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한 졸업식 우울한 졸업생 1

특별한 여학교의 성대한 졸업식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5-25 09:52:00

 

▲ 1906년 5월22일, 조선 왕실의 후원으로 왕후 엄귀비 소유의 용동궁터에 설립된 숙명여자고 등보통학교는 발전을 거듭해 신교사를 짓고 1920년 6월15일 낙성식을 가졌다. (사진은 <殖産 銀行10年誌(1928)>에서 전재) = 사진제공 조정희 PD  © 세종타임즈

 

1926년 3월23일 화요일, 경성(=서울) 수송동 79번지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정문에는 아침부터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 혼잡을 이루었다. 검정색의 육중한 고급 승용차들과 택시들이 줄을 지어 도착해 성장한 조선의 신사와 귀부인들을 내려놓았고, 한껏 차려입은 학부모들도 학생들의 안내를 받으며 강당으로 향했다. 이날은 숙명여고보의 제17회 졸업식이었다.

 

숙명여고보는 1906년 5월22일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 엄귀비가 설립한 여학교였다. 명성황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황후 자리에 오른 엄귀비는 두뇌가 명석하고 대범하면서도 인내심이 많고 성품이 활달한 여걸 타입이었다. 그는 특히 백성의 교육, 특히 여성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엄귀비는 황실 재원으로 세 개의 학교를 세웠다. 양정의숙(1905년)과 진명여학교(1906년), 그리고 명신여학교(1906년)였다. 양정의숙은 법학과 경제학을 집중 교육하면서 국가를 경영할 인재 양성을 위한 남학교였다. 진명과 명신은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였다.

 

20세기가 되기 전에도 조선에는 여러 개의 여학교가 있기는 했었다. 한양에 이화학당(1886)과 정신여학교(1895)와 배화여학교(1898)가 있었고 평양에는 정의여학교(1894)와 숭현여학교(1896)가 있었다. 그밖에도 동래의 일신여학교(1895)와 인천의 영화여학교(1897), 개성의 호수돈여학교(1899) 등이 잇달아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여학교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것으로 여성교육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선교사업을 위한 보조수단이었다.

 

한편 한양 북촌에 사는 양반부인 4백여명이 ‘찬양회’라는 부인단체를 결성하고 순성여학교(1898)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조선의 민간인이 설립한 최초의 여학교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10년 국권이 침탈된 이후 해체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도 관립 한성고등여학교(1908)를 설립해 여성교육을 통해 국권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하는 데에 힘을 보태려 했으나 때가 이미 늦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권과 행정권의 절반을 잃었고 머지않아 국권 전체가 일제의 손에 넘어가게 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 숙명여학교 졸업생들은 옥색 저고리에 자주색 치마의 한식 교복을 입고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 어 있었다. (사진은 1920년 3월25일자 <매일신보> 3면에 실린 숙명여고보 제11회 졸업식 장 면.) = 사진제공 조정희PD  © 세종타임즈

 

명신여학교는 1909년에 ‘숙명(淑明)고등여학교’로 개칭됐고,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는 일제의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이 다시 바뀌었다. 이름이 바뀌었어도 이 학교는 항상 특별한 학교였다. 명신여학교라는 정식 이름이 있었지만 ‘귀족여학교’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이 학교의 입학은 왕실 귀족과 명문대가의 여성들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일반 입시를 통해 학생을 선발하게 되었을 때에도 조선의 가장 우수한 여학생들이 지원하는 가운데 3대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이곤 했다.

 

숙명여학교는 설립 이후에도 대한제국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황후 엄귀비는 학교 이름이 숙명으로 바뀔 때에 친필 휘호를 내렸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고종이 덕수궁에 머무르며 환행할 때에도 숙명여학교 학생들은 수동남문에서 그를 지영(祗迎)할 수 있었다.

 

고종과 엄귀비는 수시로 숙명여학교 학생들에게 학용품과 과자를 선물했고, 교사들을 위로하는 연회를 열었다. 고종과 엄귀비의 생일이 되면 숙명학생들이 손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조화나 자수 작품을 진상하곤 했다. 학교의 졸업식과 운동회와 원족회 때마다 고종황제 내외는 금일봉과 선물을 내렸는데, 심지어 엄귀비는 날이 덥다며 부채 1백 개를 하사한 적도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이 숙명여학교에 내린 최대의 선물은 학교를 재단으로 전환시켜 준 것이다. 망국의 기운이 짙어지자 엄귀비는 경기도와 황해도에 산재한 황실 전답 중에서 2백만 평을 떼어 숙명여학교에 귀속시키고 거기서 나오는 소출로 학교를 운영하게 했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학교가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숙명여학교의 학생들과 교원들은 고종과 엄귀비의 유지를 잊지 않았고 엄혹한 일제강점기에도 후배들에게 이를 전승해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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