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대통령의 통 큰 정치적 결단을 보고 싶다.

유태희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9/05/22 [18:02]

문재인대통령의 통 큰 정치적 결단을 보고 싶다.

유태희 논설위원 | 입력 : 2019/05/22 [18:02]

 

▲     © 세종타임즈

정치적 올바름(政治的-영어: political correctness)은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종족·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특히 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차별·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는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 용어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은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정당성, 심지어 정치적 순결성 등으로 번역되어왔다. 심지어는 ‘순결성’이란 표현은 영어에 있지도 않다. 의역이라 해도 너무 지나친 창작이다. 사전에는 분명히 ‘correctness’명사로서 1.정확함, 정확성. 2.(행동의) 방정, 단정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political correctness”의 해석은 차별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 정치적 공정함, 차별적 표현에 대한 과도한 반응으로 국한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파생한 숙어로 ‘emotional correctness 정서적 타당성’, ‘dress correctness 센스 있는 복장’ 등이 있다. 원래는 냉소적인 뜻이 포함된 이 단어는 레닌이 러시아 혁명 성공 이후 사용했다. 그러나 혁명의 영광도 잠시, 곧바로 시작된 내전과 외국의 군사 개입으로 인해 인민들의 궁핍이 극에 달하자 레닌은 자본주의 정책을 도입한다. 이럴 때 꼭 반발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레닌은 1920년 <공산주의의 좌익소아병>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극좌파의 비현실주의(순수정치)를 비판할 때 이 용어를 썼었다. 그리고 1960년대 미국의 시민권 운동에서 “실천의 다짐”이라는 용어로 쓰였다가 1980년대에는 레이거노믹스에 좌절한 리버럴들이 이 말을 자조적 의미로 다시 쓰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서는 이 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다양성을 배려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했던 운동이 오히려 또 다른 전체주의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어를 고르는 것에만 집착하는 이들을 'PC 경찰'(PC police)라고 부르면서 비꼬는 것은 기본이고, 이미 'political correctness'라는 단어 자체도 냉소적인 어감을 띄게 되었다.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부유한 케팔로스에게 부자로 사니 무엇이 좋으냐고 물어본다. 케팔로스는 남에게 빌린 것을 갚을 수가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올바르게 사는 것이 별 것이겠는가?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주 단순한 사실이지만 상식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는 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과연 올바름은 단순히 남에게 빌린 것을 갚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던 친구한테서 무기를 맡았는데 나중에 미친 상태로 와서 무기를 돌려 달라고 한다고 하세. 그러면 우리는 무기를 돌려주어서는 안 되며, 나아가 무기를 되돌려 주는 사람이나, 미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주려고 하는 사람도 결코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구나 말할 걸세.”(국가 331c) 소크라테스는 ‘무기의 비유’에서 오히려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올바르지 않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대부분의 상황은 단순히 한 가지 도덕적 원리에 의해 판단하기에는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 무기의 비유는 하나의 상황에 여러 도덕적 원리들이 상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즉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 원리와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살인을 하도록 방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 원리가 상충된다. 또한 플라톤은 정의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를 볼라치면 자기만 올바름을 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올바름의 정(正)을 두고 정치가 숨통을 막는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최대의 선(善)이 아니라 최소의 잘못이 아닐까.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에 극단적인 갈등이 초래할 정치적 파국을 경고한 사람이 있다. 바로 비극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소포클레스다. 그를 통해 우리는 규범적 갈등에도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혜안을 발견해보면 어떨까. 아테네 시민들이 무대 위에서 두 배우가 벌이는 논쟁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을 다니는 친구를 숨겨주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에서부터 ‘국가를 배신한 사람을 가족이라고 감싸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고민에 이르기까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배우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곧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한계 속에서 절규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관객들은 도무지 누가 옳은지를 판단할 수 없는 국면(aporia)에 다다른다. 지금 정치에 무관심하던 시민들조차 극단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바로 정치적 결단이다.

 

이제 박근혜전대통령의 죄도 어느정도 가려지고 구속기간도 740일이 넘어 섰다. 여당인 민주당은 내년 총선의 득실을 따질지도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통 큰 석방이 민주당의 이득으로 돌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고 내년 총선의 선거판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더운 날씨에 여름에 잠시 내린 눈처럼 국민들은 신선한 뉴스를 듣고 감동해하고 행복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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