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넘어 행복사회로 가자

김헌태논설고문

2015-12-03 10:16:00

 

▲     © 행복세종타임즈


대한민국 사회의 갈등구조는 늘 있어 왔다. 건전한 사회를 향한 사회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에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있으며 이를 법적으로 보호한다. 이익집단이나 단체들이 집회를 갖고 시위를 하는 것은 비단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행동은 집단행동이라고 한다. 이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용어로서 국민들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집단행동으로 부당한 처사에 대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법한 절차와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고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마스크는 그동안 집단행동 현장에서 침묵시위의 상징이자 평화적인 시위로 표방되어 왔다. 그래서 마스크에 ‘X자’를 넣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장면들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어찌 보면 백 마디 말보다도 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녀왔다고 생각한다. 갈등 속에서도 평화를 그려내는 지혜가 엿보이는 시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얼굴을 감춘 폭력 집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정부도 단호해졌다. 엄단하겠다고 공표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집회 시위문화는 언제부터인가 정치적인 색깔이나 이념적인 색깔이 드러나면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상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순식간에 폭력이 난무하고 무슨 불상사가 생기면 본질을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비방전이 전개된다. 또 다른 사회갈등만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시민들과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철도파업이 그랬고 지금의 민주노총 등의 대규모 집회가 그렇다. 반민주와 정권퇴진을 외치며 살벌한 폭력행위가 등장한다. 국민들도 깜짝 놀랐다. 물 폭탄을 쏟아 붓는 공권력의 과잉진압 때문에 경찰차를 때려 부수고 대응을 했다고 주장하며 불법 폭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아전인수’격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경찰도 정보력을 갖고 대응을 준비한 모양새이고 집회 주체 측들도 폭력 행위를 할 수 있는 쇠파이프 등을 사전에 준비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물 폭탄으로 과잉진압하기 때문에 폭력행위가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경찰버스를 끌어내는 밧줄을 준비했단 말인가. 사전 모의가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과연 공권력의 과잉진압인가도 살펴볼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어찌하여 이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국회는 무엇을 했고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정부는 이들이 내세우는 부당한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면서 대화를 통한 민주적인 노력을 펼쳐왔으며 대한민국 민의의 장인 국회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무슨 대책을 세워왔는지 정말 궁금하다.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주역이 되어야 할 정부나 국회가 이들이 길거리로 나와 극단적인 의사표출을 해야 할 정도로 ‘나 몰라라’ 했다면 이는 참으로 엄청난 직무유기에 다름 아니다. 특히 국회와 정당들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엉뚱한 일에는 동작도 빠르니 맨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회의원 세비를 올리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슬그머니 없던 일로 했다. 여기에다 예산 나눠먹기 행태를 음성적으로 벌이다가 들통이 나 종편방송의 뭇매를 맞았다. 내년에 이들이 또 국회로 들어오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해야 할 우선순위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이런 사태의 중재와 해결에 솔선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툭하면 국민, 서민, 시민, 행복, 민생, 청년, 장애인, 꿈과 희망 등 온갖 좋은 용어를 다 갖다 붙여 대기는 정말 잘한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이지만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만큼은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건건이 대립이다. 그러니 사회갈등을 봉합하고 중재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통하여 오히려 반사이익을 얻으려 하고 있다. 여당은 ‘불법폭력집회’라고 하고 야당은 ‘공권력의 과잉진압’이라고 옹호하는 세력으로 둔갑하여 논쟁을 벌여대고 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참으로 모순된 민주주의가 아닐 수 없다. 회고해 보면 과거 민주화 열기에 편승하여 무수한 택시들이 길거리에서 파괴되고 무질서의 부작용이 터져 나온 것도 1987년의 또 다른 사회상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그래도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전 국민적인 대의가 함께 했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통령 직선제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은 민주투쟁승리의 개가도 올렸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지금 불법폭력으로 얼룩진 집회를 민주적인 집회와 시위라고 칭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지금이 과거와 같은 반민주, 반독재 군사정권 시대라고 한다면 오히려 우리 5천만 국민들이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인 자신들의 조국 대한민국을 향하여 반민주를 외쳐대니 시대착오적인 사오정 같은 구호가 아닐 수 없다. 반민주적인 행동인 폭력과 무질서 불법으로 난장판을 만들고 대립과 반목을 부축이며 우리 사회를 갈등구조로 몰고 가는 세력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런 세력들이 기득권 노동계층에 자리하고 귀족노조로 우리 사회를 재단하는 자들이 되어 마치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양 매화타령을 한다면 이는 크나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한 공장 파업사례를 소개해 본다. 신발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는 파업이 아니라 파업기간 내내 한 켤레의 신발 중에 한 짝만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상품성이 없어 판매를 할 수는 없었지만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후에 노사가 서로 합의가 되어 파업을 마치고 나서는 나머지 한 짝을 제조하였다. 이 일화는 소모적인 파업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노사가 공히 상생하였다는 ‘지혜로운 파업’의 일화이다.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지기’식으로 파업이나 집회를 한다면 그것은 서로가 피해자만 낳게 되고 대화의 여지가 없다. 상생하는 길이 아니다. 그런 시행착오는 그동안 여러 파업을 통하여 너무나 많이 겪어왔다. 막가파식의 파업으로 서비스업종인 식당이 문을 닫고, 택시회사가 파탄이 나고, 호텔이 문을 닫았던 그런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이제는 지혜를 가질 때다. 비민주적인 방법으로는 그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그 누구도 갈등을 조장해서도 안 된다. 국민들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 분명 모든 일에 있어 꿈과 희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실현해나가는 과정은 생각처럼 그다지 쉽지 않지만 작은 데에서부터 이를 차분하고 지혜롭게 성취해나간다면 그 과정도 더욱 값지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꿈과 희망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좌절과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새로운 내일과 미래를 탄생시키는 산고(産苦)로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 기쁨은 더욱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갈등사회를 딛고 일어선 행복사회, 희망사회이며 이것이 바로 통합과 화합의 정신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건강한 대한민국의 사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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