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선택한 스승 2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8-16 04:54:00

 

  © 세종타임즈


쌀 반 가마의 무용 공연 입장료

 

이시이 바쿠의 공연이 성황을 이루지 못한 것은 비싼 입장료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입장권 은 특등석이 3원, 2등석이 2원, 학생석이 80전이었다. 1926년의 1원은 오늘날의 대략 8천원 (구매력 기준)이므로 특등석이 2만5천원, 2등석은 1만5천원 정도였다. 최승희도 졸업식을 치 룬 마당에 6천원짜리 학생석 표를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연 입장료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해도 그닥 비싸게 느껴지지 않지만 당시 물가와 비교 하면 아주 비쌌음을 알 수 있다. 1930년의 쌀 한가마니(80Kg)가 13원이었고 그 무렵 조선인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80Kg정도였으므로 2등석 입장권 가격은 한 사람의 두 달 치 쌀값이 었다. 또 당시 신문구독료가 1원이었으므로 두 달 치 신문 값이기도 했다.

 

그날 경성의 오누 이 인텔리의 공연 관람은 밥과 신문을 두 달간 포기한 대가였던 셈이다. 최승일은 아마도 2등석 입장권을 예매했을 것이다. 특등석은 너무 비쌌고, 학생석은 무대에서 너무 멀었다. 난생 처음 무용 공연을 관람하는 최승희에게 음악과 조명뿐 아니라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표정까지도 지켜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산 입쌀도 제대로 사지 못해 양쌀을 먹어야 했고, 그나마도 살 돈이 없으면 끼니를 걸러 야 했던 최승일과 최승희 가족에게는 한 장에 2원이나 하는 공연표가 사치였음에 틀림없다. 4 원이면 여덟 식구가 반달을 먹을 수 있는 쌀값이었고, 신문값을 아끼기 위해 경성도서관까지 걸어가야 하는 수고를 네 달이나 아껴줄 액수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최승일이 아낌없이 4원을 지불하고 표를 산 것은 동생 최승희의 미래가 여기에 걸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승일이 동생에게 이시이 무용공연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보다 이틀 전이 3월21일 이었다. 경성사범학교 구두시험에서 낙방한 여동생의 앞날을 걱정하던 중 경성도서관에서 이 시이 무용단의 공연소식과 이시이 바쿠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을 때였다.

 

“내가 오늘 도서관에 갔다가 <경성일보>를 보니까 일본에서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왔 는데 오늘부터 이틀 동안 공회당에서 공연을 갖는다면서 그 말끝에 자신은 조선에 처음 왔는 데 웬일인지 자기 마음에 조선에는 예술가가 많이 날 것 같다며 자기에게 무용예술을 배우고 자 하는 조선의 소녀가 있으면 두어 사람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더라.” 이시이 바쿠의 경성공연은 이틀이 아니라 3월21일부터 3일 동안이었고 최승일이 보았다는 기 사는 3월21일의 <경성일보> 기사였다.

 

만주공연을 마친 이시이 바쿠는 20일 밤 신징(新京)을 출발해 21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 하라카네 여관(原金旅館)에 여장을 풀자마자 경성일보사를 방문해 인터뷰를 가졌고, 그것이 그날 석간신문 6면에 실린 것이다.“ ... 꼭 조선의 무용을 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경성사람들은 음악이나 무용에 대해 매우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저로서는 동경하는 땅을 찾은 것처럼 기쁩니다. ... 또한 저는 이번에 조선에 온 것을 기회로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고 싶습니다. 나이는 12살부터 15살 사 이로 정말로 열심을 낼 사람이라면 두세 사람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이시이 바쿠가 어째서 ‘경성 사람들이 음악과 무용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 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음주와 가무를 좋아한다’는 <위지 동이전>의 서술을 알고 있었 거나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수도 있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 쿠는 이미 저명인사였고, 조선에 근무하는 일본 관리나 문화예술인들 중에는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경성일보> 사장 마쓰오카 마사오(松岡正男)는 오랜 지인이었다. 이시 이 바쿠가 조선의 문화예술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도 그다지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떤 이유로든 ‘조선인 제자를 찾는다’고 한 이시이 바쿠의 발언은 <경성일보> 기사로 인쇄되 어 동생의 진로를 걱정하던 최승일에게 전달되었고, 최승일은 이 기사를 읽자마자 마침내 동 생의 진로를 찾았다고 흥분하면서 당장 그날 밤에 최승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승희야! 이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남은 마지막 등용문이다, 하면서 오빠는 아주 흥분해서 나 의 몸을 껴안았다.” (최승희, 1937, <나의 자서전>,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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