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첫 회담에서 가장 민감한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기에 타결 짓기 위해 협의를 가속화 한다는데 합의했다. 2012년 5월 이후 3년 반 만에 재개된 한중일 정상회의와 이를 계기로 물꼬를 튼 한일 정상회담은 이 정부에서 처음 이루어진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첫 정상회담이었다. 한.일 양국 간 최초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것이 지난 1965년이니 벌써 50년이 되었다.행복세종타임즈
지난 11월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올해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전환점에 해당되는 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한 조기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합의를 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위안부 문제의 조기 타결을 위한 데드라인을 정하지 않았고 해결 방안을 둘러싸고 두 나라간 입장 차가 변한 것이 없어 타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회담에서 박대통령이 “성신지교誠信至交와 위안부 문제가 양국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마지노선의 발언을 함으로서 회담이 쉽지 않음을 예고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각각 3명씩의 배석자들과 함께 약60분간 단독회담을 하였고 이어서 38분간의 확대 정상회담을 열었다고 하니 엉킨 매듭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은 미래에 장애가 안 되게 하겠다는 의지들이 보인 것은 나만의 시각은 아닐 것이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동위(東魏)의 승상(丞相) 고환(高歡)이 자신의 아들들을 시험하기 위해 그들 모두에게 헝클어진 삼베를 주고 누가 가장 빨리 정리하는가를 시합하게 했다. 다른 아들들은 모두 마음이 조급하여 한 가닥씩 삼베를 뽑아 정리했으나 고양(高洋)만은 날카로운 칼을 가져와 엉클어진 삼베를 모두 잘라 버려 가장 먼저 정리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방식에 놀라 할 때 고양이 "어지러운 것은 잘라 버려야 합니다(亂者必斬)"라고 설명했다. 고환은 이 아들이 장래에 큰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후에 고양이 왕위를 찬탈하여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가 되었다. '快刀斬亂麻'는 이 고사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한. 일 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일단은 이번 회담으로 첫 단추는 뀌었으니 한 번의 긴 호흡으로 뒤를 돌아 본 후 해결점을 모색하고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할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귀국 후에 일본 여당 간부와 만난 자리에서 군 위안부 문제의 '연내 타결'에 신중론을 폈다고 교도통신과 마이니치 신문 등 일본 언론이 전했다. 아베 총리는 자민당의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간사장과 관저에서 회동한 자리에서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 측에서 '연내'라는 말도 있으나 양측의 기본적인 입장이 다르다”고 밝힌 뒤 “연내로 기한을 설정하면 어려워진다”고 말했다고 다니가키 간사장이 말했다 하고 이후 다니가키 간사장은 간사장실을 통해 “연내로 기한을 정해버리면 어려워진다”는 아베 총리 발언을 “기한을 끊으면 힘들게 될 수 있다. 연내를 향해 노력은 할 것”으로 정정했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아베 총리의 발언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굳이 다니가키 간사장이 '연내 타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취지의 언급을 새롭게 소개한 것은 일본 정부도 박근혜 대통령이 해결 시점으로 제안한 '연내'를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사과한다는 한마디 말이면 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본은 일본대로 극우 성향의 동적 에너지를 아베정부의 동력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 진영을 설득하는 것이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독일이 전후에 피해국이나 당사자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배워야할 것이다. 서독은 수상이 빌리 브란트가 되면서 독일은 처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의 유대인 추모식에 참여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으며 이 소식은 곧 전 세계로 전파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실 이때부터 독일의 대대적인 사죄와 참회가 시작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국내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감행하였다. 이런 독일의 태도는 '비굴함'보다는 '성숙해진 독일'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했고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에 한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빌리 브란트는 유대인에 대한 사과 뿐 아니라 서방세계인 영국, 프랑스, 미국과의 화합은 유지한 채 동방세계인 동독 등 동유럽, 소련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은 것이다.
그런데 왜 일본은 그 당시 일본 외환보유고의 반을 넘게 배상금으로 주면서 한일회담을 이끌었는데도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빌리브란트가 했던 것 같은 진정성의 문제가 결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 총리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자 한 유대인 피해자는 이렇게 인터뷰했다고 한다. “나치가 우리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난 결코 용서하지 못 한다. 하지만 독일의 수상이 무릎을 꿇었을 때 분노가 조금은 사그러들었다.” 진정성 있는 사과가 만든 결과였다. 그러므로 결자해지라는 원칙의 하나로 일본 측 책임자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일 관계의 얼 킨 실타래를 풀려면 기본적으로 크게 정부차원, 민간차원의 2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 번째로 정치·경제적인 측면 못지않게 양국민간의 상호이해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당장 회담의 걸림돌은 종군 위안부 문제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를 원점부터 따지기 위하여 우리를 뒤돌아볼라치면 찜찜하고 불편하다. 살펴보니 그 전에는 정신대라는 말로 쓰였지만 서로가 부끄럽고 불편하여 위안부라는 단어를 드러내놓지 않았다. 종군위안부라는 호칭 자체가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중반부터 학계에서 나온 의견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때 한국은 인권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인권 개념도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민족상잔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가난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에 봉착하면 “전쟁 때 살려고 그냥 몸 판 여자들이다” 라는 시각들로 얼버무렸다. 부끄럽지만 다시 옛날 병자호란의 ‘화냥년’처럼 된 것이다. 이런 시각이 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돌이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경제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뒤에 위안부 문제가 여성학 쪽에서 접근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일회담 때 조약의 비준 및 조인 자체도 당시에 반발이 엄청 심했었다. 당시의 우리사회는 반공코드와 새마을 운동과 월남전 등만으로도 바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몇몇 뜻있는 분들의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책임자이자 최종 책임자가 일본인 것은 여전하다. 그런데 사태를 이렇게까지 키운 책임의 상당 부분이 우리 한국 정부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정권이 피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본에게 돈 받아 나라를 일으키는데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한국 정부가 해온 것에 대해 언론은 편향된 보도로 일관하고 말았다. 아무리 보도통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 이 문제를 당사자중심으로 생각하고 배려를 하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에 우리 정부도 정부차원에서 피해당사자들에게 그간의 잘못하고 지나친 것에 대해 솔직하고 소상하게 설명하고 사과와 보상도 있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또한 교육도 그렇다. 교과서에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제대로 써놨더라면 이런 일은 최소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일본이 사과, 배상 안 해서 다시 생긴 문제냐, 첫 단추 잘못 낀 우리의 문제냐고 묻는다면 후자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1차적으로, 최종적으론 일본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서는 박정희 정권 때 있었던 일을 제대로 청산하고 알릴 필요는 있었다는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전후에 패전국인 독일의 사과문제에 대해 일본과 비교해서 언급하지만 사실은 많이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일본도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입장에 변함이 없었다가 2013년 일본의 민주당 정권하에 이른바 ‘사사에 안安’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인 사사에 겐이치가 방한 시 우리 측에 제시 한 뒤 양국이 논의해 일정 수준 구체화된 방안을 말한다. 이 안은 일본총리의 직접사과와 주한 일본대사관의 피해자 면담 및 사과, 일본정부의 예산을 통한 피해자 보상이었지만 아베 자민당의 정권탈환으로 유야무야 된 것이다. 이러한 사안들이 교육의 장으로 옮겨져 알리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상황을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크게 보고 크게 걸어야한다. 민간차원의 교류를 증진하고 확대하는데 정부도 힘을 보태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어제 오늘의 문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이제 내년이면 일본이 정상회담의 주최국이 된다. 얼마나 양보하고 배려하는 속에서 사과의 입장표명이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크게 보고 크게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