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귀족)'이라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제가 합해진 말이다. 1808년 프랑스 정치가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지배층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말이기도 하며 모든 나라의 귀감이 되는 표현이다.
이를 대한민국 사회로 가져와 보면 좀 창피한 용어가 되어버린다. 이를 통해 거울처럼 비춰보면 사회고위층을 향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추한 모습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모습은 장관후보자나 총리후보자들이 거쳐야 하는 인사청문회라는 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총리후보자의 딸 부부가 라임펀드에 특혜가입의혹이 있다는 공방을 놓고 인준을 반대했으나 결국 여당 단독으로 강행처리했다. 그런가 하면 해양수산부장관 후보자는 영국대사관 시절 관련 후보자는 부인의 고가 도자기 불법 반입·판매 의혹으로 자진사퇴했다. 낙마라고도 표현한다. 하지만 아파트다운계약과 위장전입, 가족동반 외유성출장, 논문표절 등의 의혹을 갖고 있는 과학기술정통부장관후보자는 임명이 강행됐다. 국토교통부장관후보자도 마찬가지이다. 위장전입과 취득·지방세 부당면제, 특별공급아파트 갭 투기 논란 등으로 야당의 부적격 판정을 받았지만 임명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민여론조사에서도 57.5%가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응답이지만 이는 무시됐다.
이를 보는 국민들의 심경은 과연 어떠하겠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야당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인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너무나 정치적 액션에 그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들의 생각은 훨씬 더 앞서가 있다. 이 나라를 운영하는 주체들이 너무 썩어가고 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다. 시정잡배들보다 더한 추잡한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챙기던 자들이 국민 지배계층에 쉽게 올라서 정의와 진실을 논하는 것 자체가 역겹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이번 정권 내내 이뤄져왔다. 무슨 문제가 드러나고 도덕성에 엄청난 흠결이 발생해도 반대를 위한 반대로 치부하며 임명을 강행했다. 이번 정부 4년간 야당 동의 없이 임명된 장관급 인사가 무려 31명으로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14년을 합친 수 30명을 넘어섰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야당동의 없이’ 라기보다는 국민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 인물들이 버젓이 고위직에 임명되어 ‘가타부타하며 매화타령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라는 지적이 많다.
다시 말해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부적격자들이 지배층에 군림하며 공공의식을 높인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LH투기 사태를 비난하며 공분을 금치 못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직무상 취득한 정보를 갖고 사리사욕을 취했다는 점이다. 흔히들 이해충돌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금기시 되는 것이기도 하다. 단위농협 대의원이나 이사 선거에서 이른바 경업금지를 엄격히 명시해 연계 업종들과의 이해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공공의 정보를 활용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자 하는 사회적 함의가 이미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고위직들이 보여주고 있는 생활 자세나 드러난 문제점들이 정상성을 크게 벗어나도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국민 앞에 세워놓으니 과연 이것이 정당한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 열 명 중 6명 가까이가 부적절하다는 여론인데도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는 저의는 또한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니 작금에 국민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대한민국정치가 이런 수준인가도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배층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은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맥이 빠진 용어가 되어버렸다. 저 멀리 프랑스에서나 적용되는 남의 나라 말에 불과해지고 있는 것이다.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이 없어도 출세를 하는데 지장이 없고 정치일선에 나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나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철마다 요란 떠는 후보자 선발 검증절차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없는 자들이 정치판을 휘젓고 다닌다면 정치판은 정상모리배들의 판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우려감이 팽배해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걱정이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의 이처럼 황폐한 도덕의식과 국민 무시정치가 횡행하는 나라가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미래를 짊어질 어린 세대들이 기성세대 위정자들의 난잡한 모습을 지켜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성장할지가 걱정이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불법· 탈법·편법이 판을 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아무리 정의를 부르짖고 국민을 들먹여도 이미 생명력과 신뢰가 사라진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는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에 반하는 행태를 일삼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질이 아니다. 작금에 코로나19 사태에 억눌린 국민감정이 휴화산이 되어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적폐청산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드러난 추잡한 비정상과 비도덕성의 모든 것을 바로 도려내는 것이다. ‘적폐청산’이 아니라 ‘적폐수술’부터 단행해야 할 절체절명의 나라꼴이다. 서민들은 생계형 주차나 신호 위반만 해도 불법이라며 하루 일당까지 물어야 하는 나라다. 임명 강행자는 물론 부적격자이면서도 고위층에 나서는 자들 모두가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개망신을 당할 정도이면 위선자에 다름 아니니 스스로 알아서 국민 앞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 망각이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 거세다. ‘노블리즈 오블리제 정신’을 우습게 아는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꼴이 바로 지금임을 모두가 자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