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한 졸업식 우울한 졸업생 3

특별한 여학교의 성대한 졸업식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6-27 02:33:00

 

 

  © 세종타임즈

최승희(崔承喜, 1911-1969)도 졸업식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9명의 우등 졸업생 중에서 8등이었다. 그의 4학년 평점이 90.5점이었기 때문에 우등생 대열에 낀 것이다. 박화성처럼 발군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수재들이 모인 숙명여고보에서 우등으로 졸업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졸업식에 참석한 최승희의 표정은 어두웠고, 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승희는 1918년 4월, 여덟 살의 나이로 숙명여고보 보통과(=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8년 동안 이 학교에 다녔다. 이 기간에는 수창동 집과 수송동의 학교, 그리고 이 두 곳을 잇는 동선이 최승희가 살던 세계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가 등하교길에 목격한 세계는 아름답지 않았다.

 

최승희는 일제강점 직후에서 태어났으므로 한 순간도 조선이나 대한제국의 신민인 적이 없었다. 나면서부터 일제 식민지 백성이었다. 하지만 망국의 격동을 겪은 부모와 형제들을 통해서 자신의 조국이 조선이라는 점과 그 조국이 지금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집에서는 조선어를 쓰면서도 학교에 가면 일본어를 ‘국어’로 써야하는 생활이 그런 현실을 단적으로 각인시켜 주었다.

 

식민지 현실은 가정이나 학교의 울타리 밖에서도 일상적으로 목격되었다. 경복궁 앞을 지나 광화문통을 가로지르며 경성의 중심부를 걸어서 통학했던 최승희는 조선의 왕궁, 경복궁의 숱한 전각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헐리는 것을 보았고 그 자리에 웅장하면서도 차가운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는 것도 보았다.

 

보통학교 1학년 때에는 고종 황제가 승하해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는 것을 경험했고 조선인들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독립을 주장하던 삼일만세 운동과 그것이 일경과 헌병들에게 진압되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했다.

 

다행히도 잔혹했던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가 최승희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에는 그의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는 이 시기에 조선 양반 출신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화목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최승희가 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1918년 4월이니 그의 학창생활은 대부분 기미 만세운동 이후의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였다. 총독부는 일정한 범위 안에서나마 ‘조선인의 조선인 됨’을 허용했으므로 최승희는 조선어 신문과 잡지를 읽을 수 있었고 조선 황실이 세운 숙명여고보에서 조선인 교사로부터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최승희가 숙명여자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당시 조선 아동 취학률은 3.8퍼센트였다. 그나마 남학생 취학률이 6.4퍼센트였고 여학생 취학률은 1.0퍼센트 남짓이었다. 같은 또래의 여자아이 1백 명 중에서 보통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1명에 불과했다.

 

고등보통학교(=중학교)는 더 심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에 입학했던 1922년의 남녀 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은 28개교에 9천18명이었다. 또래 1천 명 중 4명꼴이었다. 여학생 수는 남학생의 절반 이하였다고 하니 여자의 여고보 취학률은 0.2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이는 일제의 조선인 교육 억제와 차별 정책, 그리고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조선 사회의 관행이 중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차별 정책과 관행 때문에 1920년대의 조선 여성은 보통학교만 졸업해도 식자층에 들었고, 여고보를 졸업하면 최고 인텔리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최승희가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 최고의 여학교에서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집안이 넉넉했고 부모가 관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최준현은 2남2녀의 자녀들에게 모두 신교육을 받도록 했다. 큰 오빠 최승일은 배재고보에 다녔고, 언니 최영희는 진명여고보를 졸업했다. 작은 오빠 최승오도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관립학교인 경성사범학교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립학교였으므로 네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에는 적지 않은 액수의 학비가 필요했다. 다행히 최준현은 그럴 여유가 있었다. 양반 출신으로 지방에 넓은 농지를 소유한 부재지주였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그의 형제들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이 넉넉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 최준현의 각성과 관대함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세상이 바뀌고 있으며 이제는 신교육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최준현 자신은 조선의 구학문을 공부하고 말직이나마 조선의 관리로 근무한 적이 있지만, 하늘같이 여기던 왕조가 맥없이 일제에 굴복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일본을 강국으로 만든 것이 신학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녀들에게 그 학문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 주목했다. 장남 최승일을 배재고보에 보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양식 학교에 실망한 것 같다. 최승일이 배재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는 것을 허락하고 후원한 것을 보면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첫딸 최영희를 서양인이 만든 이화여고보가 아니라 진명여고보에 입학시켰다. 진명은 숙명여학교와 함께 대한제국의 황후 엄귀비가 설립한 학교였다. 최영희는 진명여자보통학교와 여고보를 졸업했지만 전문인이나 직업인의 길을 가지 않고 바로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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