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대목(大木)이라는 말이 있다. 설·추석과 같은 명절을 앞두고 경기가 활발한 때를 일컫는 말이다. 재래시장이건 대형마트건, 일반 상점이건 명절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점이 바로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대목이 사라졌다. 바로 코로나 때문이다. 올해는 델타변이에 이어 오미크론 변이바이러스가 명절 분위기를 한마디로 잡쳤다. 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며 최다기록을 경신하면서 감염이 확산되고 있다. 기존에 접종한 백신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부스타샷도 마찬가지다. 오미크론의 돌파감염과 확산 속도는 설 대목을 기다리던 상인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버리고 말았다. 설 연휴 고향을 찾는 발길조차 막아버리고 있다. 백신접종으로 올 설에는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꿈이 사라졌다. 당연히 설 대목이 침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
2년여에 걸쳐 코로나 사태가 설과 명절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사회적 분위기조차 흥이 나질 않는다. 과거에는 설을 앞두고 대목을 보는 재미에 상인들도 웃음꽃이 만발했다. 어린이들은 설 명절을 앞두고 설렘으로 가득했다. 한마디로 전국 곳곳이 따스한 삶의 정취가 물씬 풍기며 행복한 만남이 이뤄졌다. 한때 이중과세라고 해서 이를 막으려 했지만 민심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코로나 2년여의 세월은 명절 분위기를 송두리째 짓밟고 있다. 침체된 대목분위기에서 상인들의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있다. 특히 2022년의 오미크론 확산 속도가 참으로 무서울 정도이니 방역당국조차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설 명절 연휴를 맞았지만 국민 모두가 정신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무엇보다 동심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설빔을 기다리는 마음이 곧 동심이었다. 설을 맞이하여 새로 장만하여 입는 옷, 신발을 일컫던 설빔이 잊어지고 있다. 설빔으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린아이들의 환한 모습과 고향을 찾아 줄을 잇는 귀성객들의 행렬이 사라졌다. 가는 곳마다 마스크에 얼굴을 가리고 오미크론 감염을 걱정하면서 다녀야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쩌다가 이런 사태를 빚게 되었는지 21세기 바이러스 공포가 첨단 과학시대를 무색케 하는 것 같다. 위드코로나 시대가 선언되던 지난 해 11월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다. 불과 석 달 만에 이런 사태가 빚어지고 있으니 어린이들이 설레는 설 명절 분위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다 6인 이상 사적모임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귀성객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래도 설명절의 여유로움을 찾아야 한다. 닷새간의 긴 연휴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맞고 있고 비록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설 명절의 참뜻은 잊지 말아야 한다. 부모님의 안부를 살피고 친인척들과의 우애도 다지고 조상님들의 음덕도 기려야 하는 마음이다. 오미크론 변이바이러스가 설 대목을 사라지게 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저해한다고 마냥 우중충한 얼굴로 명절을 보낼 수는 없다. 급속도로 확산되는 오미크론을 감기처럼 치부하며 가볍게 여길 일도 아니다. 노령층에는 치명적일 수가 있다. 방역수칙을 잘 준수하고 조심하면서 설 연휴를 보내야 한다. 우리민족의 애환을 함께 해온 설 명절은 아무리 코로나가 힘들게 해도 정겹고 설레는 고유명절임에는 틀림없다. 윤극영 작사 작곡의 설날이란 동요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에게도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한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참으로 정겨운 동요가 아닐 수 없다. 색동저고리, 떡국, 세배, 세뱃돈, 윷놀이, 연날리기, 팽이치기 등 설 명절에 등장하는 정겨운 말들이다. 실제 나이도 한 살 더 먹게 된다. 설 명절은 분명 덕담이 오가는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이자 축제의 날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예부터 지켜온 설 명절만큼은 모두의 기쁨이자 희망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비록 코로나 오미크론으로 힘든 설 명절이지만 마음만큼은 고향과 가족, 친인척들과 함께 하며 모두가 풍요롭고 행복한 설 명절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