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없는 대한민국 갈길을 잃었다.

논설위원 유태희

2017-01-21 11:16:00

 

▲     © 행복세종타임즈

 

조금 긴 프롤로그prologue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청구된 특검의 구속영장이 19일 법원에서 기각됐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구속수감이 우리 경제의 큰 악재였다며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글로벌 재계의 시각은 이미 "글로벌 기업이라는 삼성이 이렇게 부패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이런 부패혐의를 받는 최고경영자가 경영하는 기업이라면 거래하기 곤란하다"는 반응들이 나왔다.

특히 삼성전자의 매출 중 해외매출이 90%를 차지하고 해외매출의 30% 이상이 미국에서 나오는 현실에서 미국의 경영윤리와 사법체계는 삼성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미국은 상거래에 관해서는 형법보다 민법이 앞서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은 합의금을 많이 내면 형사 기소를 피하거나, 벌금 내고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사례가 많다. 그래서 한국처럼 인신구속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소 여부, 그리고 혐의의 실체적 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이재용 사건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나온 전문가들의 의견은 봉건왕조 삼성첨단실리콘밸리 기업 비전 먹히겠냐는 것이다.

    

오늘 서양철학을 논하고 싶은 까닭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이 서양철학을 기본으로 학문을 발전시키고 오늘에 이르렀으며 일본도 또한 철학적 사고를 국가경영에 대입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선진국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자리를 잡으려면 철학이 확고해야한다. 당연하게도 철학도 없이 선진국대열에 합류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산업화과정을 살펴보면 미국제조업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X이론과 Y이론이 있었고 일본제품이 세계시장을 제패한 저변에는 Z이론이 있었다.

    

살펴보면 서양지식의 근간은 그리스의 고대철학이 밑바탕일 뿐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제간이었다는 것은 참 재미난 일이다. 플라톤은 참인 진리, 이데아라고 부르는 깨끗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남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의 모든 곳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유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 철학에서는 그러나 두 사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플라톤을 어딘가 관념적이고 로맨틱한 이상주의자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굉장히 깐깐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현실주의자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데아를 최우선시 했기 때문에 훨씬 팍팍한 철학자였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진행시켜 '중용'이라는 아주 멋진 개념까지 도달시킨 굉장히 유연한 남자였다. 독일에서 플라톤을 따르고 영국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른다는 것만 봐도 알만하다. 한편 서양의 과학지식이 발달할 수 있었던 최초의 근거를 나는 이 철학자들에게서 찾고 싶다. 스승을 전면 부인하면서 스스로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정했던 고대의 유럽 사회. 우리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신화적 요소가 기본적인 톤 앤 매너Ton & Manner로서 잠재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단군이나 삼신할매의 문화적 요소가 밑바닥에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헤르메스와 아폴론은 서양 철학을 지탱하는 커다란 두개의 기둥과 같은 존재다. 먼저 아폴론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이미 알다시피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다. 그리고 음악의 신이며 문명을 상징하는 신이기다. 한마디로 아폴론은 전형적인 문화영웅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거대한 괴물뱀 파이톤을 물리친 일화는 전형적인 문화영웅의 이야기 구조를 나타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태양의 신이라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그는 ''의 신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 이다. 엄격히 태양의 신은 헬리오스라고 하여 따로 존재하니까. 그럼 그가 빛의 신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가의 문제가 남는데, 빛은 모든 것을 비추기 때문이다. 빛은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 비춤과 동시에 자신의 ''에 맞는 질서와 위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벌거벗은 그대로 적날하게 드러낸다.

때문에 아폴론의 조각상은 거의 벌거벗은 모습에 아무런 거리낌 없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거나 한 쪽 팔을 들어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러한 자신의 법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가차 없이 응징하는 신이기도하다. 그의 한 손에 들린 활과 화살은 그런 용도이며, 이것은 곧 태양의 빛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서구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가 하면, 서구과학과 철학의 기본 취지는 동양과 다르게 모든 사물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더우기 근대에 들어 과학에 바탕을 둔 서구사회는 전 세계로 그 세력을 뻗쳐 나가는데, 문명화라는 명목아래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타 민족의 문화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말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것 역시 이러한 아폴론적 사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미국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국가는 가차 없이 불량국가로 낙인찍어 응징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은 이러한데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비교적 간단한 에필로그epilogue 

이쯤에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해 본다.

우리의 역사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이중국적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인이면서 동시에 조선인이었다. 중국 황제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조선왕의 신하였다. 이는 전혀 모순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날 국민들이 국가적 잣대를 들이대어 비판하는 것은 웃기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1910-45년 동안의 한국인들은 일본인이면서 동시에 조선인이었고, 현재의 한국인들은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이다. 여기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지녀왔던 복합적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절대로 중국인도,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들을 끌어안고 융화하고 융합해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단일민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지금의 다문화를 어떻게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 촛불을 통한 교훈이어야 한다.

    

석가모니 시대에 박칼리라는 제자가 있었다. 불치병에 걸려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그는 죽기 전에 스승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부처님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찾아왔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받은 박칼리는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큰절로 예를 올리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말했다. “그만두어라 박칼리야.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내 몸에 예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는 자요, 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것이 나를 예배하는 것이다.” 교단의 후계자도 정하지 않고 절대적 교조이기를 거부한 석가모니의 입멸 후 5백 년 동안 불교 교단에는 불상이 없었다. 제자들은 형상보다는 가르침과 정신을 의지처로 삼은 것이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을 보라. 누가 제대로된 대접을 받고 있는가.

    

90년대 초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제왕적 권위를 자랑하던 레닌, 스탈린, 후세인, 차우셰스쿠의 동상은 일시에 무너졌다. 무너지는 것들이 어찌 동상뿐이겠는가. 한 시대가 조작하고 세뇌한 낡은 권위주의와 함께 맹목적 추종과 의존의 표상인 우상도 함께 무너질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으랴. 인생의 마지막 옷에는 주머니가 없는데 말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으랴 아무리 위대한 국민들의 촛불일지라도. 이것을 통해 편 가르는 정치인이나 여론몰이식 기사로 장삼이사들을 겁박하는 언론이나 감투 하나 쓰겠다고 여기저기 기웃대는 일부 지식인들은 모두 어쩌자는 것인가. 이제 대한민국의 모든 국회의원들을 반으로 줄이고 부패하고 패거리 지으며 정쟁이나 일삼으며 일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은 몰아내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라는 환호 뒤로 2017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이 심하고, 가장 아이를 낳기 어려우며, 또 청년들이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은 나라가 돼버렸다. 이것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청년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여성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비정규직, 농민, 자영업자 등 일하는 사람들이 꿈 꿀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국가는 경제 수준에 걸맞은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고,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생태가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국가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이루려는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또한 앞에서 언급한 한국재벌 삼성에 대한 신간을 출간 예정인 제프리 케인은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통해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를 떠나 삼성이 봉건 왕조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현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삼성을 첨단 실리콘 밸리 기업으로 전환시킨다는 삼성의 비전에 큰 타격이 될 것이며, 이런 비전을 주주나 사업파트너들에게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을 했다.

이런 글로벌 재계의 평판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은 '글로벌 삼성'의 최고경영자로서의 자격을 이미 상실했거나 오명을 입었다는 혹독한 진단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의 재계 역시 "재벌 총수에 대한 단죄는 글로벌 윤리. 법체계 때문에 한국 경제에 타격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구태의연한 방어 논리에 대해서도 따가운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권력과 부의 세습을 근절하고 불평등 해소를 위한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서. 정치, 재벌, 검찰, 그리고 언론·교육 등 사회 전반의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할 로드맵이 필요한 시점에서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엎드려 있는 대한민국호를 다시 운영할 선장은 누구인가를 국민들은 고민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이전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