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가 닫혔다, 4월의 유조선 스케줄은 비어 있다 — 기름 대란이 현실이 됐다
전쟁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의 경제 동맥이 막힐 위기에 처해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불거진 중동전쟁이 4주째를 넘기면서,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는 이 좁은 해협이 막히자, 국제 유가는 한 달 새 40% 넘게 급등했다. 지난 2월 27일 배럴당 72달러대였던 브렌트유는 3월 25일 99달러를 넘어섰다. 경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국내 기름값은 이미 리터당 1,900원대를 훌쩍 넘어섰고, 정부가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했음에도 소비자와 산업 현장의 체감은 여전히 뜨겁다. 공공기관 차량 5부제가 3월 25일부터 의무 시행에 들어갔다. 1991년 걸프전 이후 35년 만에 부활한 에너지 위기 대응 조치다. 그 숫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명확하다. 지금은 35년 전 걸프전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에너지 위기라는 것이다. 정부는 원유 자원 안보 위기 경보를 '주의' 단계로 격상했으며, '경계' 단계로 올라가면 민간 차량까지 5부제가 의무화된다.
더욱 서늘한 소식이 들려왔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직전 극적으로 빠져나온 유조선 '이글 벨로어'호가 3월 20일 충남 서산 대산항에 입항했다. 한국의 하루 소비량과 맞먹는 약 200만 배럴의 원유를 실은 이 배가 당분간 마지막 입항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충격이 퍼졌다. 4월 국내 정유사들의 입항 스케줄은 사실상 비어 있는 상태다. 종량제 봉투 사재기 현상이 전국 마트에서 벌어지고, 나프타 수급 우려가 현실화하면서 국민들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경제 위기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다.
비축유 90만 배럴 '증발' — 국가 에너지 안보의 최후 보루에 구멍이 뚫렸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경악하게 한 사건이 터졌다.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울산 석유 비축기지에 보관 중이던 국제 공동 비축 원유 90만 배럴이 해외로 팔려나간 것이다. 한국석유공사가 우선 구매권을 즉시 행사하지 않은 사이, 중동 산유국 기업 A사가 해당 물량을 동남아 지역에 판매해 버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긴급 감사에 착수했지만, 90만 배럴은 이미 대한민국을 떠난 뒤였다.
90만 배럴이 어느 정도의 양인가. 대한민국 전체가 8~9시간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수치로 표현하면 가늠이 어렵지만, 호르무즈가 닫히고 4월 유조선 스케줄이 공백인 이 시점에 단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절박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90만 배럴의 증발이 얼마나 뼈아픈 손실인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비상시 국내 에너지 안보를 위해 보관하던 기름이, 국가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해외로 팔려나간 것이다.
국제 공동 비축 사업은 해외 기업의 원유를 우리 비축 창고에 보관해 주고, 비상시 한국이 우선 구매권을 행사해 국내 수급에 활용하는 제도다. 에너지 안보의 최후 보루로 설계된 이 시스템이 가장 긴박한 순간에 작동하지 않았다. 석유공사는 'S 정유사를 통해 국내로 도입되는 계약이 진행 중인 줄 알았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A사는 유가 급등을 틈타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다른 나라로 물량을 돌려버렸다. 결국 협상 끝에 110만 배럴은 국내 공급권을 지켰지만, 나머지 90만 배럴은 끝내 잃고 말았다. 이것은 단순한 실무 착오가 아니다. 에너지 위기 대응 시스템에 구조적 허점이 있었다는 증거다. 지금 이 허점의 근원을 파헤치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같은 실수는 반드시 되풀이된다.
경제 전시 체제는 선언됐는데 — 정치는 여전히 '공천 전시 체제'에 머물고 있다
정부는 26일 대통령 주재 비상 경제점검회의를 열고 '중동전쟁에 따른 비상 경제 대응 방안'을 발표하며 '경제 전시 체제'를 선언했다. 구윤철 부총리는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경제 회복의 불씨가 흔들릴 수 있다'라며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유류세 최대 25% 인하 확대, 25조 원 규모 전쟁 추경 편성 추진, UAE 원유 2,400만 배럴 추가 확보, 나프타 수출 제한 조치 검토까지 연이어 나왔다. 전시에 준하는 긴박한 조치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 국회와 정치권을 돌아보면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나라가 에너지 위기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순간에도 여야는 6·3 지방선거 공천을 둘러싼 진흙탕 싸움에 여전히 골몰하고 있다. 야당에서는 공천 주도권을 두고 계파 간 갈등이 공공연하게 노출되고, 여당에서는 후보 난립으로 선거판이 혼돈 상태다. 주식시장은 연일 출렁이고 환율은 위기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데, 정치권이 앞다투어 내놓는 것은 에너지 위기 대응책이 아니라 공천 계획이다.
지금 국민들의 일상은 어떤가. 주유소에 갈 때마다 치솟는 기름값에 한숨이 나오고, 마트에는 종량제 봉투 매대가 텅 비어 있다. 소상공인들은 배달비·난방비 급등으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물류 현장에서는 경유 가격 폭등이 운송비 전반을 끌어올리면서 물가 연쇄 상승이 현실화하고 있다. 이 모든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국민들의 눈에, 공천 싸움에 혈안이 된 정치권은 어떻게 보이겠는가. 분노와 혐오, 그리고 깊은 체념이다.
난세에 영웅은 오는가 — 위기의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상
'난세에 영웅이 난다'라는 말이 있다. 그것이 옛말인지 현실인지, 지금 이 순간, 국민들은 뼛속 깊이 묻고 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때, 박정희 정부는 비상 에너지 절약 체제를 즉각 가동하고 중동 외교를 강화해 국가 위기를 돌파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 때도 산업 구조 재편을 통한 에너지 효율화가 뒤따랐다. 과거의 위기 극복은 지도자들이 국민과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방향을 제시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지도자가 있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에너지 위기를 정면으로 다루는 국가 컨트롤 타워의 실질적 작동이다. 비축유 90만 배럴 유출 사건이 단순 실무 착오인지 시스템 붕괴인지를 철저히 규명하고, 재발 방지책을 법제화해야 한다. 중동 의존도를 낮출 에너지원 다변화 전략과 비상 수급 대응 매뉴얼도 지금 당장 정비되어야 한다. 구호로서의 '경제 전시 체제'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위기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정치권의 각성이다. 6·3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둔 지금, 지방선거 후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지역에서 에너지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지역 산업의 원자재 수급 차질을 어떻게 풀 것인가.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의 에너지 비용 급등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후보를 찾기가 이토록 어려운 현실이 우리 정치의 민낯이다. 공천 싸움에 바쁜 정치인들은 이 질문 자체를 듣지 못하고 있다.
국민에게 고한다 — 위기는 속이지 않는다, 선택은 지금이다
중동전쟁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호르무즈 해협이 언제 다시 열릴지도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이 위기가 단기에 해소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정부는 UAE로부터 원유 2,400만 배럴을 추가 확보하고, 원전 가동률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리며, LNG 수요를 줄이기 위한 다각도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이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가 에너지 안보 체계의 근본적 재정비가 병행되지 않으면, 다음 위기에서 또 같은 혼란을 겪게 된다.
국민들도 이 위기의 당사자임을 직시해야 한다. 에너지 절약은 구호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공공기관 차량 5부제에서 출발해 민간 에너지 절약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것은 지금 이 시대 국민 모두의 과제다. 동시에, 이 위기를 틈타 담합과 폭리를 취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부가 단호히 응징해야 한다. 검찰이 이미 4대 정유사에 대한 담합 의혹 수사에 착수한 것은 옳다. 위기를 이용한 경제 범죄에는 무관용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6·3 지방선거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단순한 지역 권력 교체의 선거가 아니다. 에너지 위기와 경제 대란이 현실이 된 이 엄중한 시대에, 국민의 삶을 지킬 진정한 일꾼을 가려내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공천 잡음과 계파 싸움에 매몰된 후보가 아니라,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기름이 마르는 시대, 정치까지 마르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선택이 대한민국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 선택의 무게를,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한다. 위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위기가 드러낸 것은 기름의 부족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국가와 잠든 정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