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타임즈]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충북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벽암대사비가 재조명을 받고 있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71호인 법주사 벽암대사비가 호국과 애민 정신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유적으로 전해지면서다.
대한불교조계종 5교구 본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보은의 속리산 법주사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인근 자연석 암반 위에 세워진 비석 2개를 접할 수 있다.
하나는 충북 보은 출신의 조선 중기 대표적인 승병장이자 남한산성 증축에 참여하고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법주사를 다시 세운 '벽암대사' 관련 비석이다.
다른 하나는 봉교비다.
이 벽암대사비는 조선 현종 5년에 건립된 비석으로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오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비의 높이는 2.13m, 폭 1.1m, 두께 35㎝ 규모다.
벽암대사는 보은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해 설묵의 제자가 됐다.
14세에 보정과 그 후 선수의 제자가 돼 스승을 따라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에서 수도 정진했다.
수도 정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으로 해전에 참여해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적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돼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에 인조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의 직함과 함께 의발을 하사하며 대사의 공적을 치하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옮겨가자 전국 사찰에 '총궐기해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격문을 보냈다.
승군 3000여명이 모이자 이를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벽암대사는 1646년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은거했다.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자신도 화엄사로 가서 지내다가 제자들에게 '도업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한 뒤 86세의 나이에 입적했다.
봉교비는 조선 23대 순조왕 태실로 전해진다.
홍영의 문화재팀장은 "평생을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한 큰 어른 벽암대사의 뜻을 한 번쯤 되새겨 보는 호국보훈의 달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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