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선택한 스승 3

조정희 서울대.뉴욕주립대

2020-08-23 02:10:00

 

 

  © 세종타임즈


제자를 찾는 스승, 스승을 찾는 제자

 

이시이 바쿠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 제자를 들이고 싶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 지만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 바람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경성에 머물렀던 기간은 4일에 불과했고, 그동안 조선인 제자를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없다. 어쩌면 그것은 그저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립서비스에 불과했던 것일까? 경성의 음악 수 준이 높다거나 경성인들의 무용 이해가 깊다는 말은 그냥 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근거가 없는 말이라도 누구에게든 해를 끼치는 말은 아니다. 이른바 백색 거짓말이다. 실제로 비슷한 말을 했던 다른 일본 무용가도 있었다. 이시이 바쿠보다 4개월 전에 경성 공연 을 했던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였다.

 

그는 1925년 10월말에 일본을 출발해 부산과 대구, 대 전을 거쳐서 경성에 도착했고, 11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경성 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단에는 일본 민요작가 나카야마 신페이(中山晉平)와 일본악기 샤쿠하치 (尺八)의 대가 요시다 세이후(吉田晴風), 소프라노 가수 사토 치야코(佐藤千夜子) 등이 동참했 고, 후지마 시즈에의 제자 십여명을 동반한, 당시로서는 대규모 호화 공연단이었다. 10월28일의 <매일신보>는 후지마 시즈에가 “조선의 춤을 연구하여 ... 독특한 동작과 음악에 맞추어 일종의 새로운 춤을 창조할” 것이라고 보도했고, <경성일보> 인터뷰 기사는 “조선인 무용가를 찾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실었다. 그는 경성에 도착했을 때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이틀의 공연에서도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무용을 배우겠다며 따라나선 조선인은 없었다. 사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은 이시이 바쿠보다 훨씬 큰 성황을 이루었다. 흥행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신문에 보도된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 사진 중에는 경성공회당이 관객으로 가득 찬 사진이 여러장 실렸다. 반면 이시이 바쿠의 공연 사진에는 관객석을 찍은 것이 없었다. 다 시 말해 인기의 면에서는 후지마 시즈에가 이시이 바쿠보다 훨씬 나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후지마 시즈에는 조선인 제자를 얻지 못한 반면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얻었다.

 

그 동안 평전들은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를 제자로 삼았다고 서술했지만, 거꾸로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스승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기 있던 후지마 시즈에를 제치고 흥행 에 실패한 이시이 바쿠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이시이 바쿠를 선택했을까? 우선 두 사람의 무용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두 사람 모두 가부키와 노와 같은 일본 전통 무 용을 답습하지 않고 근대화된 작품을 창작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일본 무용을 근대화시 켰고 일본 무용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후지마 시즈에가 여전히 일본 음악과 일본 의상을 사용하면서 일본 전통무용의 동작들을 재구성한 반면, 이시이 바쿠는 일본 전통무용과의 연결을 끊고 서양식 음악과 서양 식 의상을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무용을 선보였다. 다시 말해 후지마 시즈에가 일본 전통무용을 근대적으로 ‘계승’하면서 ‘개선’했다면, 이시이 바쿠는 일본 전통을 깨뜨려 버리고 서양식 발레 동작을 접목시킨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무용을 ‘개발’했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자신이 개발한 새로운 양식의 무용을 ‘무용시’라고 불렀다. 이는 일본 전통 무 용과도 달랐지만 서양의 발레와도 구별되었다. 무용시는 관객에게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이 목 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음악과 조명, 동작과 표정 등을 총동원해서 관객의 감성에 직접 호 소하려고 했다.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소개했다. “춤은 ‘인간의 감정 또는 사상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운율적인 운동’이라는 신념 아래 정진하 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무용은 음악이 가장 소중합니다.” 이와 함께 이시이 바쿠는 일본 전통음악보다 서양 음악을 쓰거나 혹은 서양식 음계로 작곡된 음악을 반주 음악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일본 관객에게 이 해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여야 했지만, 친숙함과 새로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후지 마 시즈에의 무용은 훨씬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경성 공연을 가졌던 후지마 시즈에와 이시이 바쿠 중에서 최승희는 후자를 스 승으로 선택했다.

 

<경성일보>의 애독자였던 최승일은 후지마 시즈에와 이시이 바쿠의 “조선인 제자 구함”이라는 메시지를 모두 접했을 테지만, 동생에게 이시이 바쿠를 소개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상황이 달랐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 때에는 최승희가 진로 선택의 여지 가 아직 남아 있었다. 최승희는 도쿄 음악학교 유학을 생각 중이었으므로 일본 무용가의 “조 선인 제자를 구한다”는 메시지에 귀기울일 절박함은 없었다. 이시이 바쿠 때는 달랐다. 도쿄 음악학교에 이어 경성사범 입학도 좌절되었므로 최승희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둘째,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아무리 근대화되었더라도 여전히 일본 춤이었다. 반주 음악도 일본 악기를 사용한 일본 음악이었고, 의상도 전적으로 일본 의상이었다. 조선인의 눈에는 일 본 춤이 근대화된 특징보다는 일본 전통의 계승이 먼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토와 문 화를 강점당한 조선인들은 아무리 근대적이라 해도 ‘일본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이시이 바쿠의 무용에는 일본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서구적이었다. 물론 그 가 전달하려는 정서와 감성은 일본인들에게 친화력이 있었겠으나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음악 과 의상, 동작과 표정은 서구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인에게 훨씬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이시이 바쿠는 일본에서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순회여행을 가졌고 거기서도 호평을 받았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유럽 공연을 다녀오고 난 뒤에는 그의 성가가 한껏 높아져 있었다. 그의 무용 세계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이를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독일에서 마리 비그만(Mary Wigman 1886-1973)의 표현주의 신무용(노이에 탄체)을 접 한 뒤로는 그의 무용도 서구 무용과 접점이 생겼다. 특히 독일 순회공연 중에 창작한 <사로잡 힌 사람>은 이시이 바쿠를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Harald Kreutzberg, 1902–1968)에 못지않 은 표현주의 무용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일본적이기만 한 후지마 시즈에 의 무용보다 서구 무용과 접맥된 이시이 바쿠의 무용에 더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오빠 최승일의 경험이었다.

 

최승일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 니혼대학 미학과에 유학 하면서 일본의 근대적 문화현상을 눈여겨 관찰한 바 있었다. 그중에서 문학과 연극 분야의 새 로운 움직임과 함께 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목격했고, 그 선두주자가 바로 이시이 바쿠였다. 최승일은 유학기간 중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미학적 관점 에서 보아도 일본이나 조선의 근대 무용의 미래는 후지마 시즈에 식의 일본식 근대무용이 아 니라 이시이 바쿠식의 서구식 근대무용에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큰오빠 최승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최승희가 후지마 시즈에를 제치고 이시이 바쿠를 스승으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스승이 조선인 최승희 를 제자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선택한 셈이었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 이후 불과 1달 반인 5월7일 후지마 시즈에는 경성 2차공연을 가졌 다. 자신의 1차 공연이후 6개월만이었으니 1차공연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다. <경성일 보>의 보도에 따르면 후지마 시즈에의 2차 경성 공연도 대단히 성공적인 공연이었다. 하지만 후지마 시즈에는 이때에도 다른 조선인 제자를 얻지 못했다. 그의 무용은 아마도 감상 하기에는 이국적이고 신기했겠으나 조선인이 연구하고 연마하기에는 너무도 일본적이었기 때 문일 것이다. 후지마 시즈에가 두 번째 경성공연의 성공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최승희는 도쿄 무사시노의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시의 공부와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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