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한 졸업식 우울한 졸업생 4

특별한 여학교의 성대한 졸업식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7-05 03:00:00

 

 

  © 세종타임즈


최영희의 혼인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신여성으로서 구습에 얽매인 시가에서 현모양처로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혼하고 친가로 돌아왔는데, 부친 최준현이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보면 그가 신시대의 새 조류를 이해할 만큼 마음이 열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준현은 막내딸 최승희가 취학연령에 이르자 숙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시켰고, 그대로 고등과에 진학하도록 했다. 최승희는 부모와 형제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린나이와 작은 몸집으로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학교생활도 원만했다. 최승희는 영민한 모범생이었다.

 
제17회 졸업식이 최승희의 첫 숙명 졸업식은 아니었다. 그는 1922년 3월23일의 숙명 13회 졸업식에도 참석했었다. 그때는 숙명 여자‘보통학교’ 졸업생 23명 중의 한명이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때에 학교 제도의 변화로 약간의 문제가 생겼었다.

 
1922년 총독부는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와 같은 6년으로 늘렸다. 따라서 4년제 보통학교 졸업자들은 2년의 학력을 보충하고 나서 고등보통학교(=중학교)에 입학하도록 제도가 변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2년의 보습(補習)기간을 건너뛰고 숙명여고보에 바로 진학했다. 최승희의 보통학교 성적이 우수해서 보습과를 이수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해 4월5일과 6일에 치른 숙명여고보 입학시험에 합격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승희는 1922년 4월15일 80명의 동기들과 숙명여고보에 입학했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26년 3월23일, 76명의 동기들과 이 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다.

 
눈앞에서 진행되는 엄숙하면서도 성대한 졸업식에도 불구하고 졸업생석에 앉은 최승희의 마음은 무거웠다. 졸업 후에 할 일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숙명여고보 졸업생 76명의 진로는 그해 3월7일의 <시대일보>와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진학하는 졸업생이 39명, 일본 유학이 13명, 각종 국내 전문학교에 진학자가 5명, 교원 취업자가 2명, 그리고 졸업과 함께 혼인하는 학생이 16명이었다. 두 신문에 발표된 명단이 완전히 같은 것을 보면 아마도 숙명여고보에서 직접 배포한 명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로가 결정된 학생들의 수를 합해 보면 75명밖에 되지 않는다. 76명의 졸업생중에서 졸업 후 진로가 정해지지 않은 졸업생이 딱 1명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최승희였다.

 
그는 졸업과 함께 혼인할 계획이 없었고 학교나 회사나 관공서에 취업할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응시했고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낙방했다. 숙명여고보 교원회의에서는 최승희가 성악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면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도쿄의 음악학교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을 보류했다고 한다.

 
최승희는 제17회 숙명여고보 졸업생 중에서 앞길이 막막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다행히도 답답한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그날 밤 최승희의 운명을 결정할 만남이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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