난 16일부터 20일 오전 5시까지 지역별 총 누적강수량은 산청(시천) 793.5㎜, 합천(삼가) 699㎜, 하동(화개) 621.5㎜, 창녕(도천) 600㎜ 함안 584.5㎜ 충남 서산 578.3㎜ 전남 담양(봉산) 552.5㎜ 등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 기후재난 ‘안전지대’는 없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기후변화가 만든 재난이며 곧 ‘기후재난 국가’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라는 점을 뚜렷이 보여줬다.
폭우는 평등하지만, 피해는 불평등하다
폭우는 하늘에서 골고루 내렸지만, 피해는 그렇지 않았다. 충남 논산의 저지대 마을은 하천이 넘치며 순식간에 수십 가구가 고립됐다. 전북 정읍의 노후 주택가는 배수로가 막혀 복구 작업조차 어려웠고, 광주의 하천 인근 주택가와 논밭은 아예 사라질 듯 물에 잠겼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서민층 간 격차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서울 강남의 대형 아파트 단지는 사설경비와 고도화된 배수 시스템으로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반지하 주거지에 사는 시민들은 집안 가득 찬 흙탕물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재난은 예외 없이 오지만,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된다. 특히 고령층이 많은 농촌은 이동성 부족과 정보 격차로 피해가 더욱 극심하다.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불평등한 재난구조’라는 사회적 문제로 직결된다.
농촌 기반이 무너지는 ‘식량 위기’의 전조
충남 부여, 경북 의성, 전남 나주 등 대표적인 농산물 생산지역은 사실상 초토화됐다. 벼는 잠기고, 과일은 떨어졌으며, 비닐하우스는 찢기고 무너졌다. 일 년 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논두렁 앞에서 “복구할 인력도, 돈도 없다”라며 망연자실하고 있다.
농촌의 피해는 단지 농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국가 식량 자급률 저하, 물가 상승, 유통 불안정, 도시민의 소비 위축 등으로 이어지는 ‘경제 리스크’로 확대된다. 농촌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밥상이 위협받는다는 뜻이며, 이는 국가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흔드는 사안이다.
서울조차 무너진 도시 인프라의 민낯
“서울은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은 이번 폭우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도로 곳곳이 침수되고 도로교통이 통제됐다. 반지하가구 등 침수·재해 취약가구의 대피와 탈출 러시가 이뤄지고, 청계천과 안양천 등 29곳이 침수 우려로 통제됐다. 일부 지역은 배수 지연으로 주민들이 밤새 물을 퍼내야 했다.
서울의 배수 시스템은 ‘100년 빈도’의 강우에 맞춰 설계됐지만, 현실의 기후는 이를 초과하는 ‘200년 빈도’ 이상의 강우를 쏟아붓고 있다. 지하 공간, 고밀도 주거지역, 대중교통 중심의 인프라가 이번 수해 앞에 무력화되면서, 단순 보완이 아닌 ‘도시구조의 전면 재설계’가 불가피해졌다.
정부의 대응은 또 늦었고, 또 미흡했다
기상청은 예보했고, 언론은 경고했지만, 실제 피해 예방은 실패했다. 서울 일부 주민은 자력으로 대피했고, 충남 일부 지자체는 비가 다 쏟아지고 나서야 하천 범람을 알렸다. 관공서가 연락이 끊기자 마을 방송을 통해 서로 구조를 요청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정부는 “대응 중”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질적 지원과 현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매뉴얼은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고, 컨트롤타워는 있었지만, 현장을 통제하지 못했다. 홍보보다 행동이 필요하고, 대응보다 예방이 먼저임을 보여준 참담한 사례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방송도 뉴스 특보만 있을 뿐 과거에 태풍이나 장마철에 보았던 24시간 재난방송은 실종돼 엄청난 재난에 소극적이고 안이한 대처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절망 속에서 빛난 국민의 연대
그런데도 국민은 서로를 외면하지 않았다. 진흙으로 들어간 자원봉사자들, 각지에서 달려온 군 장병들, 손수 식사를 준비해 나른 마을 주민들, 이름 없이 지원금을 보내온 기업들까지… 대한민국의 위기 대응은 결국 국민의 연대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 같은 민간의 자발성도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 없이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자원봉사자 등록과 관리 시스템 정비, 민간 후원에 대한 세제 감면 확대, NGO와의 협력체계 구축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 국민의 힘은 소중하지만, 정부가 이 힘을 제도화하지 않으면 매번 “의지에만 기댄 복구”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기후재난 국가’로의 구조적 전환, 더는 미룰 수 없다
이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사계절의 나라’가 아닌, 기후재난이 일상이 된 국가다. 따라서 재난 대응 전략 역시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단순한 ‘재난 이후 대응’ 방식에서 벗어나, 예방 중심의 선제적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후 위험지역 전수조사와 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위험지역에 대한 개발 제한 및 이주 지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농촌에는 기후피해에 특화된 보험제도를 확대하고 복구 기금을 신설하는 한편, 실제 피해에 맞춘 현실적 보상 체계를 갖춰야 한다.
또한, 도시 인프라는 빗물 저장, 침수 방지 등 그린 인프라 중심으로 재편해야 하며, 지하 저류지 확충, 도시공원과 빗물 숲의 복원 등을 통해 도심 공간의 회복력을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난 컨트롤 타워의 일원화와 디지털 기반의 예측·대응 시스템 구축이다. AI 기반의 자동화 시스템과 신속한 대피 경보체계 도입은 더는 미래가 아닌 지금 필요한 선택이다.
자연 앞에 겸허하되, 결코 무기력해서는 안 된다
이번 수해는 대한민국에 크나큰 경고장을 던졌다. 기후위기는 더 자주, 더 강하게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기력해서는 안 된다. 자연 앞에 겸허하되, 대응은 더욱 강력해야 한다. 정부는 구조적 개혁에 착수하고, 국민은 일상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정치권 역시 정쟁보다 ‘재난 극복’에 방점을 두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2025년 7월, 물에 잠긴 대한민국은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진짜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이 ‘기후재난 대응 국가’로 가는 출발점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